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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레오파트라는 정말로 미인이었나?(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6. 23:59


    지난 2008년 12월 16일 영국 유수의 신문인 데일리메일(Dailymail)은 클레오파트라의 실제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3d 제작의 아래 얼굴을 실었다. 이집트의 여러 자료를 조사해 1년 이상 걸려 완성했다는 얼굴이다. 이후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 사진에 실소(失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미추(美醜)를 떠나 내 상식으로는 전혀 나올 수 없는 얼굴이 버젓히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힙합을 즐기는 혼혈 소녀 같은 이미지의 사진



    이 사진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 얼굴이 혼혈 또는 아랍인의 형상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지 모르겠으나, 앞서 말한대로 클레오파트라에게서는 절대 이러한 얼굴이 절대 나올 수가 없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그 첫 째는 클레오파트라는 본래 라지드(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집안에서 출생한 순혈(純血)의 그리스인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대로 자신들의 순혈을 지키기 위한 정책을 취해왔던 바,(본토의 이집트인과 차별화하기 위한) 그것은 클레오파트라 여왕 자체가 자신의 동생과 결혼을 한 사실로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우선 그가 여왕으로 군림했던 당대의 이집트 왕국, 즉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어떠한 나라였는가부터 살펴보자. 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알렉산드로스 제국부터 이해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알렉산더 대왕과 티레 전투''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에 자세한 설명을 마친 바, 그의 사후에 디아도코이(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부하 장군)들에 의해 사분오열된 아래의 지도로서 대강의 설명을 갈음하려 한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가 정복했던 광대한 영토는 디아도코이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는데, 분홍색 지역을 차지한 안티고노스 장군과 코발트 블루색의 지역을 차지한 셀레우코스 장군이 대세였다. 이에 여타의 디아도코이들이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며 헬레니즘 세계의 패권을 놓고 박터지게 싸우게 되는데, 이때 이집트 지역을 차지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그 지리적 잇점으로 인해 이들 디아도코이들의 싸움에 크게 휩쓸리지 않고 이집트에서 독자적인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다.(맨 밑 노란색 지역)  즉 이집트에서 그리스인 혈통의 라지드 왕조(BC 305- AD 30)를 개창한 것이었으니, 당시의 영역은 아래와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당시의 영역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흉상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로 이끌고 간 군사들의 수는 의외로 적어 겨우 4000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적은 병력으로도 자신의 왕국을 구축할 수 있었던 바, 그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를 점령할 때 보여준 4만 7천 병력의 위세가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터였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했을 때 이미 도시는 반 이상이 건설된 상태였고, 당시의 이집트인들도 그를 전 왕조를 잇는 파라오의 계승자로서 받아들였으므로 현지인과의 큰 갈등없이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한 새 왕국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왕국에의 건설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광에만 의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 강한 군사력이 아닌 현지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이집트인의 환심을 이끌어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이집트 주요 도시에 건립한 세라페움이었는데, 이집트의 성스러운 황소 아피스와 그리스의 최고 신 제우스의 합체인 세라피스 신을 모신 신전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정책을 통해 이집트 사람들을 군인으로 차출할 수 있었고, 그 군사로써 시리아의 디아도코이 안티고노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이집트를 지켜냈다는 의미로써, 자신을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구원자)'라 칭하며 왕조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차후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남자 왕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여자 왕들은 클레오파트라, 아르시노에, 베레니케 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 여왕도 이 같은 칭호에 따른 이름으로,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의미였다.



    고대 이집트의 황소 신상 아피스(오소라피스)




    세라피스 신상의 변천


    이후 중동에까지 퍼진 세라피스 상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나 세라피스 숭배 신앙은 헬레니즘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성행하였다.


    이집트의 세라페움

    1857년 사진작가 프란시스 프리스가 이집트 마하라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탈리아 남부 포초울리에 있는 세라페움

    유럽의 세라페움은 따로 마셀룸(Macellum)이라고도 불린다.



    이상의 세라페움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유화정책을 대표하는 유물로는 로제타 스톤과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을 들 수 있겠는데, 훗날 이 로제타 스톤이 유명하게 된 것은 그 하나의 돌에 동일한 내용(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포고문)을 담은 이집트의 신성문자(히에로그리프)와 민중문자(데모틱), 그리고 그리스 문자가 차례로 새겨져 있어 맨 밑의 고대 그리스어를 토대로 이집트의 고대 문자들을 모두 해독해낼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브리티시 박물관의 로제타 석

    높이 114.4cm, 너비 72.3cm, 두께 27.9cm의 화강섬록암으로 브리시티 박물관의 중요 소장품이다. 

