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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마민족의 후예들 (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8. 07:47


    부순희라는 여자 사격 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불세출의 총잡이로 일세를 풍미하였던 바, 94년 세계선수권, 97년 밀라노 월드컵, 98년 뮌헨 월드컵, 99년 월드컵 파이널스 등에서 우승하며 10년 이상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아무튼 스포츠 권총과 공기 권총에서는 세계에서 그녀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부진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2000년 무렵 위암 판정을 받았고 2002년 4월에 수술을 했다. 가족들 중에서도 위암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고 하니 필시 가족력에서 기인한 병인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술 후 재기에 성공하였으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후 6년 만에 다시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가히 인간승리로 불릴만한 드라마적인 인생 스토리였는데, 그녀에 관한 또 다른 드라마적인 경기를 본 것도 아마도 그즈음이었던 듯싶다. 그녀의 멋진 총솜씨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얼굴까지는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그것은 나뿐 아니라 중계방송을 하는 캐스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만 다음과 같은 해프닝이 벌어졌다.(사실 이것이 내가 그 선수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순희

     

    '퀵 엔 데드' 속의 샤론 스톤

    '퀵 엔 데드' 포스터

    샤론 스톤이 불세출의 여자 총잡이로 나온 영화로 아마도 부순희 선수가 서부시대에 태어났다면 이와 같았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의 중계 때는 금메달이 바라다 보이는 현장을 따라 중계 화면이 바쁘게 바뀌는데, 마침 부순희 선수가 금메달을 다투는 순간이 포착되었다. 그런데 9점대의 타깃과 선수들의 얼굴이 번갈아 비쳐지는 그 숨 가쁜 파이널 동안 시청자들은 부순희 선수가 아닌 몽골 선수의 사격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봐야 했다. 카메라 맨 역시 부순희 선수의 얼굴을 몰랐던 듯 계속 몽골 선수에게 포커스를 맞췄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을 몰랐던 캐스터는 그 몽골 선수가 부순희 선수인 양 중계를 계속했던 것이었다. 내 기억으론 그 몽골 선수 역시 초롱초롱한 눈매의 ‘미녀 총잡이’였다.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이유는 당연히 우리나라 사람과 몽골인의 외양이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흡사하다기보다는 거의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니, 같은 극동 민족이라 해도 중국인과 일본인은 인식이 가능하지만 몽골인은 정말로 구별이 어렵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언필칭 반만년이니 아무리 그 뿌리가 같았다 하더라도 민족의 분화는 적어도 2~3천 년 전에 생겨났을 것인데, 그럼에도 지금도 구별이 어려운 걸 보면 참으로 종족의 DNA란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늘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 몽골리안의 DNA에 관한 내용이다.


    저 유럽인들은 굳이 들추기 싫어하므로, 따라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몽골리안의 유럽 지배기가 있다. 언뜻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이 떠오르겠지만 그보다도 1000년 앞서 벌어진 일로서, 그들 몽골 제국의 대규모 유럽 침공은 잠시 스쳐간, 그래서 당시의 유럽인들은 뭐가 뭔지 영문조차 몰랐던 일이었던 것에 반해 4세기의 몽골리안 침입은 오랜 기간 동안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펼쳐진, 그리하여 마침내는 당시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무너뜨린 세계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이들 몽골리안의 침입으로 유럽 대륙은 모든 나라의 국경이 바뀌어야 했으며, 어떨 때는 아예 민족 전체가 나라를 버리고 이동해야 했는데, 그렇게 지배당한 기간이 무려 100년이었다.(375~469) 그런데 당시 유럽대륙을 침공하여 백 년간이나 유럽 제국을 떨게 했던 황색 공포의 몽골리안들, 즉 우리와 똑 같은 얼굴 생김새를 지녔던 그들은 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을까? 오랜 시간 동안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정체는 근대에 들어 밝혀졌다. 그들 종족의 이름은 훈(Hun), 즉 흉노족이었다.

