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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왕의 순수비에는 무엇이 쓰여 있나?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8. 25. 06:19

     

    앞서 '진흥왕순수비 개관'에서 말했지만 진흥왕순수비에 적혀 있는 그의 직함은 태왕(太王), 즉 황제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순수비가 세워진 568년은 진흥왕의 재위 29년, 나이 36세 되던 해로, 그는 그때 연호를 개국(開國)에서 태창(太昌)으로 바꾼다. '(나라가) '크게 번창한다'는 뜻으로서 태왕(太王)'으로서의 자신감의 피력이었다. 태왕이란 동방에서의 '황제'의 개념으로, 만주 집안(集安)의 광대토태왕비에서 그 연혁을 찾을 수 있다. 이에 진흥왕의 척경 사업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비견되기도 한다.
     
    지금껏 별로 주목을 못받았지만 이 태왕의 호칭은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태창 원년'의 연호와 함께 뚜렷이 기록돼 있다. 북한산비 또한 마찬가지로 태왕의 호칭이 분명하나 다만 연호가 새겨진 부분의 글씨가 마모되어 비석이 세워진 연대를 알 수 없으며 황초령비나 마운령비에 쓰인 '제왕건호'(帝王建號, 제왕이 연호를 세움)나 '짐'(朕) 등의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북한산비 역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세워진 568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잘 알려진 대로 이 비를 고증한 사람은 추사 김정희로, 그는 조선 순조 16년(1816) 친구 김경연과 함께 삼각산(북한산) 승가사에 놀러 갔다가 위쪽 삼각산 봉우리에 국초(國初)의 무학대사가 세운 비석이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에 혹한 김정희는 승가사 계곡을 타고 비봉에 올라 비석을 찾아내었고, 비석 표면의 오래된 이끼를 제거한 후 '□흥태왕급중신등순수관경지시기'(□흥태왕이 많은 신하 등과 영토를 돌아본 때의 기록)라는 글자를 확인한다. 이 비가 전승되던 무학대사나 도선국사의 비가 아니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승가사 일주문
    김정희가 오른 비봉 / 꼭대기에 순수비가 희미하게 보인다.(사진출처: 위키백과)
    비봉의 복제비/ 비는 1972년 경복궁 회랑으로 옮겨졌고 2006년 복제비가 세워졌다. 비가 세워졌던 기단은 따로 사적 228호로 지정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북한산 순수비 / 국보 제3호로 비신의 높이는 155.1cm, 너비 71.5cm, 두께 16.6cm이다. 1989년 경복궁 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2005년 지금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며 다시 이전됐다.

     
    이때 김정희는 당 31세로 금석학에 빠져 있던 그는 "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비석 등을 찾아다녔고 이에 관련된 경전을 연구하느라 오랫동안 시 읽는 일도 때려쳤다"(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고 술회할 정도였는데, 그러한 마당에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것이었으니 기쁨 두 배였을 터였다. 김정희는 그 벅찬 감격을 비의 옆면에 남겼던 바, '此新羅興大王 巡狩之碑 丙子七年 金正喜 金敬淵 來讀'(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이란 글자가 그것이다.
     
    ~ 김정희가 북한산비의 옆면에 글자를 새겨 넣은 일은 <완당전집>에도 보이나 처음부터 정(釘)과 망치를 가지고 오르진 않았을 터, 1816년에 적어도 두 번 이상을 탐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추사는 이듬해인 정축년(1817년)에는 조인영과 함께 올라 글자를 조사하고 탁본을 뜬 후 다시 '丁丑 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 同來 審定殘字 六十八字'(정축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 남은 글자 68자를 조사하여 정하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북한산 순수비의 옆면 / 왼쪽의 예서가 나중에 새긴 것인데, 김정희가 새긴 예서와 행서 사이에 '己未八月二十日 李濟鉉 龍仁人', 즉 '기미년 8월 20일 용인 사람 이제현'이라는 무명인의 글이 각자 돼 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이 글은 2006년 복제비에서 제외됐다.
    국립중앙박물관 게시 판독문

      