     

    추정한 원래 모습

    로제타 석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재위 BC 205- 180) 재위 9년에 세워진 포고문으로, 메르넵타 석비처럼 처음에는 이와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메르넵타 석비에 관해서는 '외계인이 지어준 국호 이스라엘참조) 

     

    로제타 석을 해석한 샹폴리옹

    장 프랑스와 샹폴리옹은 가장 밑에 배열된 그리스어를 토대로 이집트 신성문자(히에로그리프)와 민중문자(데모틱)를 해석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로제타 석은 1799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가 발견했으나 후에 영국군이 인수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벽에 새겨진 한글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가까운 곳에 현대식 도서관이 재현되었다.



    그런데 이후 300년 간이나 영속했던 라지드 왕조의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50년을 전후로 나라의 존망이 걸린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니, 바로 로마의 세력 확장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왕이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로,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차녀로 태어난 여왕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혼자 다스렸던 것이 아니라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를 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순혈을 보존하기 위한 라지드법을 제정하여 근친혼을 행하고 있었던 바, 공동 통치는 그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누나인 클레오파트라 7세나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둘 다 그 자리가 불안했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언니 베레니케와 그의 남편 아르켈라우스가 키프로스의 소유권 문제로 로마와 싸우다 죽었기 때문인 바, 언제 로마가 이집트 본토까지 쳐들어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즈음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는 더욱 나쁜 일이 생겼으니,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바로 밑의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손잡고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내고 국외로 추방시켜버렸던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제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그녀는 한 가지 비책을 생각해내게 되었으니 다름아닌 로마의 권력자 그나에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힘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폼페이우스를 주목하게 된 것은 그가 바로 자신의 언니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로마 명문가의 자제 폼페이우스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의 삼두정치(Triumvirate)를 이끈 인물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에서 패해 죽은 후에는 실질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를 나눠 가진 상태였다.



    로마의 1차 삼두정치를 이끈 인물

    크라수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의 순이다. 크라수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라진 로마군단 이야기' 참조



    클레오파트라가 폼페이우스를 주목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일찍부터 아프리카 경략에 나섰기 때문이니,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도 일찌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패한 적이 있었고, 그의 마그누스(대왕)라는 칭호는 리비아 전쟁에서의 개선 후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는 폼페이우스를 향한 정치적 로비에 들어갔으나 웬걸, 불행히도 폼페이우스가 그리스 파르살루스 평원 전투(BC 48)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하며 권좌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는 명언을 탄생시킨 바로 그 전투로, 이 말은 전력상 열세였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의 경계로 정해졌던 이탈리아 루비콘 강을 건너며 한 말이었다.(BC 49) 어차피 경계를 넘었으니 죽기살기로 싸우자는 결의의 표시였던 것이다. (※ 5.16때 박정희 소장도 한강 다리를 건너며 이 말을 했는데 일본말로 뱉았다는 건 더욱 유감이다. 이때 한강 인도교를 지키던 헌병들과 해병대의 교전이 있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카이사르와의 전투에서 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을 왔다. 그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권토중래를 도모해볼 요량인 듯했으나 그 또한 웬걸, 그는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절명하고 말았다. 이제 판도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벌인 짓이었다. 그 사흘 후,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집트에 도착한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목과 반지를 바쳤다.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 카이사르는 이집트 백성들에게 라지드 왕조의 이집트 통치권을 인정한다는 조칙을 내려 국민적 반발을 무마시켰던 바, 이제 당분간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통치는 계속될 듯싶었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마음에 급해졌다. 이대로 가면 동생의 권좌는 더욱 굳어지고 자신은 떠돌이 망명자로서 일생을 마치게 될 것이 뻔할 터,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탄생하였으니, 카이사르가 도착한 그날 밤 자신의 몸을 카펫에 둘둘 말아 감춘 후, 선물처럼 위장하여 카이사르의 숙소에 보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근거는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겠으나, 그 다음날 아침,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를 만났을 때 그 곁에 앉은 클레오파트라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는 기록을 보면 그 하룻밤 사이 역사가 바뀌었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카이사르 앞클레오파트라'(1866년 작품)

