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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에서 나온 흉노족의 인골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1. 4. 27. 21:47
삼국통일을 이룬 자신감의 발로일까, 문무왕은 자신들 신라 왕족의 조상이 흉노인임을 스스럼없이 밝혔다. 경주김씨의 조상이 흉노족이었다는 이 충격적인 스토리는 2005년 벽두 KBS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신라 제30대왕 문무왕의 비문에 대한 판독결과를 '역사스페셜'에서 공개하며 밝혀졌는데, 족보상 내물왕과 원성왕의 후손이요 경순왕의 직계라는 나도 몰랐고, 경주김씨 종친회마저 몰랐던(심지어 불쾌한 반응까지 보였던) 그 충격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비문은 처음에는 문무왕의 업적을 늘아놓다가 앞면 하단 5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문무왕의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왔던즉 화관지후(火官之后)의 창성한 터전을 이어 높이 세워져 융성하니, 투후(秺侯)로서 하늘에 제사지냄이 7대를 전해 왔고,(秺侯祭天之胤傳七葉)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신령스런 산악에서 탄생하여 임하시도다.(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
즉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라는 사람이고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문무왕의 직계이다. 족보에서 문무왕의 15대조를 추급해보면 김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김세한은 <삼국유사>에는 김열한(金熱漢)으로 나오는데, 두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김알지의 아들이라 말하는 것을 보면 글자가 비슷함으로 인해 발생한 판각(板刻) 과정에서의 오류로 여겨진다. 즉 경주김씨 족보의 김세한이 성한왕인 것이다.
그 성한왕은 김인문 비문에서도 등장하는데 역시 15대조로 기록돼 있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 김법민의 친동생이니 성한왕이 15대조임은 당연한 노릇이다. 또 그 성한왕은 흥덕왕릉비의 파편에도 등장하니 흥덕왕은 자신이 성한왕의 24대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흥덕왕은 문무왕의 9대손이니 이 또한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흥덕왕릉 비편에는 그가 '태조 성한왕'으로 기록돼 있다. 태조란 나라를 세운 왕을 이름이니 굳이 비정하자면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이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성한왕은 이처럼 비문에만 등장하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나(신라 말기의 승려 진공대사나 진철대사 비문에도 그가 신라 김씨의 시조로 비정된다) 그 성한왕의 7대조인 투후(秺侯)라는 인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상 투후라는 제후명을 가진 사람은 한나라 무제로부터 투후를 하사받은 김일제(金日磾, BC 135-85)라는 사람 1명 뿐이기 때문이다.(封金日磾爲秺侯/<한서>) 즉 김일제가 투후이며 그의 후손들이 신라로 와 경주 김씨의 조상이 된 것인데, 그 과정을 <한서> '김일제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한무제(漢武帝)가 흉노 정벌을 위해 보낸 장수 곽거병의 포로가 된다. 이후 중국으로 끌려가 궁중에서 말을 키우는 일을 하게 되는데, 흥미로운 기록은 무제가 말을 사열할 때 다른 마부들은 무제와 동행한 궁녀들을 힐끗거리기 바빴으나 김일제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에 남다른 인물이라 생각한 무제가 그에게 보다 나은 벼슬을 주었고, 김일제는 이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해 고관대작에 이르고 그의 후손들도 모두 높은 벼슬을 한다.* 한무제는 이때 그에게 김(金) 씨 성을 하사하니 금을 숭상하는 흉노의 풍습에 따라 붙여진 성이었다.
* 김일제는 망하라(莽何羅)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무제를 보호한 공로로 투후로 봉함을 받았고,(투·秺 지방의 제후가 되었고) 투후의 작위는 아들 김상(金賞)이 잇는다. 기원전 85년 김일제가 병사하자 황제인 소제(昭帝)는 한무제 무덤인 무릉(茂陵) 곁의 장지를 하사했고, 경후(敬侯)라는 시호를 내릴 만큼 황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의 무덤이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전해진다.
문제는 왕망(王莽, BC45-23)이 쿠데타를 일으켜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웠을 때 김일제의 후손들이 부역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일제의 후손이 당시 명문세족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한데,* 하지만 왕망은 과거의 제도로 회귀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펴다 반발에 부딪히고, 결국 유수(劉秀, 후한 광무제)가 이끄는 군대와 곤양(昆陽)에서 패한 후, 그 자신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신나라는 15년만에 망하게 된다.
* 중국 사서와 곽가탄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내용을 근거로 김일제의 4대손 김당(金當)이 왕망과 동복형제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고, 왕망이 김당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 남편, 즉 김당의 이모부라는 소수 설도 있다. 이와 같은 설을 크게 믿을 바는 못되다 하더라도 김일제의 후손이 한나라에서 명문세가를 이루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김당을 비롯한 김일제의 후손들은 이제 역적이 됐다. 그리고 역적인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한나라를 탈출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트피플이 됐고 중국 땅에서 가장 먼 한반도 동남쪽에 도착한다. 그 새로운 땅에서 그들은 신(新)나라를 대신한 또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우니 곧 신라(新羅)와 가락국(駕洛國)이라는 나라였다.
