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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이름의 유래와 이슬람의 진출)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 07:55


    지브로올터(Gibraltar) 해협은 지중해와 대서양을 이어주는 좁은 관문으로 10Km라는 짧은 거리를  두고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마주한다. 지브로올터라는 지명은 아라비아어 '지바 울 타리크'에서 비롯되었으니 곧 타리크의 바위라는 의미이다. 타리크는 아프리카로부터 이 해헙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위치한 지역)를 점령한 사라센 제국의 장수로서, 필시 배 위에서 아래의 바위를 본 이슬람 사람들이 그 이름을 갖다 붙였으리라. 





    지브로올터 해협의 사진과 위치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후예들이 세운 이슬람 공동체(일명 사라센 제국)에 대해서는 앞서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에서 언급된 바 있다. 고구려의 유장(遺將)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아랍 땅으로 진출해오자 사라센 제국의 이란 총독 아브 무슬림은 자신의 부하 장수 지야드 이븐 살리흐로 하여금 10만 대군으로 고선지 부대와 맞서 싸우게 하는데, 이때 2만 5천 명의 고선지 부대는 크게 패하고 만다.(751년) 이는 동서양 대군의 최초의 전투라는 역사적 의미 외에 중국의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I)' 참조)


    여기서 잠시 사라센 제국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서기 632년 무함마드의 사후 그가 만든 이슬람 공동체는 유럽에서 사라센(아라비아 남부 지명)이라 불렸는데, 곧 놀라운 신앙적 폭발력을 발휘하며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의 진출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635년 다마스쿠스 정복을 필두로 638년 예루살렘, 640년 시리아, 639~641년 이집트까지를 불과 10년도 안 돼 점령하였는데, 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이란과 중앙 아시아, 서쪽으로는 리비아와 모로코까지 뻗어나갔다. 



     사라센 제국의 확장



    이러한 이슬람인의 정복 활동에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라 하여 폭력적인 면이 강조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관대하였으며 점령지의 민족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자에게는 세금을 감면해주는 감세정책 등을 앞세워 포교하였던 바, 순식간에 많은 개종자를 이끌어 낼 수가 있었다. 아울러 전쟁 고아와 미망인들도 적극 보호하였으니 우리에게 일견 미개한 듯 비쳐지는 저들의 일부다처(一夫多妻)제도 실은 이와 같은 보호정책의 일환이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라는 말은 13세기 십자군 원정 말기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기 위해 유명한 신학자요 스콜라 학파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만들어낸 명언(?)이라고 한다.(정수일 저 '이슬람 문명' P.30) 이슬람의 경전 '꾸란'(Quran)은 '읽다'(Qara'a)라는 단어에서 말로, 알라의 계시를 적은 책이다. '꾸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이 삽입돼 있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나 본질적으로 폭력을 종용하거나 방조하는 내용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라센 제국은 탈라스 전투에 앞서 유럽제국과도 한판 붙은 적이 있다. 사라센 제국은 세상의 지배권을 놓고 문자 그대로의 좌충우돌을 감행한 셈인데, 이번에도 그들은 크게 이겼다. 다만 이번에는 영토의 확장이나 포교 보다는 약탈에 더 목적이 있었던 듯 보이나, 아무튼 사라센 제국의 북아프리카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Musa Ibn Nusayr)의 부하 타리크 이븐 지야드(Tariq Ibn Ziyad)가 이끄는 7천 명의 사라센 군은 바다를 건너 가 서(西)고트의 왕 로드리고가 이끄는 3만 대군을 그야말로 뭉개버렸다. 