    비문의 본래 글자 수는 대략 200자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마모가 심해 현재 읽을 수 있는 글자는 120자 정도로서 중간중간 마모된 글자가 끼어 있어 전체적인 내용을 정확히 판독하기는 어렵다. 첫째 단락 1행도 상부의 마모로 읽기 힘드니 결정적으로 연호가 박락되어 건립 연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머지 주요 글자들이 살아 있어 '진흥태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영토를 순수하던 때의 기록'이라는 내용임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둘째 단락은 탈락된 글자가 너무 많아 대강 추정해볼 수밖에 없는데, 고구려 및 백제와의 전쟁에서 많은 전몰장병들이 발생하게 된 것은 왕의 부덕의 소치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순수 길은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고 이 지역의 신하와 백성들을 위무하며 충성스러운 자를 포상하기 위한 것이라며 순행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산의 석굴에 살며 도를 닦던 어떤 도인을 만난 사실을 기록하였다.(이때는 도교가 들어오기 전이니 도인은 승려로 갈음될 터인데, 아무튼 이 특이한 기록은 독실한 불제자였던 진흥왕의 승려에 대한 예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다음으로는 왕을 수행한 신하들을 나열했는데 이중에서는 특히 '사탁무력지잡간 남천군주'(沙喙另力智迊干 男川軍主), 즉 김무력의 이름과 관직이 두드러진다. 그를 이곳 남천주의 초대 수령으로 임명했다는 것으로, 그의 이름은 앞서 단양적성비에도 등장한 바 있다. 김무력은 본시 금관가야의 말왕(末王)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532년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투항하면서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된 자였다.(금관가야는 멸망했으나 김무력의 손자 김유신은 훗날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던 바, 홍복을 누린 셈이다. 신하가 왕으로 추존된 경우는 5천년 역사에서 김유신이 유일하다)
     
    (비문에는 담겨 있지 않으나) 진흥왕은 재위 33년 되던 해인 572년 새로운 연호 '홍제'(鴻濟)를 제정해 반포한다. '큰 다스림', '큰 정치'라는 뜻인 바, 정치를 좀 더 대국적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앞서의 '태창'이 영토 확장에 기반을 둔 큰 번영을 직설적으로 추구한 데 비해, 이 홍제라는 연호는 문자 그대로 '큰 정치'를 내걸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영토가 확대되고 왕의 나이도 든 만큼 정치철학도 한층 세련되어 깊고 폭넓은 단계로 진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천년의 왕국 신라> 김기흠)
     
    이쯤에서 갑자기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지 않아 죽은 정치인이 생각난다. 그렇게 타살되지는 않았더라도 최고권력자의 말로가 다들 순탄치 않았음은 집권기간 편협한 정치를 지향했다는 방증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흥왕의 순수비(황초령비)에 등장하는 '신고여서'(新古黎庶)라는 조어(造語)를 강조하고 싶다. 정복지의 신민(新民)이라도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본래의 백성인 고민(古民)과 똑같이 대하겠다는 뜻이다. 권력은 억압과 과시의 속성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권력의 말로는 대개 비참하다. 진흥왕은 태왕의 권력을 얻었으되, 그 힘을 과시하지 않고 덕치(德置)와 포용으로써 나라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신고여서'라는 말로 함축해 표현했던 것인데, 동반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서 벗어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퍼지지 아니라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이에 짐은 제왕의 연호를 세워 스스로를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하며, 아울러 짐은 태조의 기틀을 받아 왕위를 계승함에도 몸을 조심하고 스스로 삼가며 두려워하였다. 짐은 영토를 개척하여..... 신·구민이 평등히 하나 되게 하였다. 왕도(王道)는 덕화에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본래 신라의 백성이었던 자는 물론이요, 피정복민 또한 억압하지 않고 스스로 삼가해 다스리겠다는 그의 덕치주의 사상은 작은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흥왕이 공맹(孔孟)을 알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내성의 덕이 그 감화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바람직한 사회를 형성해간다는 덕치주의의 근본원리를 알고 있었던 듯하니 "덕으로써 하는 정치는 북극성이 한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별들이 그 북극성을 중심으로 향해서 도는 원리와도 같다"고 한 <논어>의 금언을 진작에 깨우쳤던 것 같다. 
     
    실제로 태왕의 순수비에는 <논어>의 '수기안인'(修己安人, 제 몸을 닦은 후 백성들을 편안히 한다)이나 ,<대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 제 몸을 닦은 후 백성들을 다스린다)의 사상이 그대로 배어 있다. 정말로 순수비의 내용은 후대 군주들이 계고삼아 마땅한 것들이다. 한무제 시대의 명재상 동중서(董仲舒)는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백관이 바로 잡고, 백관이 바로 잡아야 만민이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아무 생각없는 통치자나, 편협하여 내 편만을 챙기는 통치자는 그 밑의 관료들도 모두 똑같이 행하게 되니 우리는 과거 이 같은 사례를 수없이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
     
     

    코드 1을 죽인 건 맞는데, 정말 이런 말을 했을까?
    역사의 교훈 / 삼국통일의 주인공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고구려나 철권통치를 행하던 의자왕의 백제가 아니라 진흥왕의 덕치를 계승한 신라였다.
    마지막 숙제 감악산 비 / 경기도 파주에 있는 감악산(해발 675m) 정상에는 북한산 비와 매우 유사한 형태의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글자가 전혀 판독이 안 돼 그간 몰자비로 알려진 이 비석에서 2019년 光, 伐, 人의 세 글자가 판독되었다. 이 비는 과연 진흥왕의 순수비일까? (자료와 사진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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