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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70인역 성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8. 08:10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티레를 정복한 후 이집트에 무혈입성한 일은 앞서 '알렉산더 대왕과 티레 전투'에서 설명한 바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나일 삼각주 서쪽에 위치한 라코티스라는 작은 마을 없애고 알렉산드리아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이후 이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이집트에 정주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 의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도읍이 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 장수로서 종군한 그는 기원전 330년 박트리아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를 죽인 벳수스 총독을 붙잡아 처형시키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정벌에 앞장 서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세웠으며, 대왕의 사후 이집트에 정주해 자신의 나라를 건립하였다.(BC 305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재위 BC 305- 285)의 두상



    그는 다른 디아도코이(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차하는 부하 장수들)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제국의 패권을 넣고 싸운 디아도코이 전쟁(BC 315-301)에 휩쓸리게 되나 일찌감치 헬레니즘 제국에의 패권을 포기하였던 바, 큰 전쟁을 치르지 않고 외교적 역량으로서 이집트 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이집트의 고립적 잇점을 활용하여 외침에서 비껴간 안정된 국정을 이끌어 갔지만, 헬레니즘 문화의 융성에 있어서는 지역적 고립성을 탈피하여 3대륙의 문화를 모두 융합시키는 선도자적 위치에 섰다. 그 대표적인 업적이 바로 수도 알렉산드리아 궁전 지역 브루케이움에 건립한 무세이온(Museion: 박물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의 부루케이움과 알렉산드리아 위치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 상상도



    훗날 Museum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한 무세이온은 본래 고대 그리스의 학당을 지칭하던 말이었는데, 이곳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는 온갖 학술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을 모아놓은 박물관 뿐아니라 ·식물원 및 천체관측소, 그밖에 연구실, 실험실, 도서관, 식당, 카페, 기숙사 등의 부대시설이 망라된 복합 연구 단지였다. 이곳의 도서관도 처음에는 무세이온에 딸린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 즉 학자들의 연구를 돕기 위한 편의시설로서 출발된 것이었다. 그러다 그 아들 대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수되어 브루케이움 일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게 되는 바, 대도서관 자체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서관의 대장서각이- 브루케이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 시작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자기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석학 스트라투스를 아테네로부터 초빙함으로부터였다. 스트라투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뿐아니라 당대 학생들의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기원전 306년 무세이온을 설립했고, 이것이 대도서관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기원전 300년경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데메트리우스가 초대 도서관장으로 임명되면서 더욱 발전하였던 바, 이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 연구의 중추 기관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역시 학문의 진작을 장려하여 세계 모든 민족들의 책을 수집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도서관의 사서들은 아테네와 페르가몬 등지에 파견돼 책을 사들이거나 필사해왔으며 기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책들을 긁어모았다. 



    부루케이움 비블리오데카의 흔적



    알렉산드리아 세라페움(세라피스 신전) 유지


    대도서관의 개가식 서고 상상도



    아울러 기원전 235년 경에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사라피스 신전 안에 대도서관의 부속 장서각을 건립하는 등, 역대 프톨레마이오스들은 도서관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니, 당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자랑한 수십만 권의 도서는 가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위대한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리하여 이 도서관은 초대 관장인 데메트리우스 팔렐레우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던 바, 이곳을 거쳐간 위대한 학자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에라토스테네스 ―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의 도서관장. 천문학자. 지리학자. 건축가. 수학자. 시인. 문헌학자. 연극평론가. 지구가 구형(求刑)에 가까운 타원형이라는 사실과 그 둘레가 25만 스타디아(46,250km)임을 규명해내었다. 소수(小數)와 배수 등의 대수학 개념을 확립했으며, 저서로 '천문학(Astronomy)', 시문집 '아픔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하여(On freedom from pain)' 등을 남겼다.


    힙파르쿠스 ― 천문학자. 지리학자. 천체도(天體圖)와 별의 운행도를 제작하였으며 밝기에 따른 별의 등급을 정했다. 지리학적으로는 기존 측량법인 삼각법을 발전시켰으며 경도와 위도에 따른 측량법을 고안해내었다.


    에우클레이데스 ― 수학자. 기존의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거기에 자신의 창작을 더 하여 13권의 불세출의 도서 '원론(Elements)'을 편찬하였다. 