    이 전투가 711년의 과달레테(Guadalete) 전투인데, 탈라스 전투와 더불어 세계사의 분수령이 된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이 전투에 대해서는 사료가 부족하고 또 각 사료마다의 기록도 달라 정확한 위치와 동원된 군사의 수를 확인하기 힘들다. 중론은 타리크의 군사는 7천~1만 명 선, 서고트 왕국의 군사는 2~3만 명 선으로, 혹자는 로드리고가 각지의 귀족들과 함께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기록하였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자면 믿기 힘든 숫자이다. 분명한 점은 과달레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스페인 남단이고, 이후 타리크는 승승장구하여 코르도바와 수도 톨레도, 그리고 북단의 아스토르가를 차례로 함락시켰다는 사실인 바, 아래의 지도를 신뢰해도 무방할 듯하다. 


    또한 즈음하여 과달레테의 승전 소식에 고무된 무사 이븐 누사이르도 1만 8천의 병력을 이끌고 안랄루스에 상류하여 세비야와 메리다를 점령하고(그 두 곳에서 제법 고전하긴 했지만), 이어 포르투칼 지역에 아들인 아드 알-아지드를 보내 그곳에서 저항하는 서고트 세력의 잔여 세력들을 정벌하였다. 이후 그는 타리크의 군대와 합세하여 사라고사와 오비에도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의 프랑스 땅까지 진출하였던 바, 끝까지 저항한 북쪽 산간의 일부 기독교 세력을 제외하고는 이베리아 반도 전역은 모두 이슬람의 손에 넘어가버리고 말았다.(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은 서고트의 박해를 피하려는 목적에 이슬람 세력의 열렬한 환영자요 지지자로서 활약했다) 


    ~ 정확한 숫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종합해보면 타리크와 무사가 이끄는 군사는 다 합쳐도 3만 명을 넘지 못했다. 이는 분명 소수의 군사로서, 그들의 목적이 점령이 아니라 약탈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들을 상대한 서고트 왕국의 군사들이 너무도 쉽게 무너졌던 바, 침입의 목적이 점령으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 소수의 군사에 이베리아 반도가 점령된 것을 대부분 의아히 여기지만, 그보다는 먼저 서고트 왕국의 허약한 군사력을 짚어봐야 될 것 같다. 서고트 족은 톨레도를 수도로 정착한 507년 이후 이렇다 할 전쟁이 없는 평화분위기가 지속되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니, 이는 조선 건국 후 200년 간 평화가 지속되다 일격을 당한 임진왜란과도 비교될 수 있다.



       과달레테 전투 및 타리크와 무사의 진로


       

       타리크의 지브로올터 상륙과 과달레테 전투를 기념해 발행한 영국 우표

       (다음 회에 설명이 있겠지만 지금 지브로올터는 영국령이다)


     

      과달레테 전투를 묘사한 그림

     


    이후 이들은 스페인 각지에서 약탈한 어마어마한 전리품과 함께 당시 사라센 제국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로 금의환향했지만,(715년 경) 앞서 말한 탈라스 전투의 영웅 아브 무슬림처럼 그 결말이 좋지 않았다. 당시 무사 총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칼리프 알-왈리드는 불행히도 병석이었고,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생 슐레이만 이븐 압드 알-말리크는 무사의 세력 확산을 두려워 해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이에 결국 무사는 과거 알- 왈디드의 귀환 명령을 무시했다는 등의 죄로 삭탈관직되어 병사하였고, 타리크도 이후의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던 바, 그 역시 좋은 결말을 맺은 것 같지는 않다. 


    당시 무사의 아들 아드 알-아지드는 서고트 왕 로드리고의 딸인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여(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알-안달루스(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식 호칭)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느닷없는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이것이 슐레이만의 소행임은 역사의 기록이 없어도 알 일이다) 그리고 그의 목은 소금에 절여져 다마스쿠스로 보내졌는데, 칼리프 슐레이만이 공개 석상에서 그 목을 내보이며 '누구의 것인지 알겠는가' 물었다는 일화와, 지목을 받은 무사가 '무함마드의 신봉자이자 칼리프 알-왈리드(슐레이만의 부왕)의 영원한 충신이었던 내 아들의 것'이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잔인하면서도 뭔가 장엄한 분위기가 풍긴다)


