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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의 후예들(II)/로마제국을 유린한 흉노족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0. 05:25
흉노족과 처음으로 맞닥뜨린 유럽인은 볼가 강과 돈 강 사이의 초원에 살던 유목민 알라니족이었다. 그들은 그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동양의 흉노족과 처음으로 조우한 최초의 유럽인으로서 기록에 남게 되었다. 374년, 발라미르를 대장으로 하는 흉노족의 일파는 볼가 강을 건너 자신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마을로 향해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흉노족이 첫 상대로 맞은 이 알라니족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던 바, 그들 역시 카프카즈령 로마제국과 파르티아를 상대로 노략질을 해 먹고 살던, 나름대로 분탕질과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나운 민족이었다.(파르티아에 대해서는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 참조)
<지도 1> 볼가 강의 위치와 흉노족의 침공(←)
이에 볼가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땅은 100년 간 흉노족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후 훈족(유럽에 정착한 흉노족)의 왕 아틸라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까지 침공한다.
하지만 알라니족과 흉노족과의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알라니족은 흉노족의 공격에 최대한 대항했으나 흉노족이 쏘아대는 W형의 강궁(强弓)에 속절없이 쓰러졌고, 이에 얼마를 도망 가 전열을 재정비했으나 이번에도 흉노의 화살을 맞고 그대로 전열이 붕괴되었다. 흉노족이 쏘아대는 화살은 60m 전방에 있는 상대를 손쉽게 쏘아 맞추고 있었던 바, 자신들 C형 활의 사거리만큼 도망가 전열을 갖춘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제껏 면대면(面對面: face to face)의 집단 전투만을 해 온 유럽인들에게 있어, 흉노족들의 새로운 방식의 전투방식, 즉 적군과의 직접적인 접촉없이 먼 거리에서 우선적으로 다량의 적의 살상시키는 방식은 전혀 낯설뿐더러 자신들의 비교 열세를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잔틴 카타프라크토.
비잔틴 제국에서 흉노족의 활을 모방해 만든 나무와 뿔의 합성궁. 그 같은 재질과 탄력적인 굴절도로 탄성을 높였다.
그들의 화살도 화살이었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들의 자유자재로운 마술과 같은 마술(馬術)이었다. 알라니족은 이제껏 그토록 말과 혼연일체가 된 집단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 위에서 태어나고 말 위에서 살다 말 위에서 죽는다는 그들 북방기마민족 앞에서 마술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 듯싶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무엇이 있었으니, 말 뒤에 실은 청동솥으로는 빠르게 식사를 해결하고, 앞 뒤를 안정되게 돌출시킨 말 등의 안장은 그들의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는데, 무엇보다 특기할만한 것은 발걸이인 등자(鐙子)였다. 이 등자는 그들의 장거리 여행의 피로도를 격감시켜 주었고, 전투에 임해서는 안정되게 돌진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활의 사격에 있어서는 정확도를 높여 주었다.
~그때까지 유럽 대륙에는 등자가 없었던 바, 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이 등자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이후로도 나무나 쇠로 된 등자는 흉노족의 유럽 침공이 끝나는 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훈족(유럽에 정착한 흉노족)의 청동솥과 안장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의 등자와 고구려 벽화의 등자
가야 고분 출토 등자(김해 박물관)
흉노 지역에서 시작된 등자는 한반도 북부에는 1세기, 남부 지방에는 4세기 경 보편화되었는데, 유럽 지역에서는 8세기에 이르러 보편화가 이루어졌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 출토 등자(공주 박물관)
공주 인근에서 출토되었으나 웅진 시대가 아닌 한성 백제 시대(BC 18 - AD 475)의 유물이다.
그들의 전술 또한 남달랐다. 즉 그들은 말을 달리며 쏘아대고 휩쓸다 때로는 교묘히 도망을 갔는데, 상대가 쫓아오면 어느 샌가 좌우 측에 기병대가 달라붙어 활을 쏘아댔고, 또 도망가던 자들도 어느 순간 방향을 180도 바꿔 밀고 들어 와서 포위해 섬멸시켰던 바, 일찌기 볼 수 없었던 이와 같은 전투방식에는 그야말로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대로 그들의 주력 무기는 활이었지만, 요행히 화살을 피한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다음에는 칼싸움을 해야 할 터,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휘둘러대는 저들의 양 날의 검 앞에서는 또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5세기 훈족이 사용한 칼의 모형
요한 네포무크가 그린 '전쟁 기계 훈족' (1870년)
이 모두들 가능케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타고 온 말이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타고 온 말을 '작고 추하며 털이 제멋대로' 라고 표현했으나 이 작은 말들이야 말로 그들 힘의 원천이었다. 흉노족의 말은 체력적으로 강인하고 추위에 잘 견뎠으며 무엇보다 성질이 온순하여 다루기가 쉬웠다. 특히 작은 체격은 유럽산 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칼로리 소모가 적어 적게 먹고도 강한 지구력을 발휘하였다. 게다가 그 말들은 평소에는 물론 한 겨울의 눈 속에서도 스스로 먹이를 찾는 습성이 있었던 바, 따로 사료를 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오히려 흉노족에게 젖과 고기를 제공해주는 유용한 동물이었다.
