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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의 막장 드라마 '카놋사의 굴욕'(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2. 4. 21:56


    1084년, 로마에 입성한 하인리히 4세는 성대한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어찌보면 차라리 다행이랄까, 산탄젤로 성에 농성 중인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하인리히 4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보지 못하였다. 그 대관식에서 황제의 관을 씌워준 사람은 하인리히 4세가 옹립한 새 교황 클레멘스 3세였던 바,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속이 터져 죽었거나, 눈이 뒤집혀 죽었을 것이다



       https://i.pinimg.com/736x/24/9e/fd/249efdb6a41e45d1c84b17160b4a3a5a--holy-roman-empire-royal-jewels.jpg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



    하인리히 4세는 이미 어릴 적에 독일 아헨 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관식을 치렀지만, 이날 다시 대관식을 가진 것은 이제는 자신이 온 천하의 왕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서 그 소문을 들어지만, 의외로 덤덤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그런 문제보다도 제 살 길을 뚫어야 하는 절박함이 눈 앞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노르만 군대의 유입 덕분에 겨우 살 길을 찾긴 했으나, 결국 그 때문에 망명지인 살레르노에서 죽고 말았다. 앞서 말한대로 노르만 군대와 그 용병인 사라센 군대의 무차별한 약탈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틸데는 달랐다. 그녀는 독일 반 황제파 제후들의 영지를 전전하면서도 로마의 상황에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며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복수를 궁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왔던 바, 새 교황 클레멘스 3세에 대한 로마 시민의 반대 기류를 포착한 것이었다. 로마 시민은 노르만의 군대를 끌어들인 그레고리우스 7세를 추방했지만, 이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옹립된 새 교황 클레멘스 3세에 대해서도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로마에서는 다른 새로운 인물을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는데, 1805년 뒤(독일의 제후들)가 걱정된 하인리히 4세가 떠나자마자 추기경들은 빅토리우스 3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마틸데의 생애'에 소개된 마틸데의 근황


     

      "됐어. 이번에는 이 자를 꼬셔 하인리히 가문에 복수해보자. 비록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 7세의 속명)를 만날 때보다는 나이 먹었지만, 내 미모는 아직 건재하거든."

     

    당시 바바리아의 뉘른베르크 성에 칩거하고 있던 마틸데는 이렇게 결심하고 말을 달려 로마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운빨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던 듯하였으니, 소기의 목적이 성사되기 직전 하인리히 4세의 지지자들에 의해 새 교황 빅토리우스 3세가 폐위되고 만 것이었다. 이에 빅토리우스 3세는 자신이 수도원장으로 있던 몬테카지노로 되돌아갔고, 마틸데 역시 터벅터벅 바바리아로 되돌아와야 했다. 


    빅토리우스 3세는 그 이듬해인 1087년 3월,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교황이 되었고, 이에 마틸데도 다시 로마로 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운이 따르지 않았던 바, 그해 8월 새 교황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교황파와 황제파와의 싸움, 자신의 지원자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사라센 용병과의 알력 등에서 얻게 된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인 듯하였다. 그는 결국 사라센 용병의 근거지인 아프리카 튀니지에 군대를 보내 그들을 궤멸시켰지만 그 보람도 없이 죽고 만 것이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뭐 이리 되는 게 없남?"

    다시 바바리아로 돌아오던 마틸데가 말 위에서 이렇게 되뇌었다. 사실 그럴만도 한 것이 뭔가 될 만하면 자꾸 일이 꼬이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그저 한 가지 다행이라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새 장가를 가느라 분주한 통에(1087년 조강지처 베르타가 죽었으므로) 자신에 대한 감시망이 느긋해져 이렇게나마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일뿐이랄까.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파울로 파리나티가 그린 마틸데



    사실 하인리히 4세는 과거 독일 제후들이 일방적으로 정해 주었던 베르타와의 결혼을 못마땅해 했었다.(이에 보름스에서 열린 제후회의에서 자신의 결혼 해소를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독일 제후의 딸들을 마다하고 멀리 러시아 키에프 공국의 공녀 에우프락시아를 새 부인으로 맞았다. 에우프락시아 물욕과 명예욕이 강한 여자로서, 젊은 그녀가 나이 많은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청혼을 거부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지만, 그들의 궁합까지 맞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에우프락시아의 초상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자리는 당연히 에우프락시아의 사치욕과 명예욕을 충족시켰다. 궁전에서는 그녀를 위한 화려한 축하연이 거의 매일 벌어졌는데, 그녀에게는 아직 자신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황제의 어쩔 수 없는 나이에서 오는 말하기 힘든 바로 그 문제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가까이 있는 한 젊은 남자를 눈에 담았다. 바로 황제의 아들 콘라드였다. 눈이 맞은 두 젊은 육체는 곧장 불타올랐고, 말한대로 젊디 젊은 육체였던 바, 그 불장난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허-. 즐겁기는 한데, 몹시 불안하구먼."

