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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국가 신라의 유물 3점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2. 4. 15. 05:28
앞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에서 말했듯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족의 후예이다. 아울러 금관가야의 김씨 왕조 역시 흉노족의 후예로서, 학계 한 구석에서만 설왕설래되던 흉노족의 한반도 남부진출설은 1990년도부터 발굴이 시작된 부산 대성동 고분에서 기마민족의 지표유물인 청동 솥, 즉 동복(銅鍑)이 출토되면서 정설로 굳어졌다. 동복은 역사상에서 오직 북방 유목민족만이 사용하던 물건이었던 바, 흉노족의 일파가 이 한반도 땅 끝에 와서 정착했음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적시된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기마민족의 후예들')
신라 경주 김씨가 흉노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뜻밖에도 'KBS 역사스페셜'로 밝혀졌다. 교양 프로그램으로서는 보기 드문 높은 시청율로 주말 황금시간대의 막강 드라마들과 싸우던 그 프로그램은 어느날 아쉬움 속에 폐지됐는데, 그것이 2005년 벽두에 부활하면서 '신라 왕족은 정말 흉노족의 후예인가'라는 강력한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경주 김씨인(자칭 왕손이라고 하는) 나 역시 몰랐고, 경주 김씨 종친회마저 전혀 몰랐던, 나아가 불쾌하다는 반응까지 보였던 그 같은 역사적 사실을 KBS가 기획적으로 공개한 것이었다.
앞서 '문무왕의 사천왕사와 감은사' 편에서도 언급했듯 그 단초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비문이었다. 그 비문에서 문무왕은 자신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을 천명하였던 바, 신라 김씨 왕족이 흉노족의 후예임이 명확한 역사적 사실로서 고증된 것이다. (말하자면 <삼국사기>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경주 계림의 금궤 운운의 설화는 이주해온 흉노족 김씨 집단의 왕위 찬탈에 대한 미화극쯤이 될 것 같다)
그들 기마민족의 신라 진출은 사실 일제 시대 발굴한 신라의 고분에서 감지됐다. 따라서 냄새를 잘 맡았다면 그때부터 뭔가 알아낼 수도 있었던 것이니, 바로 금령총에서 출토된 2점의 기마인물형 토기였다.
금령총은 경주 봉황대 고분 뒤에 위치한 비교적 작은 무덤으로 1924년 5월 30일 일본인 우메하라에 의해 발굴되었다.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금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허리띠 등 황금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이후로도 마찬가지거니와 이와 같은 황금 유물은 오직 초기 김씨 왕조의 무덤에서만 발견된 유물이었으니, 흉노족이 신라 땅으로 건너오면서 자신들의 황금 숭배 풍습과 금세공술을 함께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관심을 끈 유물은 앞에서 말한 기마인물형 토기였다. 우메하라 역시 그 가치를 힘주어 지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것은 이후 한국의 대표 유물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이와 견줄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그 조형미가 가히 발군인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금령총에서 발견된 기마인물형 토기는 모두 2점으로, 인물상과 말 장신구에서 보이는 표현의 차이에 비추어 주인과 시종임을 알 수 있다.
표현의 방식은 2점이 모두 디테일했다. 말재갈과 고삐, 말방울, 안장, 말 드리개(말을 탄 사람에게 진흙이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가리개) 등의 장신구는 모두 세세히 묘사됐고, 말 주인은 편안한 안장 위에 앉아 등자(발걸이)에 발을 건 모양새였다. 한 마디로 말과, 말을 탄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표현된 셈이다.
대릉원 155호 무덤에서 출토된 말 드리개
여기에 그려진 천마로 인해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천마총 금관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화려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천마총 (대릉원 155호 무덤)
새로 개장된 천마총 내부
1973년 신라 최대고분인 황남대총의 발굴에 앞서 그 앞의 작은 무덤인 155호 고분을 시범 발굴했는데,(연습 삼아) 뜻밖에도 금관과 관모 금제장식을 비롯한 황금 유물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이 고분은 천마총으로 명명돼 그 내부가 전시실로 공개되었다.