     


      450년 경의 로마제국 영토와 아틸라 제국의 영토. 와 숫자는 훈족의 로마 공격 루트와 연도. 



    그들 중에서도 로마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사람은 훈족의 왕 아틸라였는데, 로마제국의 수사학자(修辭學者) 프리스쿠스가 기록한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작은 키, (상대적으로) 넓은 어깨와 큰 머리통; 그의 눈은 작고 수염은 가늘며 듬성듬성 회색빛이 희끗거렸다. 아울러 그는 출신지를 짐작케 하는 편평한 코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shot of stature, with a broad chest and a large head; his eyes were small, his beard sparse and flecked with gray, and he had a flat nose and a swarthy complexion, showing the evidence of his origin)"


    이것을 일반적인 동양인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모습이 흉노족이라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로서 알 수 있다. 사마천은 당대의 가장 골칫거리였던 흉노족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몸은 작지만 단단하며, 머리는 몸에 비해 아주 크고 둥글며, 얼굴은 넓고 광대가 튀어나왔으며 콧구멍은 넓고..... 눈매가 매서우며 눈은 찢어진 모양새다.” 


    “사기” ‘흉노열전’에 이것이 중국인과 다른 모양새라는 뜻으로 적은 것인데, 사마천이 그린 모습은 보다 몽골리안에 가깝다.(마치 한국인을 그린 것처럼도 보이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중국인과 몽골리안은 다른 족속임을 알 수 있다)



    2001년에 개봉한 영화 '아틸라'에서는 그래도 동양인에 가까워 뵈는 주인공을 내세웠다.  



    앞서 말했던 대로 그들 훈족이 몽골리안이라 밝혀진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으니, 1750년 경 프랑스의 사학자 기네(Joseph de Guines: 1721-1800)가 훈족과 흉노족의 연관설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놈이 곧 그놈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다른 사학자들은 여전히 투르크인을 끌어들이거나, 아니면 코카서스(카프카즈)계의 유럽 유목민 집단설을 고집하였던 바, 저 뒤떨어진 몽골리안에게 유럽을 100년간이나 지배당했다는 사실인즉 차마 믿기 힘들고 자존심 팍팍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대두된 민족이 코카서스계의 스키타이족이었다.(구라파계 민족이 몽골리안을 괜히 무시하려 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훈족의 '파르티안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의 교회 벽에 그려진 훈족과 로마 기병의 전투 프레스코화. 추격하는 로마 기병을 훈족의 병사가 '파르티안 샷'으로 응수하고 있다. 


    Free English Sight에 소개된 훈족의 모습

    말 위에서 허리를 돌려 쏘아대는 이른바 '파르티안 샷'과 개마(鎧馬)기병을 특징으로 강조했는데, 우리는 이미 그것들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고구려  쌍영총 벽화 속의 '파르티안 샷'


    고구려  쌍영총 벽화에 그려진 개마기병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 그려진 개마기병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이 스키타이족은 중앙아시아에 넓게 펴져 살던, 단일 종족이 아닌 흉노계의 혼혈족이라는 데로 초점이 모아졌던 바, 그들의 오랜 주장은 괜한 헛수고로 끝이 났다. 유럽인들이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그래서 훈족의 원류로서 만들고자 하는 투르크인들도 마찬가지인 바, 그들의 깊은 눈두덩과 높은 코는 유럽인들과 흡사할지 모르나 프리스쿠스가 말한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장례의 방식으로서 민족적 차이가 드러나는데,(한 민족의 장례 방식은 쉽게 바뀌거나 고쳐지는 게 아니므로) 투르크인은 화장을 하고 흉노족은 매장을 했다. 만일 훈족이 투르크인이라면 그들이 거처한 곳에서는 인골이 발견되지 않아야 옳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며, 게다가 유럽 지역에서 발견된 그 유골들은 모두 전형적인 몽골리안의 것이었다. 이에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걸출한 작품를 남긴 에드워드 기번은 이들 훈족이 몽골리안이라는 데 방점을 찍었으며 이후로도 많은 학자들이 훈족이 곧 흉노족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정설이 되었다. 