    에우프락시아를 만나고 오던 콘라드가 혼자 중얼거렸다. 철없는 에우프락시아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지만 아들인 콘라드로서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길이 커지면 금새 주위에서 알아차리게 될 터, 새 어머니인 에우프락시아와의 불장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될 날은 사실 시간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지금 중단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콘라드는 그 같은 불암감을 억지로 누르며 제 처소로 돌아왔는데, 야밤의 어두운 처소에서 웬 낯선 중년 여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토스카나의 마틸데였으니, 콘라드를 마주한 그녀는 대뜸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당신이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버리고 내 편이 되어준다면 내 토스카나의 영토를 모두 내어주고, 토스카나, 롬바르디아 전토와 교황령의 일부를 기반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이 되게 만들어주겠소. 당신이 에우프락시아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뿐일게요."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으며, 에우프락시아의 명예욕 또한 꿰뚫고 있는 듯한 마틸데의 제안이었다. 콘라드는 귀가 솔깃하였으나 그렇다고 이제는 떠돌이 망명객에 불과한 마틸데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을 노릇인 터, 보다 신빙성이 실릴 만한 무엇을 요구했는데, 이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지금 로마에서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우르바누스 2세가 새 교황으로 올랐소. 아다시피 그는 하인리히 황제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오. 나는 그동안 그가 교황이 되도록 은밀히 도왔는데, 결국 제위에 올랐소. 이제 그가 기반을 갖추는대로 당신의 아버지 하인리히 황제는 다시 파문을 당하게 될 것이며, 독일은 재차 내란에 휩싸일 것이오. 만일 콘라드 당신이 그 내란의 선봉에 서 준다면 당신은 이탈리아의 왕은 물론 독일의 황제까지 겸하는 진정한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게 될 것이오."


    그녀의 조력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우르바누스 2세가 새 교황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1088년 3월 12일)  그는 로마의 역대 교황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물일 터, 훗날 십자군 운동을 제창해(우선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힘을 약화시키고 교황권에 대한 관심을 돌리게 하려고) 수 백년 간 온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간, 인류 역사상 가장 우매한 짓을 벌인 바로 그자였다. 




     프랑스 클레르몽 페랑 대성당에 있는 우르바누스 2세의 동상



    마틸데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지금 바바리아 공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소. 그리고 곧 교황의 중매로 바바리아의 후계자 벨프 5세와 결혼하게 될 것이오. 그러면 나는 그의 힘을 빌려 교황과 함께 황제를 칠 것이오. 나의 꿈은 오직 당신의 아버지 하인리히 황제를 거꾸러뜨리는 것인즉, 그후에는 그저 바바리아의 왕비로 여생을 마칠 것이오."


    그녀의 황제에 대한 복수심은 이미 카놋사 성에서 증명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행보를 보면, 복수가 끝나게 되면 자신은 이탈리아의 영토를 포기하고 바바리아의 왕비로만 지내겠다는 말도 꽤 설득력이 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바바리아 공국은 강력한 친(親) 황제국이었고, 무엇보다 그녀에 비해 26살이나 어린 벨프 5세와의 결혼이 성사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부호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콘라드는 내심 흔들렸지만 키 포인트인 결혼이 불가능해 보였던 바, 다음과 같은 말을 끝으로 마틸데를 돌려보냈다. 


      "바바리아의 소공자 벨프 5세는 올해 17살인 걸로 알고 있소. 당신이 과거와 같은 토스카나의 백작이라면 혹 모를까, 그 결혼은 성사되기 힘들 것 같소."


    하지만 콘라드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으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지원에 힘입은 마틸데의 결혼은 결국 성사되었다.(1089년) 이후 마틸데는 어린 신랑을 어르고 뺨치며 하인리히 황제 반대파의 앞장을 서게 만들었다.(벨프 5세는 엄마 같은 마틸데를 두려워 하여 밤마다 도망쳐 다녔다 하는데, 결국 6년 뒤인 1095년 이혼한다. 또 그녀는 훗날 교황 우르바누스 2세를 꼬드겨서 십자군 운동을 일으키게도 만드는데, 영국이 이를 반대하자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름을 꼬드겨 결국 영국왕 리차드 1세를 십자군의 선봉에 세운다. 좌우지간 남자 후리는 기술만큼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감이다) 



