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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무왕의 사천왕사와 감은사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2. 4. 14. 05:22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대륙 세력에 완전히 병합될 위기가 세 번 정도 있었다. 첫 번째는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까지 넘볼 때, 두 번째는 몽골이 세계 대제국을 형성했을 당시 원나라에 의해, 세 번째는 티베트와 위구르와 대만을 병합시킨 청나라가 조선의 편입을 망설였을 때였다.

      

    그 첫 번째 위기를 막아낸 나라는 신라였다. 흔히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점, 그리고 그것이 고구려의 영토를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점을 들어 감점을 주고 있지만 신라는 당나라 50만 대군과의 싸움에서 이겨 한반도를 지켜냈던 바, 신라의 노력이 절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입 앞에서 내분을 보임으로써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이후 당나라는 다시 신라마저 병합하려 들었으므로 신라가 그들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면 당시의 왕인 무열왕이나 문무왕도 당나라로 끌려가 의자왕과 보장왕처럼 고개를 조아릴 뻔하였고, 고려나 조선이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기벌포 해전 상상도 / 676년 11월 신라군은 기벌포에서 설인귀의 당나라 수군을 섬멸시킴으로써 7년 간의 나당 전쟁을 끝맺는다.

     

    ~ 기벌포의 위치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대강 금강입구 설과 서천 앞바다 설이 맞부딪히는데, 나는 금강입구 설을 믿어 사진을 올린 바 있지만 사실 이를 지지할 만한 어떤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사진을 내렸으나, 다만 확실한 증빙이 없어서 일뿐 서천 앞바다 설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확실한 무엇이 없기는 서천 앞바다 설 또한 마찬가지이기에.....

     

    ~ 안타까운 점은 신라의 통일 전쟁 중에 일어난 중요 전투의 장소가 대부분 불확실하다는 것이니, 저 유명한 황산벌 전투 장소를 비롯해, 위의 기벌포 해전, 왜(倭)의 2만 7천 구원군과 나당연합군과의 대전(大戰)이 벌어졌던 백촌강 전투(* '감은사종' 참조) 장소,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였던 주류성 등의 위치는 모두 알 길이 없다. 예전 논산에 있는 계백장군 묘(그나마 추정)와 개태사를 찾아갔을 당시 안내를 맡은 교수님께서 저 앞이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여겨진다고 했을 때 그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당나라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주역답게, 그리고 구국의 영웅답게 자신의 무덤도 동해 바다에 수중릉으로서 마련하였던 바, 이것이 저 유명한 대왕암(大王岩)이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대왕암을 그저 문무왕의 산골처(散骨處: 화장한 뼈가루를 뿌린 곳)로 비하했으나 내가 볼 때는 엄연한 문무왕의 릉이요, 감은사는 그 능묘의 능찰이다. 삼국통일을 이뤄내고 당나라와의 싸움도 이겨낸 문무왕이기에 가능할 수 있는 무덤이다.*

     

    *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테니 자신을 화장해 그 뼈를 바다에 장사 지내라는 그와 같은 위대한 유언을 남긴 군주는 세상에서 오직 문무대왕 한 사람밖에 없다.

     

     

    대왕암 / 감포 앞바다 20m 지점의 돌섬으로 인공으로 바위를 가다듬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왕암 중앙의 거북돌 / 이것이 자연적인 것이냐 인위적인 것이냐가 문제로다.(사진: 월드얀 뉴스)

     

    문무왕은 당시 극성이었던 왜구의 칩입을 물리치고 나서 이후 죽어 동해의 용이 되어서라도 왜구를 막겠다는 일념이었던 듯, 살아생전부터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당대에 완성하지 못하고 그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완공시킨다.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는 이와 같은 기록과 함께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는 구멍을 언급했는데, 1959년 조사에서 실제로 금당 터에서 유사한 돌 구들이 발견되어 세인을 감탄케 했다. 신문왕은 그와 같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서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한 것이었다.*

     

    * 원래 문무왕은 타국을 진압하였다는 뜻에서 진국사(鎭國寺)로 발원하였으나 아들인 신문왕이 감은사로 고쳐지었다. 

     

     

    감은사 금당지의 돌 구들
    감은사 금당지의 돌 구들

     