    아리스타르쿠스 ― 천문학자. 수학자. 일식과 월식의 관찰을 통해 태양과 달의 크기 및 거리를 측정하였고,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의 지동설과, 지구가 기울어진 축에 따라 자전한다는 지구 자전설을 제창하였며, 모든 별은 기존의 주장보다 훨씬 먼 곳에 존재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헤로필루스 ― 의학자. 생리학자. 인체 해부도를 그렸으며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는 원천이 뇌에 있음을 밝혀냈다. 브루케이움 내에 의학 학교를 세웠다. 


    디오니시우스 ― 문학가. 언어학자. 언어의 품사를 정의하였다. 


    아리스토파네스 ― 프톨레마이오스 5세 때의 도서관장. 문헌학자. 언어학자. 호메로스의 시 및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고대 그리스 최고 희극작가인 동명이인)의 희곡 같은 그리스계의 문학을 정리 교열하고, 구두점과 악센트 부호 등을 확립시켰다. 


    에우독소스 ― 수학자. 천문학자. 입방체의 작도법 같은 기하학과, 무리수의 연산 같은 대수학의 이론을 마련하였으며, 1년이 365일 6시간임을 규명하였다. 


    아폴로니우스 ― 수학자. 천문학자. 타원, 포물선, 쌍곡선 등의 개념을 정립하였으며, 행성의 운행이 원이 아닌 타원형의 원뿔곡선임을 밝혀냈다. 


    아르키메데스 ― 수학자. 물리학자. 공학자. 지렛대의 원리를 밝혀냈으며 원과 구체(求體)의 체적을 구하였고, 이중 도르레, 나선  양수기, 그외 각종 군사무기를 발명하였다. 


    아폴로도루스 ― 문헌학자. 역사학자. 트로이 전쟁 이래의 연대기를 정리하였고, 그리스 신화를 정리하여 편찬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지만 대충 적어도 이 정도이다. 이것은 학문에 있어서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말해주는 예라 할 수 있겠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구축되었던 이와 같은 훌륭한 학문적 환경은 오히려 훗날에 파괴되어지는 바, 인문학 도서가 주로 비치됐던 사라페움 장서각은 동로마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인 391년, 브루케이움 사라피스 신전이 우상숭배의 본산이라는 이유로 크리스트교도에 의해 불태워질 때 함께 소실되고, 대장서각의 도서는 사라센 제국의 칼리프 우마르(재위 634-644)가 알렉산드리아 점령 후 브루케이움을 파괴하고 장서들을 분서(焚書)하며 사라졌다. 이때 이 도서들은 대욕탕의 연료로 장장 6개월 간이나 쓰였다고 하는 바, 그 양이 얼마나 방대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에라토스테네스(BC 274-196)의 흉상


    에라토스테네스가 관찰한 시에네의 우물이라고 알려진 곳(출처: 視人庵 BLOG)




    ~ 에라토스테네스는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 하지날에 태양빛이 우물의 바닥까지 닿는다는 것을 전해 듣고,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의 고도가 90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로부터 지구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하짓날의 남중 고도는 82.8도이며, 이 차이가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의 위도의 차에 따른 것이며, 이를 이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었다.(위키백과 참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존의 아테네나 페르가몬의 도서관과 경쟁하기 위해 기발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 당시 모든 책은 이집트산 파피루스로 제작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 당국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했고 이를 계기로 페르가몬 등의 도시에서는 양가죽을 얇게 가공하여 책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었다.(페르가메나 양피지) 이러한 끊임없는 수집 노력 덕택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장서가 50만권이나 되는 고대 세계 최대의 규모로 발전했고, 서기 1세기에는 무려 100만권에 달할 수 있었다


