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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I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2. 04:39

     

    문헌상의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방을 떠날 때 학자나 예술가도 동반했을 것임은 그 상상이 어렵지 않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어릴 적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고 사사했던 바, 그 역시 상당한 학문과 심미안을 갖췄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경지는 자신이 이룩해 낸 헬레니즘 문명으로 표출되었던 바, 비록 그의 치세는 짧았으나 그 영향력은 우리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할 듯싶다.

     

    그는 실제로 살아생전에도 동서 문화의 융합인 헬레니즘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박트리아에 이르러서는 그곳 여자와 결혼하였으며, 페르시아 수사에서는 그리스 · 마케도니아 장병 1만 명과 페르시아 여자의 합동결혼식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앞서 거론된 디아도코이 니카토르 1세도 알렉산드로스의 권유로 박트리아 여자를 아내로 맞았고, 아버지 니카토르 1세와 함께 실제적인 헬레니즘 문화를 이끌었던 셀레우쿠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는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https://i.pinimg.com/originals/8e/84/ff/8e84ffb4e42c6e9eb9f4860591544f2a.jpg

             3세기 셀레우쿠스 왕조의 영역

     

     

    알렉산드로스의 학문적 경지는 인더스 강 항해 중에 붙잡은 인도 철학자 10명과의 문답에서 잘 드러난다. 플루타르쿠스가 자신의 책에서 소개한 이들과의 대화는 상당히 심오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 그 내용을 모두 옮겨 적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지면상 생략하고 다른 기회에 그 장을 마련해 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그로부터 발생된 간다라 미술, 즉 불상의 태동과, 다시 거기서부터 비롯되어 그 정점을 찍은 신라의 석굴암 본존불이기에. 

     

    간다라 미술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처의 사후 500년 동안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던 부처의 모습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딸려온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비로소 형상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처의 사후 500년, 학자들이 이른바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부르는 그때에 있어서의 부처의 형상은 그의 발자국 형상이나 보리수, 혹은 스투파(탑)나 법륜(法輪: 석가모니의 설법을 바퀴에 비유해 형상화시킨 것)으로 표현됐다. 

     

    그런데, 보라! 우리가 흔히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일컫는 저 소포클레스 상과 그 아래 있는 간다라 초기 불상(2세기 경)은 거의 같은 모습이다. 마치 팔을 다친 듯 오른팔을 옷 속에 넣어 걸치고, 손으로는 옷자락을 잡고 있는 모습뿐 아니라 공허한 듯 보이는 시선의 처리 방식까지 같다. 흡사 '내가 왜 그렇게 부주의해 이처럼 팔을 다쳤는가' 생각하는 것처럼도 보이는.(참고로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6년경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소포클레스 상
    간다라 불상

             

    이러한 그리스 조각양식은 3~4 세기 간다라 미술의 정점에 있어 더욱 두드러지니 아래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간다라 미륵은 거의 그리스 신상의 복제품이다. 

     

     

    간다라 미륵

     

    불두가 달아난 아래의 간다라 미술품을 보면 그것이 더 확실하다. 따로 설명이 없다면 그저 그리스 · 로마의 미술품이지 누가 간다라의 불상이라고 하겠는가. 

     

                             

    「gandarah buddaha」の画像検索結果

     

     

    이러한 느낌이 비단 나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터, 아래의 사진은 이미 그 비교 연구를 마친 듯하다.(안타깝게도 더 이상의 이미지를 못 찾았다)

     

                               

     

                                   

    더구나 아래 사진을 보면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와 부처가 한 작품 안에 존재한다. 법륜의 수호신 금강역사의 원조가 어쩌면 헤라클레스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어디선가 그런 주장을 들은 것도 같다)

     

                           

    gandhara civilization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설명이 좀 늦긴 했지만 이쯤에서 간다라가 어디인가 정확한 위치를 살펴보자.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아래의 그림으로 그 위치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네모 안의 잘랄라바드와 페샤와르는 간다라 미술품이 특히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다. 

     

    「gandarah location」の画像検索結果

     

     

    이와 같은 간다라 미술이 융성했던 시기는 서기 1세기 쿠샨왕조 시절이다.(아래 그림의 노란색 테두리) 쿠샨 왕국은 원래 위쪽 박트리아 지방에 살던 스키타이 계통의 민족이 내려와 세운 나라인데, 이 지역을 지배하던 그리스와 파르티아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이후 인더스 · 갠지스 강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들은 이곳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질서를 만들려 노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로, 그 정점에 있던 사람이 그 유명한 카니슈카 왕이었다. 그는 간다라 페샤와르 지방을 나라의 수도로 삼고 불교를 크게 융성시켰으니,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은 바로 그 무렵에 탄생된 것이었다. 