또 한 가지 주목을 끈 것은 말 엉덩이 부분에 얹혀 있는 솥 모양의 그릇이었다. 처음에 이것은 단순히 그 기능, 즉 주전자의 물 주입구로서만 여겨졌으나 이후 김해의 대성동 고분의 동복이 발견되면서 이것이 동복일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후 흉노의 지표유물 동복이란 것이 밝혀졌다. 우리가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이 고구려와 백제, 가야에 이어 신라에서도 확인된 셈이다.
기마인물형 토기의 동복과 말안장
토기의 기능은 주전자였으나 실제 사용되지는 않은 부장용 유물로 여겨진다.
STB에서 말하는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의 계보/
김일제와 김윤은 모두 휴도왕의 아들로 윤은 일제의 동생이다. 김윤은 일찍 죽고 그 아들인 김안상이 도성후(侯)가 되어 한(漢)나라의 지배세력으로 자리잡는데, 윤의 4세손 김탕이 신(新)나라 왕망과 한편이 되었다가 왕망이 실각하자 그 일족들이 김일제의 후손과 함께 한반도 남쪽 땅으로 이주해온다.
가야의 기마인물형 토기
독지가 김양선 선생이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한 유물로 경주 기마인물토기와 함께 최고의 토기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높이는 23.2cm이며 국보 275호로 지정됐다. 흉노계 민족의 가야 이주를 말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동아일보 사진)
이상의 기마인물 토기와 더불어 소개하고 싶은 유물은 1973~75년 발굴된 대릉원 지구의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아래의 말안장 뒷가래개 장식이다. 이 유물 역시 처음에는 화려한 금관 등의 유물에 밀려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복제 복원된 후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하고 정교한 수작(秀作)으로서, 아울러 기마민족의 대표 유물로서 관심을 받게 됐다.
황남대총의 위용
부부 합장묘인 황남대총은 남북 120m, 동서 80m, 높이 23m의 신라 최대 고분이다. 가운데 행인과 비교해 보면 그 규모가 쉽게 짐작되는데,
비단벌레 장식 말안장 (문화유산채널 사진)
지금은 볼 수 없는 발견 당시의 진품이다. 이후 이 말안장은 비단벌레의 건조로 인한 훼손 및 공기접촉으로 인한 변색을 우려해 글리세린 용액에 담겨진 채 지금껏 국립경주박물관 지하 특별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이 말안장 뒷가리개 장식은 신라시대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물이다. 이 장식품은 나무 심 2개를 접합한 뒤 그 위에 백화수피 2겹 정도를 깔고 그 위에 세로 방향으로 비단벌레 날개를 촘촘히 깔아 붙였다. 그 위에 금동 맞새김판을 덮고 테두리를 감싸 못으로 고정하였던 바, 아래와 같은 투조 새김판 밑으로 횡으로 늘어선 비단벌레의 날개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번외로 아래의 배 한 척을 소개하고자 한다. 2019년 경주 월성 해자 발굴 때 나온 의례용 목선으로 현재까지 국내에서 확인된 모형 배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형태는 준구조선(準構造船)으로 통나무배에서 구조선으로 발전하는 중간단계 선박이다. 크기는 약40㎝로, 실제 배처럼 뱃머리와 배꼬리가 분명히 표현됐는데, 내가 이 배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배가 바로 한(漢)나라에서 탈출한 경주 김씨 선조들이 이용한 배의 원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곧 다시 자세한 설명이 있겠거니와, 신라 경주로 이주한 김씨 세력은 기마민족의 후손임이 확실하나 그렇다고 말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왔다. 신(新) · 후한(後漢) 교체기 (AD 23년 전후)에 산동반도를 출발한 경주 김씨의 선조들이나 김해 김씨 선조들 모두 보트 피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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