     '서판(書板)'이라는 뜻의 피나케스는 ‘모든 그리스 문화의 유명한 작품들의 서판’의 줄임말로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고안된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분류표이다. 모두 120개의 두루마리로 구성된 피나케스는 아마도 장르별 책들이 보관된 장소에 걸어놓았던 팻말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피나케스에는 특정한 책에 대한 정보가 기록돼 있는데 제목과 저자, 출생지, 저자의 부친과 스승, 교육장소와 교육의 성격, 저자에 관한 간단한 전기, 작품의 첫 줄, 작품의 내용요약, 책의 구입장소 및 경위, 전체 내용의 줄 수(분량)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후대 도서관의 어떤 분류표보다 앞선 기능으로 인테넷 서점의 '미리 보기'와 거의 흡사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학풍은 1000년의 기간 동안 시대별로 다섯 단계를 거쳤다. 초기의 학문적 주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아 자연과학을 장려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에우클리트와 에라토스테네스였다. 서기전 150년 이후로는 플라톤적인 철학이 중심역할을 하면서 형이상학과 종교학이 발달했다. 서기 1세기에는 필로를 중심으로하는 유대교학파의 전성기였고 이어서 서기 150년 이후는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 같은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이 활동했다. 서기 350년 이후부터는 소위 ‘알렉산드리아 학파’라 불리는 독특한 철학이 발전됐다.(이상 세 단락은 김성 저 '성서고고학' 참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 '셉투아긴트(Septuagint)'라는 고대 히브리어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이 편찬됐기 때문이었다.(우리나라 말로는 '70인역 성서') 라틴어 대문자를 써 'LXX(70)'로 표기되기도 하는 이 책의 제목 역시 '70'을 뜻하는 라틴어 '셉투아진타(Septuaginta)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이 책이 편찬되어진 이유 역시 도서관의 역할에 충실한 결과였다. 이곳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특히 알렉산드리아 디아스포라(유대인 거주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상의 이유로 도서관에 비치된 성서(구약성서)를 읽고자 했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조상들이 고향을 떠나온지 너무 오래되었고, 그러한 까닭으로써 히브리어의 전승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바, 이제는 그들 유대인 중에 히브리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이곳 라지드(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언어인 그리스 말이었고, 그들이 사용하는 문자 역시 그리스어였다.(프톨레마이오스 왕국 뿐아니라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 속한 모든 나라의 공용언어는 헬라어, 즉 고대 그리스어였다) 


    이에 기원전 280년경 도서관장인 데메트리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히브리어 성서의 번역 지원을 요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다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요청해 원서를 번역할 72명의 학자들을 초빙해왔다. 이때 도서관 측에서는 저들의 토론과 담합을 막기 위해(종교적 이유로서 원서의 내용이 변질될까 염려하여)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 섬인 로도스 섬에서 서로를 격리시킨 채 각각 번역을 시켰는데, 그들은 모두 70일 전후로 번역을 마쳤고, 그 번역된 내용이 한 자도 다름이 없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셉투아긴트', 즉 '70'이라는 뜻은 이때 초빙돼 온 72명 학자들의 숫자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다분히 과장도 실렸겠지만 도서관 측에서 번역에 신중을 기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튼 이와 같은 경로로서 '70인역 성서'가 편찬된 것이었으니, 이후 이 헬라어 성경은 중세기 모든 라틴어 성경의 모본(母本)으로 자리잡게 되는 바, 그 편찬에의 지대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또 다른 설(說)로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알렉산드리아 대서관에 비치할 히브리어 성서와 그 성서를 번역할 학자들을 함께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이스라엘 12부족에서 각 6명의 번역자들이 각자 히브리어 율법서 한 권 씩을 가지고 알렉산드리아로 가 각각 독립된 공간에서 72일 동안 독립적인 번역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것이 서로 한 자도 다름 없었다는 이야기는 비슷한데, 언뜻 이 후자의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전자의 이야기처럼 그들이 몸만 왔다면 도서관 측에서 70권의 번역할 책을 제공해줘야 하는데, 그처럼 많은 분량의 성서가 도서관 내에 있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게다가 당시는 필사의 시절이었던 바, 한 자도 틀림없는 동일한 내용의 책이 70권이나 존재했으리라는 상상은 거의 하기 어렵다)



    히브리어 성서 → 헬라어 성서(셉투아긴트) → 라틴어 성서. 이와 같은 번역과정을 거쳐왔다.



      

    셉투아긴트로 여겨지는 파피루스 조각



    현존하는 셉투아킨트의 사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으로 1859년 독일의 성서학자 콘스탄틴 폰 티셴도르프가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하였다. 모세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은 떨기나무'와 여호와를 만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그곳에 지어진 오래된 수도원인데,(* '호렙 산의 UFO/모세를 속인 여호와의 절묘한 트릭' 참조) 이때 이곳의 고대 두루마리 양피지사본을 본 티셴도르프는 대번에 그 가치를 알아차렸다. 기원전 2~3세기에 편집된 거의 완질(完帙)의 헬라어 번역사본이었던 것이다.(신약성서 복음서의 내용도 일부 포함돼 있는) 이에 티셴도르프는 그곳 수도원장에게 보고 돌려주마 약속을 하고 이를 반출했는데,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처음부터 사기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나이 사본은 이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게 넘어갔다가 1930년 러시아 혁명에 재정이 딸리던 소련정부가 영국 박물관에 10만 파운드로의 매수를 제안했다. 하지만 브리티시 박물관도 10만 파운드의 거금을 마련할 수 없었던 바, 미국에 손을 벌렸고, 결국 미국 정부가 반을 부담해 줌으로써 겨우 브리시티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안착될 수 있었다. 지금은 더 없는 고성서의 사본으로, 아울러 인류 문화유산으로 대접받고 있는 브리시티 박물관의 중요소장품이지만 과거만큼은 참으로 기구했던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다.(10만 파운드는 당시 US$500,000이었으나 지금 시세로의 환산은 어렵다)




