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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1. 01:53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3번 째 대전(大戰)은 가우가멜라 전투였다. 가우가멜라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한 벌판으로 페르시아어로 '낙타의 집'을 의미한다. 옛날 페르시아의 어떤 왕이 적에게 쫓길 때 자신의 낙타가 매우 빨리 달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에 낙타에게 그때의 땅을 봉토로 주었던 까닭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었다. 지금의 지명으로 설명하면 가우가멜라는 이라크 모술 동쪽 27km에 위치한 벌판으로서, 이 일대는 지난 3년간 금세기 최악의 테러집단 IS에게 점령당했다 올해 7월 10일 국제연합군에 수복된 지역이기도 하다.
전투는 BC 331년 10월 1일에 벌어졌다. 플루타르쿠스는 월식이 있던 날로부터 12일 째 되는 날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하였던 바, 날짜는 이를 역산하여 산출한 것 같다. 또 플루타르쿠스는 이날 평원에 집결한 다리우스의 군대가 100만이라고 기록했는데, 흔히 말하는 백만대군의 개념일 뿐, 전투에 동원된 페르시아 군은 앞선 잇수스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12만 명 정도였을 것이며, 알렉산드로스 군 역시 앞서와 비슷한 4만 7천 정도를 유지했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은 보면 다리우스 왕은 잇수스 전투에서의 패전이 불리한 지세(地勢) 때문이라 여긴 듯하니, 이번에 그가 선택한 곳은 사방이 트인 벌판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적을 섬멸하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가우가멜라까지의 원정도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점술가 아리스탄데르가 날려보낸 독수리의 비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독수리가 빠르게 페르시아 진영 쪽으로 날자 이에 힘입은 듯 알렉산드로의 기병대가 전속력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고, 긴 창을 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와 동시, 페르시아의 전차병들도 말을 몰아 돌진했다. 그리고 그 양군이 벌판 한 가운데서 격돌하려는 찰나 알렉산드로스의 기병이 좌우로 나눠지며 전차 부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전차가 직진밖에 못한다는 것을 이용한 작전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전차 부대가 포진돼 있던 가운데 빈 공간을 헤집고 그대로 다리우스의 본진을 향해 질주했다.
가우가멜라 전투를 묘사한 18세기 작자 미상의 부조.(스페인 국립고고학박물관)
앞의 잇수스 전투를 묘사한 모자이크화와 달리 엉겨붙어 싸우는 모습이 강조되었으며 아리스탄테르가 날려보낸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가우가멜라 전투를 다룬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페르시아 전차 부대는 그 뒤에 대기하고 있던 이른바 팔랑크스라고 하는 마케도니아의 밀집 장창(長槍)부대가 맡았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 속에 페르시아가 앞세운 200여 기의 전차부대는 그리 오래지 않아 궤멸되고 말았다. 반면 좌 우익의 그리스 동맹군은 위태로워졌으니, 알렉산드로스의 주력 기병이 뻐져나간 사이 페르시아 군의 기병대가 쳐들어온 것이었다. 특히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좌익 그리스 동맹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을 가로 막는 우측 부대를 부수고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다가갔고, 그 맹렬한 공격에 다리우스는 도망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속전속결로써 다리우스를 처지하겠다는 알렉산드로스의 작전이 그대로 먹혀드는 순간이었다.
팔랑크스(Phalanx) 이미지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실용신안 특허를 낸 밀집 장창부대. 그리스 군의 장창부대를 수정 보완한 마케도니아 군의 주력으로 '사리사'라 불린 장창은 그 길이가 5m에 이른다.
영화 '알렉산더'에서의 팔랑크스
전방공격에는 강하지만 '사리사'의 특성상 측면이 취약한 탓에 소수의 '헤타이로이'라는 기병대가 좌우에 배치된다. '헤타이로이'가 '동료'의 의미이므로 흔히 컴패니언 기병대라는 영어 표현으로 쓰인다
영화 '알렉산더'에서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를 공격하는 팔랑크스.
