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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마민족의 후예들/훈족의 왕 아틸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1. 07:48

    * '기마민족의 후예들/로마제국을 유린한 흉노족'에 이어짐.


    훈족의 로마 공격이 재개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통합적인 힘이 아니었던 바, 국지적인 약탈이 지속되었을 뿐 그것이 로마제국 전체를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 전투력은 여전히 위력적이어서 그 개별적인 부족의 공격에도 로마와 게르만족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활은 여전히 강해 삼각의 쇠 화살촉은 로마군의 가죽갑옷을 가볍게 꿰똟어 박혔고, 그간 이곳의 말들과 혼혈하며 개량된 저들의 조랑말은 더욱 힘차게 달렸다. 그런데 그즈음, 로마로서는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훗날 이 분열된 훈족을 통일시켜 거대한 제국을 이룩한 아틸라가 탄생한 것이었다. 


    여기서 '다행스럽다'는 표현은 그가 후세의 역사가들이 평한 극악무도한 침입자가 아니었다는 데 기인한다. 아틸라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오히려 위와 같은 훈족의 무분별한 약탈행위를 막았으며, 근본적으로는 훗날의 역사가들이 지목한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제공자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서로마의 멸망이 훈족의 유럽 침공으로 인한 도미노 현상에 기인했음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고트족의 로마 난입이 일어난 410년을 기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인 바, 이때 아틸라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5살에 불과하다)


    훈족 어느 부족의 왕자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에 라벤나(호노리우스 황제가 서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에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으며 기독교와도 친숙했고 로마의 풍습과 교양 또한 두루 몸에 익힌 문화인이었다. 이후 장성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훈족의 분열과 상호간의 전투를 목격한 후 이에 대한 통합을 절감, 자신의 형인 블레다와 함께 훈족과 인근 이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439년에 이르러서는 도나우 강에서 볼가 강에 이르는 대부분의 훈족 영토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는데, 까닭에 그 기간 동안 로마의 국경은 안정될 수 있었다.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 외젠 들라크루와(1798-1863)가 그린 '훈족의 왕 아틸라'



    사실 이때까지도 아틸라의 로마 침공은 염두에 없는 일처럼 보였으니, 오히려 아틸라의 침공을 부른 것은 동로마 제국의 그릇되고 약속에 위배된 행동이었다. 아틸라 제국은 예전 마르구스(세르비아 모라바 강 인근의 도시)에서 맺은 평화조약에 의거, 기존의 2배에 해당하는 공물과 300Kg의 금을 받기로 돼 있었으나 440년에 이르러서는 동로마에서 이를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아틸라를 열받게 만든 것은 탐욕에 눈 먼 동방교회 성직자들의 일탈이었으니, 그들은 훈족 왕의 무덤에 금 세공품이 부장되는 풍습을 알고 이들 무덤들에 대한 도굴을 시도했던 것이었다. 


    대노한 아틸라는 441년 도나우 강 일대 도시들에 대한 대규모 공격에 나서 싱기두눔(베오그라드)을 비롯한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교회들을 파괴시켰다. 동로마 제국은 442년에 간신히 1년의 휴전을 맺었으나 공납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던 바, 443년 아틸라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발칸반도의 주요 도시들을 초토화시키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나아갔는데, 이에 놀란 동로마는 황금 2,570㎏에 달하는 연체된 공납을 서둘러 지불하고, 연간 공물을 3배로 늘리며 900kg의 황금을 제공하는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이 또한 447년에 이르러서는 지켜지지 않았던 바, 아틸라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동로마 정벌에 나섰다. 

     

    이에 발칸반도는 다시 초토화됐고 아틸라의 원정은 449년 그리스 테르모필레에서 멈춰졌다. 그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사절 간의 새로운 계약이 체결됐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 정전 조약이 전날의 조건보다 더 가혹했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터였다. 아울러 동로마제국은 아틸라가 새롭게 점령한 불가리아와 크로아티아 등의 도나우 강 남쪽 영역을 넘겨줘야 했으니 이쯤되면 동로마제국은 말만 제국일 뿐 아틸라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공납이 제국의 목숨을 연명하는 꼴이었다.  

     

    451년, 서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도 원인은 엉뚱한 것이었다. 450년 봄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그라타 호노리아가 환관 히야시누스를 보내 자신의 구명 요청과 함께 청혼을 해온 것이었으니, 그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이 일에 앞서 호노리아는 친위병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이에 분노한 황제는 호노리아를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친척의 가택에 연금시켰던 바, 이에 살 길을 찾아야 했던 호노리아는 구명과 결혼의 의사를 적은 편지를 자신의 반지와 함께 아틸라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틸라는 이 같은 호노리아의 청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때 아틸라는 라벤나 시절부터 연모했던 호노리아에게 격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하는 말도 있으나 이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아틸라는 이때 적어도 45살이 넘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두 훗날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일 테고, 아마도 서로마 제국을 속국으로 삼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듯싶었다. 아무튼 그는 즉시 호노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선언하고, 그녀의 결혼 지참금으로서 서로마 제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갈리아(프랑스) 땅을 요구하였다. 