~ 이 흉노의 토종말은 2차세계대전 중 멸종되었다고 하며, 그와 가장 유사한 종은 앞서 말한대로 우리나라 제주도 조랑말이다.(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이 제주도에 그 말들을 방목했던 까닭에) 그 조랑말은 제주에 약 1만 4천 마리가 있다 하는데, 이중 순수 혈통은 200마리 정도라고 한다.
제주도의 조랑말
이 말들을 앞세운 흉노족은 알라니족을 점령한 후 게르만족 일파인 서쪽의 동고트족을 공격하였는데, 그들을 대적할 수 없음을 인지한 동(東)고트 왕 에르마나리크는 스스로 자결을 하였던 바, 그들 흉노족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이후 동고트족은 약 75년간 흉노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돈 강 유역에 살던 알라니족의 일파는 흉노족의 지배를 벗어난 갈리아(프랑스) 지역으로 도주하여 로마군과 싸우며 겨우 잡았으나, 다시 흉노가 갈리아로 칩입해오자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아예 북아프리카로 도망가 버렸다. 그들의 황색공포에 대한 트라우마를 잠작케 해주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 하지만 이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과 연합해 카르타고에 '반달-알라니 연합 왕국'을 세우고 455년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가 로마를 파괴시키는 바, 문명 파괴자로서의 첨병 역할을 함과 아울러 서로마제국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아래 지도의 옅은 파란색 실선)
<지도 3> 흉노족의 침입과 게르만 부족의 이동로
동고트를 점령한 흉노족은 그 이듬해인 375년, 드네푸르 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가장 큰 부족인 서(西)고트족을 공격한다. 그런데 이들 서고트족은 단 한 번의 전투 이후로는 싸울 생각을 않고 아예 보따리를 싸 도망을 갔다. 싸워봤자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제국의 국경선인 다뉴브 강에 이르렀고, 거기서 입경(入境)을 간청하는데, 다행히도 발렌스 황제가 입국을 허락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지도 4> 다뉴브(도나우) 강의 위치 (붉은 실선)
불과 2년만에 볼가 강으로부터 다뉴브 강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한 이들 흉노족은 이후 한동안 진격을 멈췄다. 그들은 목적은 영토가 아니라 빵의 해결에 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 흉노족의 대장들은 헝가리에 그들의 본영을 세운 후 각기 제 부족대로 약탈을 일삼았는데, 오늘날의 헝가리(Hungary)는 '훈족의 땅'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이름이 굳어진 것이었다. 다만 그 흉노족의 한 일파는 남쪽으로 내려가 소아시아 반도를 유린하고 안티오크까지 진출했는데, 당시 크리스트교의 남부 중심지였던 안티오크(번역성서의 안디옥) 사람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그들 흉노족은 정말이지 묵시록의 악마에 다름아니었다.
독실한 크리스트 교도였던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 악마들의 약탈 소식을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성당에서 아무런 대책없이 들어야만 했다. 언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그들 황색민족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도 지옥에서 온 악마에 다름아니었겠는데, 신의 뜻과는 다르게 황제는 그 악마와 타협을 하였다. 그의 당면 과제는 우선 서고트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서고트족은 발렌스 황제의 배려로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의 영토로 들어와 정착했으나 곧 처우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던 바,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흉노족에게 빵과 금을 제공하여 국경을 안정시킨 후 서고트족의 진압에 매진했다. 어찌됐든 이같은 황제의 햇빛정책으로 이후 20년간 국경은 평화로울 수 있었다.
합치된 동·서 로마를 통치했던 마지막 황제. 흉노족에 대한 유화책으로 20년간 국경을 안정시켰다.(재위 379-395)
하지만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자 사정은 달라졌다. 햇빛정책이란 그 햇빛이라는 급부가 사라지면 효과도 따라 사라지는 한시적 정책일 수밖에 없었던 바, 다시 국경의 이곳저곳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일시 통합됐던 동·서 로마는 다시 갈라져 동로마에서는 아르카디우스가, 서로마에서는 호노리우스가 각각 황제로 즉위하여 흉노족의 정책에 대한 제 각각의 목소리를 내었다. 이에 로마제국과 훈족과의 한판 대결은 불가피할 듯보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396년부터 국경 각지에 걸친 흉노족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침입은 깊고도 광범위했으니, 북으로는 발틱해 인근의 노르만인들이 공격을 받았고, 서로는 알프스까지 흉노의 무리가 쳐들어왔으며, 남으로는 발칸반도는 물론 소아시아 반도와 시리아까지 초토화되었다.
~ 그 396년의 참상에 대해 당대의 성직가 히에로니무스(저 유명한 라틴어 번역 성서 '불가타'를 편찬한)는 이렇게 말했다.
"벌써 20년 이상 하루도 빠짐 없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알프스까지 로마인의 피가 흘렀다. 흉노족은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을 유린하였고, 그 부족들과 흉노들은 다시 로마제국를 유린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약탈당했으며, 얼마나 많은 순결한 동정녀들이 그들에게 범하여 졌는지 모른다. 교구의 주교들은 죽거나 투옥되었고 사제와 다른 성직자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교회는 파괴되어 마굿간으로 변했고 순교자의 성물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이제 또 얼마나 많은 강이 피로 물들지 알 수 없다."
죠셉 드리베가 그린 고뇌하는 히에로니무스의 초상(1620년)
* '기마민족의 후예들/훈족의 왕 아틸라' 로 이어짐.
* 그림 및 사진의 출저: Google kr,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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