그런데 바로 그때 페르시아 군대에 고전하던 파르메니온의 구원 요청이 들어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잠시 망설였으나 말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의 기병대는 파르메니온과 협공하여 페르시아 군을 쳐부쉈는데, 다리우스는 그 틈을 이용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급히 다리우스를 추격하였으나 이미 멀리 달아난 후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같은 상황을 무척이나 아쉬워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전투는 이번에도 알렉산드로스의 대승으로 끝났고, 다리우스는 저 먼 박트리아까지 도망가야만 했다. 사실상 페르시아는 이제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우가멜라 전투 도해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진영의 중앙을 뚫고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쳐들어가는 상황, 파르메니온의 부대가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을 받는 상황,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달려 파르메니온을 구원하러 가는 상황, 다리우스가 도망가는 상황이 그려져 있다.
그 전투 후 '아시아의 왕'으로 칭해진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아무런 제재없이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갔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페르세폴리스를 약탈하고 40일 간의 술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그 막판에 이르러서는 복수심 가득한 어느 그리스인의 말을 좇아 페르세폴리스에 대한 방화를 지시하였다. 모든 것이 술김에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그는 소화의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 물로는 불붙은 페르세폴리스의 한쪽 귀퉁이도 끌 수가 없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BC 558-330)의 영화가 서린 거대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그렇게 불타 무너졌고, 한때 세계를 향했던 저 '왕의 대로(大路)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조공을 바쳤으며, 장장 200년 동안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했던 페르시아의 영광은 그렇듯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페르세폴리스 '만국의 문'
다리우스 왕의 궁전 유적
페르세폴리스의 정궁 아파다나 왕궁의 유허
아파다나 왕궁 복원도
아파다나 왕궁 석주
페르세폴리스는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운 것이 특징인데, 아파다나 왕궁 계단 양 옆으로는 공물을 바치는 각국 사신들을 새겼다.
페르세폴리스 유적 부감과 위치
그러나 그것으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선은 도망간 다리우스 왕을 붙잡아야 했고, 나아가서는 나머지 페르시아의 땅과 그 나라 밖의 세상 땅들도 모두 손에 넣어야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붙잡기 위해 11일 동안을 강행군을 하였다. 다른 목 마른 장병들을 생각해 부하가 떠온 물을 사양했다는 일화는 이 때 생겨났다. 다리우스는 박트리아(지금의 아프카니스탄 일대) 땅의 입구에서 붙잡혔으나 그는 이미 자신의 부하 벳수스의 활을 맞고 빈사의 상태였다. 다리우스는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로스의 부장 폴리스트라투스에게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
잠시 후 이 자리에 당도한 알렉산드로스는 한동안 슬픔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니 자신의 웃옷을 벗어 다리우스의 시신을 덮었다. 이어 그는 곧바로 벳수스를 쫓았는데, 벳수수는 얼마 안 돼 붙잡혔다. 알렉산드로스는 벳수스를 사지를 찢어죽이는 형을 택해 죽였다. 다리우스의 시신은 국왕의 예로 엄숙한 장례가 치러진 후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졌다. 다리우스의 동생과는 군신 관계가 아닌 친구로서의 맹약을 맺었다.
이로서 페르시아는 이제 완전히 망했으나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은 멈추지 않았다. 박트리아를 점령한 그는 이번에는 눈 덮인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향했다. 그리고 BC 326년 인더스 강의 상류인 히다스페스 강을 사이에 두고 인도 편잡 지방의 왕 포루스와 맞닥뜨렸다. 200마리의 코끼리로 이루어진 전상대(戰象隊)와 2천 기의 기병을 앞세운 2만 5천 명의 병력이었다. 전투는 히다스페스 강에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치러진 그야말로 악전고투였으나 여기서도 승리는 알렉산드로스의 몫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 땅을 취하지 않고 포루스를 총독으로 삼아 계속 다스리게 했는데,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복한 주위의 땅들도 그에게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전상대 개념도
프랑스 출신의 일러스트 화가 안드레 카예테누(1861-1929)가 그린 히다스페스 전투 묘사도이다.