    그리고는 속전속결로 훈족 및 게피다이족을 비롯한 자국 영토내의 이민족을 규합해 갈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호노리아가 결혼 지참금을 가져올 처지가 못되므로 자신이 직접 받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공교롭게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고 마르키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할 즈음에 일어났던 바, 그는 이번 일을 아틸라의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겨 한 가지 꾀를 내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진언했다. 호노리아를 결혼시켜 아틸라의 성혼 선언을 무효화시키고 향후의 침입에 대해서는 공동전선을 구축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래저래 다급해진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마르키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플의 호노리아를 급히 라벤나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한 귀족 남자와 결혼식을 시키고는 아틸라에게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렸다. 이에 아틸라는 갑자기 궁지에 몰린 모양새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회군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 갈리아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하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마인츠, 아미엥, 오를레앙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오를레앙 성에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갈리아 총독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를 로마군의 총사령관으로 삼고, 갈리아 지방에 머물던 서고트족, 라인 강 너머의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이티우스로 하여금 아틸라 군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할 것을 명령하였던 바, 451년 6월, 드디어 양군의 전투가 샬롱 엥 샹파뉴(Chalons-en-Champagne) 평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매우 치열한 것이어서 로마군은 막대한 입었고 아이티우스와 함께 전투를 이끌었던 서고트의 왕 테오도리크 1세는 전사하였다. 하지만 훈족 연합군의 피해 역시 극심했으므로 아틸라는 어쩔 수 없이 갈리아를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샬롱 엥 샹파뉴 전투 전황도



    ~양군의 대회전(大會戰)이 벌어진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다. 로마의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자신의 책에 '카탈루니아 평원의 전투'라고 기록하였으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실사(實)를 통해 트로야 읍 근방의 마우리아쿰 평원, 즉 오브 강 연안의 샹파뉴 평원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더 유력함을 밝혔다. 이 대회전의 전사자는 15만 명 설과 50만 명 설이 대립하는데, 어느 쪽이 됐든 엄청난 전투였던 셈이고 그 역사적 향배 또한 엄청났던 바, 1849년 런던대학의 에드워드 크리지 교수는 이 대회전을 역사를 바꾼 세계 15대 전투의 하나로 꼽았다. 쉽게 말하자면 동양이 서양을 지배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였던 셈이었다. 



    샬롱 엥 샹파뉴 평원의 위치 


    전투가 벌어졌던 평원에는 지금은 모두 건물이 들어섰고, 그나마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이 작은 오브 강뿐이다. 전투 첫 날부터 이 강은 온통 피로 물들었고, 양군의 병사들은 이곳의 핏물을 마시며 싸웠다고 한다. 



    아틸라 제국의 영토와 로마제국 원정로



    아틸라는 이에 대한 분풀이로 그 이듬해 이탈리아 반도를 칩입하였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의 7개  도시, 즉 아퀼레이아, 파타비움(파도바), 베로나, 브릭시아(브레시아), 베르고뭄(베르가모), 메디올라눔(밀라노) 등을 점령했으나 그해 이탈리아 반도를 휩쓴 기근과 말라리아 때문에 더 이상의 진군을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쪽의 로마'로 불리던 아퀼레이아의 시청사(CITY HALL)가 있었던 곳.


    아퀼레이아 포룸 유적지.



    아퀼레이아 건물 지하, 본래의 자리에 복원된 당대 유적.


    틸라는 당시 인구 20만이 살던 부자 도시 아퀼레이아를 철저히 파괴시켰다고 하는 바, 이 도시의 교회에 위와 같은 훈족의 흔적이 남은 것도 우연은 아니다. 창과 방패를 든 오른쪽의 유럽 기사를 훈족의 군사가 예의 파르티안 샷으로 응사하고 있다.  



    ~이때 훈족의 학살을 피해 남부 해안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나도 여기까지 왔다(Veni etiam)'를 외쳤는데, 이 베니 에티암(Veni etiam)이 베네치아(Venezia)가 됐다고 베네치아 건국사는 전한다. 


              

                  아퀼레이아와 베네치아의 위치




    그해 452년, 보복을 두려워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와의 협상을 서둘렀던 바, 자신의 사신으로 로마교황 레오 1세를 보냈다. 레오 1세는 아틸라가 하는대로 말 위에 앉아 불편한 회담을 이어갔으나 나름대로 성과를 보여 로마 시에 대한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에 아틸라가 점령한 북 이탈리아의 도시들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는 조건이었으므로 썩 훌륭한 협상이었다고는 볼 수 없겠는데, 그럼에도 이 평화회담에 대한 레오 1세의 업적은 크게 평가되었던 바, 아래와 같은 기념물이 남겨졌다. 



    틸라(가운데 말을 탄 사람)와 레오 1세의 회담(왼쪽의 말을 탄 사람)을 그린 로마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 저 유명한 라파엘로의 작품으로, 지금은 바티칸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건물의 라파엘로 방(엘리오도로 방)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곳에는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 '아테네의 학당'도 있다. 


    로마 성 베드로 성당 지하의 레오 1세의 무덤. 전설에 따르면 두 사람의 회담 당시 레오 1세가 기도를 드리자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쳤고 그 속에서 베드로와 바울 사도가 나타났던 바, 이에 아틸라(부조의 오른쪽 인물)가 감명을 받아 영세를 받았다는 어쭙잖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레오 1세의 무덤에는 바로 그 이야기가 표현돼 있다. 

     

     

     8  

    아틸라의 흉상과, 얼굴이 새겨진 주화. 이러한 이미지는 언뜻 서양인이 연상되지만,


    그는 이와 같은 얼굴을 가진 몽골리안이었다. 

     

    * '아틸라의 죽음'으로 이어짐


    * 그림 및 사진의 출저: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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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