    브리티시 박물관 소장의 시나이 사본

    양질의 양피지에 쓰여진 37X34cm 크기의 셉투아긴트 성서 사본으로, 두루마리 양피지 사본을 훗날 제본한 것으로 보인다.(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시나이 사본이 발견된 카타리아 수도원

    티셴도르프는 이때 불쏘시개로 쓰이던 성서 사본을 자신이 건졌다고(그래서 시나이 사본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저 자신의 도둑질을 덮으려는 술책에 불과해 보인다. 수도원에서 성서를 불쏘시개로 쓴다는 것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티셴도르프는 이 성서를 가져와 독일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기도 했는데 사실 그럴 자격도 없는 놈이다. 어찌됐든 그 주석서는 지금도 성서학자들에 의해 인용된다.



    티셴도르프의 뻔스런 얼굴 

    시나이 사본의 발견자라고 당당히 써 있다. 그는 이 사본을 발견한 후 밤새워 읽고 '잠을 자는 것은 신성모독이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는데, 뻔뻔하기가 삼국지의 여포같은 놈이다. 그는 사본을 러시아 황제에게 7,000달러에 팔았다. 종교적 목적이 아무리 숭고해도 기본 도덕과 양심에 우선할 수는 없다. 이 자는 종교가도 학자도 아닌 그저 사기꾼에 불과하다.

     


    1099년 7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한 십자군들은 야만인들로 알려진 아랍인들의 발달된 학문적 수준에 놀랐다. 특히 천문학과 기하학 분야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을 압도했다. 이 모든 것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책들의 영향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십자군들에 의해 전파된 신학문의 영향으로 유럽에서는 대학이 생겨나고 나아가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서기전 306년에 최초로 설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전통이 근세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1988년, 과거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재건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외관

    1988년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은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기공식의 테이프를 끊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외관

    도서관의 건립에는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한  2000억 원의 예산 지원이 있었다. 


    외벽에는 각국의 문자들을 새겨놓았다. 당연히 한글도 있다. 


    현재의 내관 모습 





    과거 도서관의 내관 상상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관한 국내외 출간 도서



    알렉산드리아에는 진리의 등불인 도서관 외에도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가 있었다. 서기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건설된 이 등대는 높이 180m로서 50㎞ 떨어진 해상에서도 등대의 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다. 파로스 등대는 각각 사각형, 팔각형, 그리고 원통형의 세 층의 탑으로 구성되었으며, 등대의 꼭대기에는 제우스 상이 세워져 있었다. 등대의 불빛은 실내에 위치한 연소실의 불빛을 탑 꼭대기에 설치한 거대한 청동제 반사경을 이용하여 사방으로 비추게 했고 낮에는 연기를 뿜어내거나 햇빛을 반사시키기도 했다. 





    파로스 등대 상상도


    파로스 등대가 있던 곳

    로도스 섬 끝자락 옛 십자군 성채가 세워진 곳에 파로스 등대가 자리했었다. 



    1994년 가을,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팀이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파로스등대의 잔해 수백 점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 발굴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4.55미터, 무게 12톤의 여신상을 기중기로 끌어올렸는데, 5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에 거상들의 토르소, 목이 떨어진 스핑크스들이 수없이 수장되어 있었다. 최소한 3000개가 넘는 건축용 돌들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고 원형기둥들의 파편들도 수백 개가 되었다. 

     

    파로스등대는 1100년과 130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무너졌다 하는데, 2006년 이집트 정부는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아 이 등대를 원래 서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카이트 베이 성채 옆에 다시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파로스 등대의 잔해 



     


                     인양되는 잔해들 



    고 지도상에서 본 등대의 위치

    위쪽 ★표 지점. 아래쪽 ★표는 도서관이 있던 곳이다.   


    3d 지도상에서 본 등대의 위치


    인공위성에서 본 등대의 위치

    위쪽 Pharos Island라고 써 있는 곳(화살표 자리)에 파로스 등대가 자리했었다. 

     

    * '클레오파트라와 해저 왕국'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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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