계림의 김알지 설화는 그들 김일제의 후손들이 보트를 타고 온 루트에서 그후 2천년이 지난 20세기 들어 신나라 화폐 화천(貨泉)이 발견됨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 통용된 화폐 오수전') 김해 구지봉(龜旨峰)과 경주 계림(鷄林)은 그들 보트피플이 자리를 잡은 곳으로 이후 계림은 신라에 앞선 국호로 쓰이기도 하였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그 발상지가 국호로 사용됨은 역사의 상례이다. 그 계림에 대해서는 앞서 주목한 바 있다.(☞ '기마민족국가 신라의 유물 3점'/'서봉총은 진평왕의 무덤이다')
신라에 도착한 그들 김씨 집단은 곧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니 신라 17대 임금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가 세습된다. 그간 박·석·김의 세력이 번갈아 가며 오르던 왕위를 김씨가 독점하게 된 것으로, 김씨 외의 다른 세력들을 모두 몰아냈다는 뜻이다. 이때 채택한 마립간이란 호칭 역시 강력한 왕권을 뜻하는 바, 흉노의 황제를 이르는 대선우(大單于), 몽골의 황제를 이르는 '칸'과 그 한자와 발음이 유사하다.
그 경주김씨 세력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을 서라벌의 월성에서 성벽 밑에 묻힌 인골 2구가 지난 2007년 발견되었다. 월성 서쪽 문지(門址, 문 터)에 나란히 누워 있는 인골 2구 중 키 166㎝의 남성은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웠고, 159㎝의 또 다른 남성은 맞은편 사람 쪽으로 몸을 조금 비튼 상태였다. 이를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는 성벽이 잘 축성되라는 기원을 담은 인신 공양으로 해석하며, 고대 중국(BC 1600~1000) 상나라에서 성행했다는 인주(人柱)설화, 즉 제방이나 건물 축조 때 사람을 제의용으로 묻는 설화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케이스라고 했다.
산 자가 묻힌 것은 아니라 하나 이것을 인신공양으로 이해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반듯이 누윈 인골에 대해 해석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 이상이나 된 상나라(은나라) 인주설화가 갑자기 경주 땅에서 튀어나온 사실이 못내 어색하다. 천년 전,(길게는 1천7백~8백년 전) 중원에서 성행했던 인신공양의 제의 의식이 대륙의 동쪽 끝에서 발견되었다고? real?
솔직히, 이건 real이 아니어도 너무 아니다. 중간에 어떤 징검다리라도 발견된 사례가 있다면 혹 모르겠지만, 상나라 때의 인주설화라니 너무 뜬금없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거니와 순장은 흉노족의 풍습이다.(이 순장 풍속은 지증왕 때 왕명으로 폐기된다) 이 인골 2구는 무덤에서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월성의 축성이 순탄하기를 기원해 묻은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순장이나 인신공양에 바쳐지는 젊은 처자나 어린아이가 아닌 50대 남자들로 밝혀졌다.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묻히기를 원한 애국애족의 정신이 투철한 흉노인이거나 그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금관을 비롯한 찬란한 황금 유물, 기마인물형 토기의 쇠 솥(동복), 비단벌레 날개 장식의 화살통과 말안장, 적석목곽분(돌무지 넛덜무덤)의 장례 풍습, 근친혼, 마립간 용어 등 신라 땅에 남은 흉노의 자취는 정말로 많다. 이것은 모두 김일제의 후손들이 신라 땅에 들여온 것들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들은 왕망의 역성혁명에 대한 보복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인데, 전한을 무너뜨린 왕망을 흉노족 김일제의 인척으로 여기는 일설(一說)을 믿기는 힘들겠지만, 김일제의 후손들이 왕망과 손잡고 신나라를 세운 것은 확실하다.
앞서 말한 대로 신나라 멸망 후 그들이 동쪽 땅끝으로 와 신라와 가락국을 세운 것인데, 가락(駕洛)은 ‘후한의 수도 낙양을 옭메겠다는 의미'라는 소수 설도 있다. 사실 그 속내까지야 알 수 없지만 그들의 후예가 월성의 성벽 밑에 누워 있을 수는 있다. 문무왕의 아버지 태종무열왕은 태조 성한왕과 함께 태종(太宗)이라는 삼국 유이(有二)의 묘호를 가졌던 왕이다. 661년 태종무열왕 사후 그 아들 문무왕에 의해 세워진 비문에는 필시 흉노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이 김춘추의 빛나는 업적과 함께 새겨 있었을 것이나 추사 김정희가 보았다고 하는 그 비문은 어느 순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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