    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첫 만남을 묘사한 쥬앙 레옹(Jean Leon Gerome)의 유명한 그림이다. 왼쪽의 놀라는 사람이 카이사르이고 오른쪽 카페트를 펼치는 이집트인이 클레오파트라를 메고 들어간 그녀의 시종 아폴로도루스이다. 그림 속의 이 이야기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전언으로 소개돼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득세와는 반대로 크게 배신감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의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온 것이 아니었던 바, 1만 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이에 카이사르는 급히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로마 군함들의 기항을 용이하게 하기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 중인 이집트 함선에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마침 불어 온 바람을 타고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 옮겨 붙어 큰 화재가 일어나게 되었다. 아무튼 로마군은 이집트로 급파되었고, 뜻하지 않게 이집트 왕위 계승전에 뛰어들게 된 카이사르는 싫든 좋든 클레오파트라와의 밀월 관계가 유지되게 되었다. 


    이른바 이집트 왕위 계승 전쟁은 카이사르 군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로마군이 막강하기도 했지만 멤피스에 주둔하고 있던 이집트군이 때아닌 나일강의 홍수로 인해 전력상의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집트의 권력은 클레오파트라가 독점하게 되었는데,(어린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형식적인 결혼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카이사르와의 밀월 관계 동안 카이사리온이라는 어린 아들도 한 명 태어났던 바, 그녀의 권력은 오랜 기간 공고할 듯 보였다.(카이사리온이 그 두 사람 사이의 소생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두 사람의 밀월 관계는 오랫 동안 지속되었으므로 그 소생이라 보아도 무난할 듯싶다. 카이사리온은 '작은 카이사르'의 뜻이라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키스'

    세기의 미녀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클레오파트라 역을 맡은 '미션 클레오파트라'라는 영화에서의 이 장면은 따로 '클레오파트라의 키스'로 불려질만큼 유명하다.(이 영화의 장르가 코믹임을 염두에 두시길 ^^) 

     

     

    이후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가자 클레오파트라도 로마에서 2년 여를 생활하였다. 이제는 워낙에 막강해진 그녀의 세력인 바, 이집트에서의 정변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에  카이사르의 위세를 등에 엎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서도 여왕과 같은 생활을 즐겼으나, 로마 원로원에서 그녀를 보는 시각은 곱지 않았다. 아니 로마 원로원에서는 사실상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바로 클레오파트라가 데려온 아들 카에사리온 때문이었다.

     

    그 어린 아이는 카이사르의 유일한 소생인 셈이었는데,(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가 먼저 죽었고, 현재 부인인 칼푸르니아 사이에서는 아직 아기가 없었으므로) 그 공식적인 지위만 주어지지 않았다 뿐 로마에서의 딕타토르(독재관) 카이사르는 실질적인 황제나 마찬가지였다. 까닭에 그의 아들 카에사리온을 바라보는 로마 원로원의 시각은 불편함을 넘어 아예 끔찍하기조차 한 것이었다. 


    이에 원로 정객 키케로를 비롯한 많은 정치가들이 클레오파트라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여러가지 '가짜 뉴스'로서 그녀를 공격했지만, 카이사르가 살아 있는 한 그녀의 지위 또한 흔들릴 수 없는 반석 위였다. 그런데  BC 44년 3월 15일 로마 원로원에서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딕타토르  카이사르가 가이우스 캇시우스와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비롯한 일단(一團)의 정적들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그 무리들이 작당하여 카이사르를 칼로 살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정적이라기보다는 로마의 미래를 걱정한 지사(志士)들이라 부르는 편이 더 옳을 터였다. 그 공화정 옹호주의자들은 변(辯)은 로마는 아직 황제를 받아들인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을 그린 빈센쵸 카뮤시니의 그림. "브루투스, 너마저도(Et tu, Brutus)"를 외치는 유명한 장면에의 묘사이다.  



    카이사르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카이사리온과 함께 급히 로마를 빠져나왔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급서(急逝)한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대신하여 카이사리온을 왕위에 올리고 갑자기 창궐하기 시작한 역병과 기근, 그리고 치솟은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며 능력 있는 여왕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하였다. 반면 로마는 지속적인 혼란에 빠졌들었으니 브루투스를 비롯한 공화파와 카이사르 체제 지지파들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인물은 카이사르의 근위대 대장이었던 레피두스,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였는데, 그들은 2차 필리피 전투에서 캇시우스·브루투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공화파를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후 이들은 로마의 영토를 나눠 가지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이에 반대한 키케로 등의 정객은 피살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의 또 한번의 3분할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바, 른바 제 2차 삼두정치의 시작이었다. 



    로마의 2차 삼두정치를 이끈 인물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순이다.