    마틸데를 아내로 맞는 벨프 5세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콘라드가 먼저 손을 내밀어 마틸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094년 그녀의 예언대로 하인리히 4세가 우르바누스 2세에게 파문당하자(하인리히 4세로서는 무려 3번째의 파문이었다)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情婦)인 에우프락시아는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권좌를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욕심에 노골적으로 콘라드를 도왔다. 하지만 이미 산전수전 다 치른 하인리히 4세였던 바, 쉽사리 당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민병대를 직접 이끌고 반란의 거점인 뉘른베르크 성을 선제 공격해 함락시키고, 이어 마틸데가 거병한 토스카나로 재차 쳐들어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준비가 단단했던 마틸데였으니, 황제의 군대를 밀라노와 크레모나에서 격파하여 더 이상의 남진을 막았다. 콘라드는 전투에서 패했지만 마틸데는 다행히도 선방하였던 바, 자신의 세력을 크게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다. 독일로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즉각 콘라드를 후계자 자리에서 폐하고 아들과 에우프락시아를 붙잡아 각각 다른 장소로 유배 보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일찌감치 하인리히 5세로 봉해 새로운 후계자로 삼았다. 이에 내전은 싱겁게 정리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뒤에는 아직 마틸데가 살아 있었고, 그녀의 복수심 또한 건재했다. 마틸데는 이번에는 하인리히 5세를 꼬드겼다. 교황의 파문과 제후들의 반란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고하고 강력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가 유혹의 미끼였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하인리히 5세는 자신의 형 콘라드와는 달리 내부로부터의 공격을 감행하였으니, 제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급습해 슈파이어 성에 연금시켰다.(1105년 12월 31일) 

     

    그리고 하인리히 4세 민병대와의 전투에서 독일 제후 연합군을 이끌고 나가 승리하였던 바, 이제 신성로마제국은 하인리히 5세의 세상이 되었다. 아버지 하인리히 4세는 백성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독일 북쪽으로 가던 도중 급사하며 그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 1106년 8월 7일의 저녁 무렵으로 그때 나이 56세였다. 



    하인리히 4세와 그 아들 하인리히 5세의 싸움을 그린 판화. 왕관을 쓴 두 명의 왕이 등장한다. 

     

     

    황제가 된 하인리히 5세는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로트링겐 등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변경을 공고히 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제후군들을 뺑뺑이 돌려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려는 목적도 겸비한 것이었다.(원정에서 돌아온 그는 1110년 영국왕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약혼을 하고 1114년 결혼한다) 그리고는 앞으로도 화근이 될 충분한 여지가 남은 여자, 토스카나의 마틸데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1111년, 그는 이탈리아 전투에서 토스카나 군대를 연파하고 마틸데를 다시 토스카나 땅에서 밀어냈으며, 그 여세를 몰아 로마로 진군, 교황으로부터 성직자 임명권을 빼앗았다. 


    그는 1117년 8월 7일, 하인리히 4세의 기일에 슈파이어 성에서 아버지에 대한 추도식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굵은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 눈물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부왕에 대한 미안함은 담겼었으리라. 그리고 1122년, 로마 교황 칼리스투스 2세와 저 유명한 보름스 협약을 체결, 성직자 임명권을 교황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만년에 네덜란드에 원정하여 프랑스와도 한판 붙었는데, 십자군 전쟁 통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독일의 왕이며 이탈리아의 왕이며 브루고뉴의 왕'이라는 긴 명칭도 얻었는데, 로마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황제의 명칭 앞에 '신성한(Holy)'이란 호칭이 붙은 때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그는 1125년 죽었으며 그의 묘소는 하인리히 4세가 묻힌 슈파이어 성, 아버지의 묘소 곁에 마련되었다.(그는 후사가 없었던 바, 신성로마제국의 잘리에르 왕조는 끝이 났는데, 공교롭게도 후계 황제의 자리는 교회의 지지를 얻은 그의 정적 로타르 3세가 차지한다)

    関連画像

    스파이어 성 안에 있는 하인리히 5세의 관.(독일의 장례 풍습은 매우 검약해 보인다)



    마틸데는 하인리히 5세의 유화 정책 속에 토스카나의 카놋사 성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성에서 조용히 살다가 1115년 7월 24일, 6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유언으로 토스카나의 영지를 모두 교황에게 바쳤으나 교황권이 신장되는 것을 경계한  하인리히 5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녀의 묘소는 카놋사 성 내에 마련되었으나 100년 후 이웃 나라 레기오의 침입으로 파괴될 위기에 몰리자 교황청의 지하로 옮겨져 안장되게 되었던 바, 앞에서 소개한 바로 그 묘소이다. 사후,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여러 명 나타났으나 공식적으로는 그녀 역시 후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matilde tombs」の画像検索結果

    바티칸 성당 지하의 마틸데 무덤을 다시 한번 소개한다.(그 화려함이 정적이던 하인리히 가문의 묘소와 대비된다)



     * 사진 및 그림의 출저: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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