    여기서 그 훈족이 우리 한민족과 동류의 민족이라는 결정적인 물증을 하나 제시하고 넘어가자. 그것은 다름 아닌 동복(銅鍑)이라고 하는 청동솥으로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오직 한민족과 몽골의 지배지역, 그리고 훈족의 유럽 지배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이른바 기마민족의 지표유물이다.(흔히 몽골리안의 신체적 특성으로 여기는 몽고반점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많은 중국인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차제에 말이거니와 나는 부산 대성동 고분에서 발견된 이 동복을 보면 괜히 가슴이 뛴다. 몽골리안 기마대가 이 동복과 함께 대륙 동쪽 가장 끝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러시아 그라스노다르 출토 1세기 후반의 동복 


    헝가리 베슈스텔에서 출토된 5세기 후반의 동복 


    폴란드 슐레지엔에서 발견된 5세기 동복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출토된 4~5세기의 동복


    러시아 알류산열도 흉노족의 무덤에서 출토된 동복 

     

    국립중앙박물관의 동복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

    말 뒤에 동복을 싣고 다닌 흉노족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김해 대성동 29호분과 47호분 출토 동복


    동복이 출토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 모습 (1991년)


     (사진 출처: KBS)


    흉노족의 이동 경로


    오르도스의 풍경과 위치(사진 출처: KBS)


    동북아에서 발견된 동복들

    굽받침과 문양이 없는 것이 특징으로, 오르도스 지역의 것을 표준으로 삼아 오르도스형 동복이라 불린다.(그림 출처: 홀로망님의 블로그)



    쉽게 설명하자면 이 같은 동복은 군대에서 쓰는 야전 바납이나 등산용 코펠 같은 것으로 흉노족의 기동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도구였다. 아울러 수천 킬로를 쉽게 이동한 기동력의 원천은 무엇보다 그들이 탄 말과 그 운용에 있었으니, 그들은 1인 3~4마리의 말을 이끌고 그것들을 번갈아 타며 말을 체력을 비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적에게 공포심을 제공하기도 하였으니, 언뜻 기존 병력의 3배 이상으로 보이는 숫자와 그것들이 일으키는 먼지는 가져야 할 공포심 이상의 것들을 심어주는 역할도 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은 기동력을 앞세워 유럽 대륙에까지 진출한 것인데, 그런데 그들의 말은 오늘날 우리가 경마장에서 보는 서러브레드종과 같은 장대한 체구의 말들이 아닌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랑말 종류였다. 그 조랑말은 원나라가 고려를 복속시키며 제주도에 방목장을 만들어 키운 말들로, 훗날의 몽골 제국 역시 이같은 조랑말을 앞세워 유럽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이 훈족을 중국에서는 흉노(匈奴)족이라고 불렀다. 흉악한 노예라는 극악한 표현이었던 바, 이는 중국이 북방 기마민족에게 겪은 고통을 단적으로 증언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저 유명한 만리장성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진(秦)·조(趙)·연(燕)나라가 흉노족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들을 연결해 서둘러 만리의 장성을 쌓았으니 이 또한 언제 있을지 모를 흉노 기마병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은 중국의 변방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시기였다고 하는 바, 그 어원인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가 실린 “한서(漢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여 적고 있다. ‘하늘이 높고 변방의 말이 살찌면, 북방에서 흉노족이 쳐들어와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다. 가을은 흉노족이 타는 말들이 살찌고 건강해지는 계절이기 때문에.' (출처: Daum백과)




    만리장성의 위치와 전경


     

    우리가 흔히 쓰는 새옹지마(塞翁之馬: 변방 노인이 키우는 말)의 일화도 그 내용은 모두 말과 전쟁에 관한 이야기다. 이에 한나라를 세운 태조 유방은 북방의 흉노족을 정벌하기 위해 몸소 32만 대군을 이끌고 나섰으나 백등산(白登山)에서 포위당해 오히려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치고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BC 200년). 


