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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레오파트라의 해저 왕궁(안토니우스의 꿈)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12. 08:19


    제정 로마의 서막을 연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로마가 벽돌로 된 도시임을 발견하고 그것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I found Rome a city of bricks and left it a city of marble)


    이것이 로마의 외관을 의미하는 말은 물론 아니겠지만, 그가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열면서 로마를 새 단장했을 것임은 그 상상이 어렵지 않다. 로마는 기원전 510년경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한 작은 마을이 기원으로, 전승에 따르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 강을 거슬러 정착한 곳이다. 그것이 로마의 세력 확장과 더불어 대제국 로마의 심장부가 된 것으로, 그로 인해 로마는 도시의 이름이자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 그 작은 마을이 도시가 되고, 제국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수도 로마는 제국 시대에 이르서러도 무질서했다. 5대 황제 네로가 도시에 불을 지른 이유도 그 무질서한 로마를 일거에 정비해보자는 생각이 아니었나 하는데, 그 방화의 책임을 운 나쁘게도 황제에 저항했던 기독교도들이 뒤집어 썼다. 이후 로마는 새롭게 태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구획도시와 같은 반듯한 모양새는 갖추지 못하였다. 그 로마의 전성기 때 모습은 아래와 같다. 



    콜로세움을 중심으로 본 제정 로마시대의 모습. 콜로세움의 왼쪽 위에 황거가 위치해 있다.  


    황거가 있던 임페리얼 포룸 지역이다.


    고대  로마 시 지도



    황거가 있던 포룸 지역의 발굴 모습인데,(위 그림의 표시된 지역) 발굴 전 기념촬영을 하고,


    발굴 개시.(발굴은 2006년에 이루어졌으며 위 사진들은 archeotime.wordpress.com에서 퍼온 사진이다)


     

    발굴 후 단장된 모습. 



    반면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 서부 원정길에 라코티스라는 작은 마을을 발견하고, 그리스의 유명한 건축가 디노크레테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딴 신도시를 세우라 지시한 것이 시초였다. 이를 부하인 클레오메네스가 감독해서 반 이상 이루어 놓은 것을 이곳으로 귀환한 디아도코이 프톨레마이오스가 인수하여 자기 왕국의 수도로 삼았음은 앞서 지도와 함께 설명한 바 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70인역 성서' 참조) 따라서 그 도시는 처음부터 구획도시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후로도 수도로서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졌던 바, 제국의 말년인 클레오파트라 치세에 이르러서도 아래와 같이 반듯한 형태의 도시로 남을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치세 때의 알렉산드리아 상상도.


     클레오파트라 치세 때의 알렉산드리아 지도.



    독일 작가 한스 크라스티안 후프는, 카이사르도 더 없이 지저분한 골목길의 로마보다 놀랍도록 깨끗한 알렉산드리아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라는 개인적 생각을 피력한바 있는데, 카이사르야 이집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로마로 돌아가야 될 입장이었던 반면, 이미 땅을 갈라 자유로왔던 안토니우스의 경우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참조) 자신의 유언장처럼 아름다운 이곳 알렉산드리아에 뼈를 묻고 싶었을 것이다.(전쟁이 개시되기 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무덤 곁에 자신의 뭍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이 유언장이 공개되었고, 이는 로마 시민의 대대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나 역시 사견을 개진하자면, 지금까지 알려진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 왕궁 티모니움은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 안토니우스의 플랜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곳은 타에나루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우스가 자살을 결행하기 전 머문 곳으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참조) 그는 이곳에서 홀로 비분을 삼키다 브루케이움의 궁으로 가서 칼로 배를 긋는다. 여기서 상상력을 보태자면, 그는 이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었을 터, 하지만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신도 여기서  자살을 결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플루타르쿠스는 자신의 "영웅전" '안토니우스' 편에서, 그가 홀로 머물렀던 이곳 티모니움을 '짓다 만 곳'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사실 그가 아니더라도, 풍광 좋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여생을 즐기고픈 마음이야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갖는 욕망일 터..... 




    알렉산드리아와 티모니움의 위치(No. 3)


    위 지도는 안토니우스가 죽기 전 머무른 장소를 티모니움으로 가정하고 있고, 그 앞에 안토니우스가 조성한 인공 섬과 그 안에 건설한 궁전을 표시하고 있다.(중앙 빨간 점으로 표시된 곳)



    위 지도에  설득력이 실리는 것은 아래의 덴데라 하토르 신전 때문이다. 이곳은 이집트의 3대 신 호루스를 모신 신전으로서, 합일체는 아니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인 카에사리온은 호루스로서, 클레오파트라는 호루스의 어머니인 하토르로서 숭배받고 있었다. 그렇듯 이미 신의 경지까지 오른 그들 모자이고, 또 이미 브루케이움 안에 그들 모자의 훌륭한 궁전까지 있는 마당에 따로 궁전을 만들 필요가 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호루스 신의 어머니인 하토르는 하늘의 여신이자 사랑과 미의 여신이다. 




    룩소르의 60여 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덴데라 신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한다.


    덴데라 신전 벽에 새겨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중앙)



    신전 앞의 호루스 신상.


    덴데라 신전은 천장과 기둥의 아름다운 문양으로 유명한데, 


    그 천장 문양 중 가장 훌륭했던 '천궁도(Zodiac)'는 1821년 프랑스 골동품상 세비스티앙 루이 솔니의 고용인들이 폭약을 터뜨려 떼어갔고, 솔니는 그것을 루이 18세에게 팔았다. 


    그것이 위의 것으로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데, 이집트의 반환 요구에도 박물관 측은 꿈적 않고 있다. 


    한때 '고대의 전구'라고 설왕설래했던 벽화도 여기 덴데라 신전에 있다. 




    1994년, 프랑스의 고고학 발굴팀이 알렉산드리아 앞 바다 속에서 지진으로 가라앉은 클레오파트라의 왕궁 유적을 발견했다. 다만 이 유적은 클레오파트라의 왕궁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설의 도시 헤라클레이온(Heracleion)과 메노우시스(Menouthis), 그리고 이시스 신전의 유적과 유물까지 일괄 수습되었던 바, 반드시 클레오파트라의 왕궁 유적, 즉 안토니우스가 짓던 왕궁의 유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의 짧은 영광과 길었던 꿈을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사진은 이시스 신전 유적지에서 건져올린 이시스(혹은 오리시스) 여신상인데,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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