    유감스럽게도 문무왕의 죽음에 관한 옛 기록은 다만 그것뿐이어서 대왕암이 문무왕의 해중릉이냐, 산골처냐 하는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오늘 내가 말하려는 종(鐘)에 관한 기록 역시 찾아볼 길 없다. 다만 지난 2009년에 왕의 통일 위업을 기록한 비문의 일부가 발견되고, 그가 삼국통일을 기려 세운 사천왕사의 녹유신장상전(綠釉神將像塼)이 발굴 100년에 완전 복원을 이룬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문무왕릉비 하단 / 1961년 경주 동부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투후(秺侯)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문무왕릉비 상단/ 2009년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됐다. 조선시대 사라진 뒤 200년 만의 재발견이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공개한 투후(秺侯) 김일제 자취 / 신라 김씨의 왕계가 흉노족의 후예인가 하는 뜨거운 역사 논쟁의 불을 지폈다. 문무왕릉비 하단부의 탁본이다.
    실학자 유득공의 해석 / 유득공도 투후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선조라는 내용에 깊은 고민을 한 듯 보인다.(<고운당필기>)
    <해동금석원>의 문무왕릉비문 / <해동금석원>은 청나라 유희해가 편찬한 책이다. 김정희가 그에게 탁본을 건넸을 때는 파편 4점이 보존되었던 듯 이 책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써 문무왕릉비의 내용이 거의 이해 가능하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자신감으로 신라 왕족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피력한 것 같다.
    발견 당시의 문무왕릉비 상단 파편 / 2009년 동부동 민가에서 빨래판으로 쓰이던 것을 눈 밝은 수도검침원이 발견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된 문무왕릉비 상단 파편
    문무왕릉비는 이와 같은 형태로서
    사천왕사에 있던 이 귀부에 세워져 있었다.
    문무왕릉비가 있던 곳 (그림: 네이버 블로그)
    1930년대 일제가 동해남부선을 호국사찰 사천왕사를 관통해 개설했다. (절 중앙으로 선로가 지나간다) 화살표가 비석이 있던 자리이며 위의 숲이 선덕여왕릉이다. 비석은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장례를 마친 682년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입구의 표지판
    소나무 숲길이 아름다운 낭산의 선덕여왕릉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 선덕여왕릉의 뒷길에 이상하게 복원됐다. 원형을 알 수 없어 1979년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2단까지만 복원하고 나머지 부재는 주변에 쌓아놓았다. 동해남부선을 놓을 때 철로 침목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수작(秀作)인 12지신상도 3개가 유실됐다.
    1939년도의 능지탑
    사천왕사 목탑지 기단부에서 수습된 녹유신장상 조각 (출처:연합뉴스)
    복원돼 일반에 공개한 녹유신장상 3점 / 올해 3월 공개된 작품으로 극사실적인 묘사와 국제적 감각이 돋보이는 수작이다.(사천왕상이라는 설도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전시 안내 팜플렛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천왕사 녹유신장상
    감은사 사리함과의 비교 / 위 신장상은 감은사 동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의 사천왕상과 매우 유사하다. 둘 다 당대의 승장(僧匠) 양지(良志) 작품으로 여겨진다.
    감은사 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 장엄구의 내함과 외함 (사진: 문화유산채널)
    내함 자세히 보기
    감은사 동서 삼층석탑 / 신라 3층석탑과 쌍탑 가람 배치의 시원을 연 기념비적인 거탑이다.
    감은사지 가람 배치도

     

    그런데 발굴에 의거한 위 가람 배치도를 살펴보면 종이 걸린 종루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은사에서는 종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은즉 '정림사지 평제비문'에 '화대(花臺)에서 달을 바라보니 패전(貝殿)이 공중에 떠있고 그림을 새긴 종(鍾)이 밤에 울리니 맑고 맑은 깨끗함이 새벽에 통한다(花臺望月貝殿浮空疎鍾夜鏗淸梵晨通)'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부여 정림사에도 종이 있었던 듯하나 종루의 흔적은 없다.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탑의 기둥돌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명( 大唐平百濟國碑銘)
    그외에도 몸돌에는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내용이 써 있다. / 이른바 평제비문 (平濟碑文)으로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글을 읽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 시대에는 아예 '평제탑'이라는 오욕의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했으나 그렇다고 소정방이 세운 탑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가지 위안은 있으니 이 때문에 탑은 망실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져 올 수 있었다.(익산 미륵사탑은 신라 선화공주의 후광 효과로, 부여 정림사탑은 소정방의 공적을 새긴 글귀로 인해..... 본인 생각임)

     

    내가 갑자기 부여 정림사를 예로 든 것은 범종이 불교의 예식에서 중요히 여기는 불전사물(佛前四物)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그 불구(佛具)와 불탑의 제작에 있어서는 백제가 신라보다 앞섰다 여겨지기 때문이다.(황룡사 9층탑이 백제 장인 아비지에 의해, 불국사 석가탑이 백제 유민 아사달에 의해 지어진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사서 <주서(周書)>에는 백제에 '탑과 절이 심하게 많다(塔多寺甚)'고 기록돼 있으나 지금 전하는 탑은 두 세 기뿐이다. 아마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목탑은 모두 불태워지고 석탑은 파괴된 듯싶은데, 그래도 백제탑은 신라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바, 거의 신라 최초의 석탑이라 할 수 있는 감은사 탑은 백제의 석탑을 흉내 냈다 하는 것이 중론이다. (화강암은 오히려 신라 쪽 것이 더 양질일지 모르겠다)

     

    앞서 말했다시피 감은사 탑은 이후 모든 신라 석탑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김유신과 더불어 백제 사비성에 입성한 태자 김법민(문무왕)은 돌을 마치 나무처럼 깎아 만든 정림사지 석탑과 같은 탑들을 보고 심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들의 석탑이라야 그저 중국의 전탑(塼塔)을 모방한 이른바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전부 아닌가?(현재 신라의 가장 오랜 탑인 분황사 모전석탑 외에도 그 전후의 신라 탑은 전탑 혹은 모전석탑이었다)

     

    이에 다수의 백제 장인들이 경주로 끌려갔을 터, 그중에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을 만든 아사달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끼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신라의 많은 불사에 참여했을 것인데, 대표적으로는 감은사와 고선사 석탑 건설의 노역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양식의 거탑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 곧바로 감은사종에 관한 이야기를 이으려 했으나 글이 길어져 아무래도 잘라야 할 것 같다. '봉덕사종과 황룡사종'의 3편 격인 감은사종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잇기로 하고 대신 문무왕이 세운 또 다른 사찰 망덕사(望德寺)를 소개하며 맺겠다. 

     

     

    망덕사 당간지주
    사천왕사와 더불어 신라의 대표적 호국사찰이었던 망덕사는 지금은 듬성듬성한 주초석과 2.44m의 훤칠한 당간지주 외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당시 이곳은 13층의 높은 목탑 2기가 위용을 자랑하던 대찰이었다. 망덕사는 후대의 사람들이 문무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보이며 당시에는 사천왕사와 비슷한 호국사찰 이미지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사천왕사와는 지호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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