    2차 삼두정치가의 영토 분할

    가운데 붉은색은 옥타비아누스,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북안의 녹색은 레피두스, 오른쪽 파란색 지역은 안토니우스가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로마 3분(分)은 앞서의 1차 삼두정치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나눠가질 수 없는 권력의 속성 때문이었던 바, 시칠리아 섬을 두고 옥타비아누스와 다투던 레피두스는 그와의 싸움에서 패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고, 이에 싸움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로 모아지게 되었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지배하던 지역은 지중해 동부의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 옛 프톨레미우스 왕국의 땅 일부였던 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연합을 하거나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은 필연이었다. 


    여기서 그 두 사람은 연합을 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항하기로 합의를 보았다.(BC 41) 이같은 합의는 클레오파트라로서는 1차 삼두정치의 승자인 카이사르에 매달릴 때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으니, 이번에는 동업자의 입장에서 로마의 세력과 싸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의 연합 세력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승리하게 되면 클레오파트라는 과거 카이사르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때와 달리 명실공히 천하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었다. 야심가 클레오파트라는 그날을 꿈꿔 마지않았다.

     

    설사 그렇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이집트의 프톨레미오스 왕조만큼은 여하히 지킬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이번 기회에 안토니우스를 단단히 꼬시려 마음 먹는데, 아니게 아니라 무언가에 홀린 듯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애 엄마와 결혼까지 하고,(자신의 본부인인 옥타비아는 버려두고) 그 결혼 선물로서 팔레스타인의 유다를 비롯한 오리엔트의 땅을 안겨주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찰떡 궁합 이미지들

    과거 라이프지는 '클레오파트라'라는 대작 영화에 출연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의 염문설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에 빗대었다. 리허설 중에 찍힌 사진인 듯 리처드 버튼 손가락의 담배가 이채롭다. 



    이 두 사람의 연합은 BC 31년, 로마 전체의 향배를 가눌 악티움 해전이라는 세기의 전투를 눈 앞에 두게 되는데, 그 역사적인 전투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쯤에서 다시 주제로 넘어가 보기로 하겠다. 이 글의 주인공인 클레오파트라라는 여인이 당대의 영웅 두 사람을 홀릴만큼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나 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클레오파트라의 코 높이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말들도 많고, 그녀는 미모보다 나르메르 팔레트부터 비롯된 뛰어난 이집트 화장술의 힘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상의 최초의 문자가 바로 나르메르 팔레트라고 하는 눈 화장 도구에 써 있다는 사실인즉 정말이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바, 그같은 추론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나르메르 팔레트



    ~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는 기원전 3000년경에 제작된 높이 64cm의 점판암 판으로,  앞면에는 백관(白冠)을 쓴 상(上)이집트 나르메르 왕이 하(下)이집트의 파필스를 정복하는 모습과 수호신 호루스의 형상이, 뒷면에는 하이집트의 홍관(紅冠)을 쓴 나르메르 왕이 전과(戰果)를 점검하는 모습과 공룡처럼 목이 긴 동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상이집트 왕이 하이집트를 정복해서 처음으로 이집트 통일국가를 이룩한 역사적 사건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풀이되어, 1왕조 창시기(創始期)의 중요자료로 취급된다. 


    더욱이 여기 써 있는 그림 문자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상형 문자 비문으로 인정받고 있어 최초 문자의 고고학적 발견이라는 의미 또한 지대하다. 더불어 주목받는 것은 이 판의 용도로서, 이 나르메르 팔레트는 이집트의 강한 햇빛으로부터 왕의 눈을 보호하기 위한 화장품을 만드는 데 쓰인 석판이라는 것이다. 이집트의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렬한 마스카라의 기원을 말해주는 도구인 바, 화장의 역사가 문자 문명보다 앞섰음을 말해주는 진귀한 유물이다.  



    카이로 박물관의 나르메르 팔레트


    이집트 눈 화장술의 일례



    하지만 그렇지 않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쿠스가 자신의 책에 확실한 기록을 남겼던 바, 당대의 영웅들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넋을 잃고 빠져들어간 다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 기록 또한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20년 전 세상에 나와 골동품점을 떠돌던, 그러나 지금은 유일한 클레오파트라의 두상으로 알려져 있는 아래의 사진을 소개하며 그 판단을 보시는 분께 미루려 한다.



    베를린 고대박물관의 클레오파트라 상


    * '클레오파트라의 최후(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로 이어짐.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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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