    「gandhara location」の画像検索結果

     

     

     

    우연찮게도 이 무렵 쿠샨 왕국의 남부 지방인 마투라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불상은 그리스 풍의 간다라 불상과는 다른 형태였다. 즉 간다라 불상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한 유럽인의 모습이었으나, 반면 마투라의 불상은 직모에 큰 상투를 튼 현지인의 모습으로 간다라 불에 비하면 조금 투박스러운 형태였다. 그것들의 표정도 그러하였던 바, 눈을 얇게 뜨고 왠지 우울하며 명상에 잠긴 듯한 간다라 불상에 비해 마투라의 불상은 눈을 크게 뜨고 생동감 있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복장 역시 달랐으니, 간다라 불이 통견의(通絹衣) 주름의 곡선이 돋보이는 그리스 · 로마 풍의 옷을 입었다면 마투라 불은 어깨를 드러낸 추상적인 선으로써 옷을 입었음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간다라 불상
    간다라 불상
    마투라 불상
    마투라 불상

                                   

    그래서 과연 불상의 최초 발상지는 어디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게 되었는데, 마침 그에 관한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 분이 짧고도 명료하게 설명해 두었던 바, 오히려 그 내용을 옮겨 실는 것이 첩경일 듯싶다.(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재를 허락해 주었다)

     

    ‘불상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종종 제기되는 문제는 마투라와 간다라 중 어느 곳에서 먼저 불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20세기 전반에 활발했던 이에 대한 논쟁은 유럽중심주의적 시각과 인도 국수주의의 대립이라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전자를 대표한 알프레드 푸셰(Alfred Foucher, 1865~1962)는 간다라에서 불상이 창안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에 익숙한 이들이 인도·그리스풍의 불상을 제작하면서 외래적 영향이 불상의 탄생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자의 대표 학자 아난다 쿠마라스와미(Ananda Coomaraswamy, 1877~1947)는 불상의 창안에 대한 논의에서 외래적 영향이 지나치게 강조되었음을 비판하면서, 외래 요소에 대한 논의에 앞서 인도 미술 자체의 전개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기원전부터 애정 어린 헌신, 충성을 의미하는 ‘박티(bhakti)’를 바탕으로 나가(nāga), 약샤(yakṣa)와 같은 신들을 숭배하는 관습이 있었고, 이를 형상화한 상(像)과 마투라 지역의 초기 불상이 형식적, 양식적으로 연장선상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발상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안 난 상태인데, 대다수의 학설은 '동시에 만들어졌다'이다. 내가 존경하는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께서도 그러하다.(아래의 책) 다만 나의 개인적 생각은 좀 다르니, 나는 간다라 미술의 영향으로 마투라 미술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러 가지를 떠나 단순히 지리적으로 볼 때도 간다라는 그리스의 영향, 즉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영향권 안에 있었고, 마투라는 그 밖이었다. 아무런 외적 영향 없이 위와 같이 완성된 미술품이 탄생했다는 것을 나는 상상하기 힘들다.  

     

                         

    불교 미술에서는 궁극적으로 철학과 신앙과 예술이 만나게 된다. 이 책은 그 셋을 동시에 만날 수 있게 해 주며, 또한 느끼게도 해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장소의 왈가왈부가 필요 없다. 간다라가 됐건 마투라가 됐건 그 헬레니즘 문화의 정점은 바로 아래 신라 석굴암 본존불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이 석가모니 본존불이야말로 헬레니즘 예술 세계의 지존이요,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이다.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은 유라시아 대륙의 끝 점인 바로 이곳 신라에서 그 방점을 찍었으니, 세상 끝까지 가겠다던 알렉산드로스의 의지는 결국 실현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석굴암 석가모니 본존불은 헬레니즘 예술의 최고 걸작품이요, 그 불상의 시선이 머무는 감포 앞바다는 알렉산드로스 원정의 종착점이다. 

                

     

    일본 작가가 찍은 석굴암 사진이다. 지금 석굴암은 일반인 촬영이 금지돼 있다.
    말했다시피 지금 석굴암은 빛과 열에 의한 훼손을 막는다는 취지로써 일반인의 촬영을 막고 있다. 까닭에 이런 사진을 담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금지 조항은 내국인에만 적용되는 것인지 얼마 전 석굴암을 답사했을 때 한 외국인이 사진은 물론 동영상까지 담고 있었다. 물론 유리벽 밖에서였다. 이에 나도 덩달아 카메라를 들이댔다가 상주하고 있는 관리자로부터 곧장 제재와 면박을 당해야 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에의 역차별이라니.....
    그것을 수긍할 수 없어 막무가내로 셔터를 눌러 운 좋게 위 사진을 한 장을 건질 수 있었다. 내가 보기는 전체가 유리로 막혀 있어 빛이나 열에 의한 훼손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만, 정 그렇다 하면 일반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노 플래시의 조건에서라도 사진 촬영이 허가돼야 한다. 가뜩이나 유리로 막혀 있어 좁은 공간에서의 수박 겉핥기식의 관람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차제에 말이거니와 우리나라 박물관, 혹은 문화재 관리 일에 종사하는 분들은 너무 딱딱거려 보기 불편하다. 그 또한 관리(官吏)라고 힘을 주는 겐가?
    이 석굴암 사진들은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굳이 올려 본 것이다. 여행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은 추억하고 두고두고 감상하기 위함일 게다. 하지만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석굴암에 있어서는 누구나 이 따위 변형된 겉모습 밖에 담아 올 수밖에 없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게다가 그 답사길이 우천에 감행된 힘든 여정이었음을 이 흐린 사진이 말해준다) 그 같은 석굴암의 입장료는 무려 5천원으로 불국사와 더불어 가장 비싸다. 과연 우리나라 1호 세계문화유산답다.
    석굴암 부조 중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11면 관음보살상은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도록으로밖에 만날 수 없다. 석굴암을 만든 천재 건축가 김대성이 이 불상을  본존불의 바로 뒤 편에 위치시켜 주실 후면의 허전함을 상쇄시키는  절묘한 구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까닭에 아무리 용을 써도 유리벽을 통해서는 이 작품은 볼 재간이 없는 바,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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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