히다스페스 전투 도해
알렉산드로스의 군사가 모래 톱이 있는 히다스페스 강 상류를 건너 포로스의 후방 군을 들이치고 있다.
히다스페스 강
오늘날의 야알룸 강으로 파키스탄 동부를 흐르는 인더스 강의 상류이다.
포루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번에는 동쪽의 갠지즈 강으로 진출했다. 그동안 용감했던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얼굴에서 피로감이 묻어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그들도 사실은 이제나저제나 집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일 터,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욕은 도무지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하그마타나(이란 중서부의 위치한 도시 하마단)에서 그리스 군사들은 코린트 동맹의 규약대로 대다수가 집으로 돌아갔지만,(군사력 차출의 명분이었던 페르시아에의 복수는 사실상 끝났으므로) 자신들 마케도니아 군사들은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알렉산드로스 왕의 나이는 올해 불과 서른, 아직까지 젊디 젊은 영혼과 육체였다.
갠지스 강의 전경과 위치
'정말로 이 강을 건너야 하는 것인가?'
'정말로 왕의 원정은 세상 끝까지 가야 끝나는 것인가?'
갠지즈 강 앞에 선 병사들은 차마 말은 못했지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고 있었다. 게다가 그 넓은 강의 건너 편에는 그 수조차 가늠하기 힘든 엄청난 군사들이 모여 있었다. 자신들이 들은 바로는 강 건너의 적병은 간다리타 국과 프라에시아 국의 연합군으로서 보병이 20만, 기병이 8만, 전차가 8천 대, 전상(戰象)이 6천 마리라고 하는 까닭에 그 공포심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사실 이것이 과장만도 아닌 것이, 얼마 후 이 지방을 통치한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 굽타는 헬레니즘 제국의 실력자 셀레우쿠스에게 5천 마리의 코끼리를 한꺼번에 선물로 주었고, 자신은 60만 대군으로 인도 정벌에 나서 북인도를 통일하기도 하였다.(학자들은 이 시기를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찬드라 굽타는 또 이곳에 쳐들어온 셀레우쿠스 왕조의 니카토르 1세(=셀레우쿠스)를 아프카니스탄에서 격파하고 서쪽 영토를 옛 페르시아의 국경까지 확장시키는 업적도 남겼다.(BC 303년)
찬드라굽타 당시의 마우리아 왕국 영역과 찬드라굽타의 동상
~니카토르 1세는 이때 자신의 딸을 찬드라 굽타와 혼인시켜 겨우 강화에 성공하는데, 그가 받은 코끼리 5천 마리는 혼인에 대한 답례 예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어찌보면 상당히 굴욕적일 수도 있는 선물이었지만, 이때 니카토르는 이 코끼리들을 잘 조련시켜 전상대로 쓰게 된다. 그리하여 BC 301년, 디아도코이(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인물들) 간의 가장 큰 싸움이었던 이프소스 전투에서 이 전상대를 끌고 나가 두 명의 다른 디아도코이 군을 궤멸시키고 마침내 헬레니즘 제국의 패자(覇者)로 등극하게 되는 바, 어찌보면 사는 데 있어 유치함이란 없어 보인다.(니카토르라는 이름은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1세가 붙인 '승리자'란 뜻의 경칭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분열된 제국과 셀레우쿠스의 영역(분홍색부분)
셀레우쿠스의 얼굴과 코끼리를 넣은 당대의 주화
이 갠지즈 강 앞에서 병사들은 결국 도강(渡江)을 거부했다. 여기서 맞아 죽으나 강 건너 가 죽으나 매 한 가지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뜻밖의 상황에 아연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기 장막에 돌아와 매우 비통한 표정으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대들이 끝내 강 건너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그대들이 수행한 일체의 노고에 대해서 아무런 감사의 마음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퇴각한다는 것은 곧 나의 패배를 의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에 병사들에게 감사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이미 마음을 굳힌 장수들과 병사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마침내 그도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신 배와 뗏목을 건조하여 마치 뱃놀이를 즐기듯 인더스 강을 타고 내려갔다. 알렉산드로스는그때 이유를 묻는 장수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이유는 없다. 단지 바다가 보고 싶을 뿐."