    중국 사서(史書)의 백미라 일컬어지는 저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탄생하게 된 계기도 이들 흉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니, 흉노에 대한 유화책이 강격책으로 선회된 한무제(漢武帝) 당시, 사마천은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준계산(浚稽山) 전투에서 포위돼 항복한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 남성을 거세하는 형벌)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이후 14년 간 필생의 대작 사서를 완성시켰던 바, 이것이 바로 "사기"였던 것이다. 


    한무제의 흉노에 대한 강경책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이후 다시 힘이 약해진 원제(元帝) 시절(BC 1세기)에는 절세 미녀 왕소군을 흉노의 왕인 호한야선우에게 시집 보내야 했으며, 이후로도 한나라는 흉노의 지속적인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후한 시대에 이르러서는 흉노의 세력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후 남흉노의 세력은 거의 중국에 귀복하게 된다. 


    아울러 북흉노의 세력 역시 후한 말엽에 이르러서는 위나라 조조 등의 공격으로 크게 쇠퇴하는 바, 흉노 정벌에 나선 조조가 책사 곽가의 병귀신속(兵貴神速: 병력의 운용을 귀신같이 빠르게 한다)의 계책을 이용해 백랑산(白浪山)에서 흉노족을 대파하고 20만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하는 조금은 믿기 힘든 정사의 기록도 살필 수 있다.(삼국지 위지 곽가전) 


    그러나 서진(西晉)이 건국된 이후 중국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니, 남흉노의 세력들은 저마다 황제를 칭하고 중원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5호 16국 시대) 그 중 한(漢)나라의 유총은 서진의 수도 낙양성을 함락시키고 황제인 회제(懷帝)를 사로잡아 죽였으며,(311년) 기타 다른 흉노의 세력들도 전조(前趙), 후조(後趙), 북량(北涼), 하(夏) 등의 나라를 세우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중의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찬드라굽타가 세운 인도의 굽타왕조를 공격하여 간다라와 케시미르를 빼앗고,(인도에서는 그들 흉노족을 후나족이라고 불렀다) 또 일부는 서진하여 페르시아를 멸망시켰으며,(페르시아에서는 그들을 해프탈리트라 불렀다) 그에 앞서서는 중국에 귀화했던 흉노족의 일부가 동진하여 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였던 바, 김씨 신라와 가야 제국은 흉노의 후예가  세운 나라였다.

     

    그렇다면 조조에 쫓긴 북흉노의 세력은 어찌되었을까? 그들은 이후 몽고고원 서쪽으로 옮아간 후 차후로도 계속 서진하였다. 그리하여 375년 드디어 유럽 땅의 동쪽에 도착하였던 바, 동유럽 사람들은 과거 중국의 변방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살인과 약탈과 방화의 참상을 경험해야 했다. 유럽 사람들은 왜소한 체구의 말을 탄 왜소한 체격의 이 이방이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눈은 작고 사납게 찢어져 있고 코는 낮고 벌어졌으며 얼굴은 거무티티하고 누리끼리한 사람들..... 


    그들은 조상숭배 사상을 가졌다는 것 외에 여타의 종교도 없어 보였고 문자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오직 말과 활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다루었다. 유럽 사람들이 알고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흉노라고 부른다는 것뿐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들 이방인 족속을 훈(Hun)이라 불렸지만 여전히 더 이상의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 훈족에 관한 소문은 이들이 탄 말보다 훨씬 빠르게 로마 제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흉노족의 서진




    * '기마민족의 후예들/로마제국을 유린한 흉노족'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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