    이들의 사후에도 이슬람의 유럽 공략은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732년에는 프랑스 서부 지방인 투르와 푸아티에까지 진출하였는데, 카를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 제후 연합군은 그곳에서 이슬람 대군을 격파, 유럽대륙에의 더 이상의 이슬람화를 막았다. 이 역사적 전투를 일컬어 '로마제국 멸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세계사를 바꾼 조우(遭遇)'라고 표현했는데, 잘 됐다는 뜻인지 안 됐다는 뜻인지 지금도 저의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저 이슬람의 진출을 막는 데 만족했을 뿐, 유럽의 기독교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까지 회복할 힘은 없었던 바, 스페인과 포르투칼 지역은 향후 약 800년간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이곳에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는 이슬람의 서(西)우마이야 왕조가 세워지며(755년) 서부 이슬람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구가하였던 바, 스페인 기독교 세력의 레콩퀴스타(고토 회복운동)로 인해 1492년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반도의 이슬람은 지속되었다.(그때가 바로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므로 이슬람은 유럽 대륙에 어지간히 오래 붙어 있었던 셈이다) 


    ~영화 '엘 시드(EL SID)'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로서, 주인공이었던 찰턴 헤스턴은 이제는 고인이 됐고 영화도 고전의 반열에 오른지 오래지만, 가끔 TV에서 방영되는 이 영화는 지금 보아도 여전히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아무튼 이때 이슬람인이 남긴 코르도바 메스키타 사원과 알함브라 궁전 등은 1984년 스페인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등, 스페인을 최고의 문화 유적 국가로 만들어 줘 지금껏 관광산업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스페인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현재 46개로 이탈리아, 중국과 더불어 세계 Top 3이다. 우리나라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비롯한 12개로 준수한 편인데, 얼마 전 서울시가 한양 도성을 무리하게 등재시키려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등재 불가'라는 망신을 당했다.(대신 2018년 유명 사찰을 묶어 등재시켰고, 2019년에 다시 유명 서원을 묶어 등재시키는 '짜내기'에 성공했다. 이로써 한국의 세계문화유산은 총 14개소로 각 18개 씩의 그리스와 터키에 버금가게 되었다)


    ~스페인은 영어식 표현이고 그들은 에스파냐(Espan͂a)로 적고 에스빠냐로 발음한다. 미국에서는 스페인계 남미 사람들을 히스패닉(Hispanic)이라 부르는데, 스페인, 에스파냐(혹은 에스파니아), 히스패닉 등은 모두 고대 로마어인 히스파니아(Hispania)가 어원이며, 그 말은 본시 페니키아어 '이-스판-냐' 즉 '금속을 녹이는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한다. 페니키아인들이 이곳에서 금을 채취했음이다.




    엘 시드의 동상

    스페인 고토 회복의 영웅 로드리고 디아즈는 훗날 성웅 '엘 시드'로 추앙받으며 고향 브루고사를 비롯한 곳곳에 동상이 세워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히스패닉 지역에 세워진 엘 시드의 동상


     영화 '엘 시드'의 포스터


    영화 '엘 시드'의 마지막 전투 장면 

    그는 발렌시아의 왕이 돼 달라는 부하들의 청을 거부하고 스페인 국왕 알폰소 6세의 충신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영화에서는 화살을 맞고 사경에 든 로드리고가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이슬람 벤 요세프와의 마지막 전투에 참전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알함브라 궁전의  야경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불려지기도 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 선율로서도 유명한데, 스페인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이 궁전을 구경한 후 감명을 받아 작곡한 곡이라 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야네스(안뜰)

    스페인 땅의 마지막 이슬람 왕 보압딜은 이곳을 떠나며 '그라나다를 잃은 것보다 알함브라 궁전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여하튼 이런저런 이유로 이 궁전은 현재 스페인 최고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 '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항해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짐.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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