그러나 인더스 강에서의 항해가 무려 7개월 간이었고, 또 단지 뱃놀이를 즐긴 것이 아니라 강 여기저기에 상륙하며 여러 부족들과 대소 전투를 치루었는데, 그중에는 적병이 쏜 활이 갑옷을 관통해갈비뼈 사이에 박히는 부상도 입었지만 항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인도양에 이르러서야 항해를 접고 돌아왔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부하 네아르쿠스를 제독으로 임명해 인도양 해안을 계속 탐험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단지 바다를 보고 왔지만, 그의 항해는 길었고 또 미련도 남겼던 바, 아마도 차기 원정로의 탐색 같은 것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바빌론으로 돌아온 그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것 외에 그가 하는 일은 하루종일 술 마시는 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함대 제독이었던 네아르쿠스의 노고를 치하하는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날도 하루종일 술을 마셨고 그날 저녁에도 친구 메디우스를 불러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도 알렉산드로스는 네아르쿠스의 항해담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아마도 평소보다 과음을 했을 것 같다) 말하자면 그는 이틀 내내 쉬지 않고 술을 마신 셈인데, 그날 밤 잠자리에 든 그는 심한 신열을 앓았다.
그의 부장이자 친구인 아리스토불루스의 말에 따르면, 매우 심한 열과 갈증에 시달리던 그는 큰 잔의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깨어나지 못했다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런 혼수상태로서 며칠을 지내다 다메시우스 달 제 30일에 숨을 거뒀다. 향년 서른 셋의 나이였다. 다메시우스는 마케도니아 달력의 월(月)로서 아테네의 뮤니키온에 해당하는데, 오늘날의 4월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한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그의 사인은 과음으로 인한 사망인데, 네이마르쿠스와의 만남이 과음의 원인이었던 듯하며, 모기에 물려 말라리아를 앓았다거나 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또 혼수상태 그대로 숨을 거뒀던 바, 내 한 손을 관 밖으로 빼내 달라거나, 장수 중 가장 센 자가 내 후계자가 되라는 등의 유언은 남기지 않은 걸로 보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데, 몽골의 대황제 칭기즈칸의 무덤과 더불어 아직까지 풀지 못한 인류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나의 그의 무덤 발견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나, 칭기즈칸의 무덤과 달리 여하히 잘 보존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혹 이미 도굴되어 어딘가 내팽겨져 있지는 않은가 모르겠다.
알렉산드로스의 바빌론 입성을 묘사한 부조
18세기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미국 워싱톤 DC 국립 아트갤러리 소장품이다.(30.8x22.9cm) 알렉산드로스는 이곳 바빌론에서 다시 원정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서른 셋 젊은 나이로 죽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지와 알렉산드리아 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정복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지금 남아 있는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유일하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의 청동 코끼리
부처의 일생과 관련된 유물로 설명돼 있는데, 내가 볼 때는 영락없는 간다라 양식의 전상대이다. 등의 탈 것이 망실된 아래의 석제 코끼리도 마찬가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관(?)
터키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이 석관은 흔히 알렉산더의 무덤이라 불리나 그의 부하였던 압달로니무스의 것이다. 그는 훗날 시돈 왕국의 왕이 되었으며 석관도 그곳에서 발견됐다.
석관의 부조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시아의 전투장면이 새개졌다. 알렉산드로스의 것으로 오인함도 무리는 아니다.
*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III)'으로 이어짐.
-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 국내도서
- 저자 : 김기백
-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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