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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I)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17. 10. 26. 00:46

     

    종이는 중국 후한(後漢) 시대의 환관 채륜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한서” ‘채륜전’에는 ‘105년, 채륜이 여러 방법을 시도한 끝에 황제에게 종이를 바쳤다. 황제는 그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고 앞으로는 채륜의 방법으로 종이를 만들도록 명했다. 이때 채륜이 만든 종이를 세인들은 채후지(蔡侯紙)라고 불렀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중국의 종이는 이보다 200년 정도 앞서 발명됐고, 채륜은 기존의 종이를 보다 얇고 견고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채후지일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20세기 고고학자들의 발굴 결과, 전한(前漢) 무제(기원전 140~84) 때의 고대 종이가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종이가 757년, 사라센 제국의 영토인 사마르칸트에서 재현된 것이었으니, 뽕나무를 비롯한 두 세 가지 나무의 섬유질과 넝마 같은 것을 원료로 해, 삶고 짓이긴 후, 펴 만들었다고 한다. 이 같은 제지법은 중국의 펄프화된 면지(綿紙)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서, 바로 이 기술이 바그다드를 거쳐 유럽까지 건너가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의 유럽에는 종이가 없었을까? 한마디로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겠으나 정확히 말하자면 ‘제지법을 몰랐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무튼 유럽인들은 종이를 만들어 낼 수 없었으니 이들의 자체 생산은 이후로도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유럽은 여전히 양피지나 염소피지, 혹은 송아지피지였다.

     

                                  

    http://4.bp.blogspot.com/-MoBc25JvMTc/UiXBpvbz9_I/AAAAAAAAcLs/EL75zxEi9x4/s400/palimpsest-syriac-codex.jpg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성서

    물 피지가 부족하거나 값비쌀 때 필기자는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쓴 글씨를 지우고 다시 쓰게 되는데, 이를 팔림프레스트라 한다. 그리스어인 palin(다시)과 psao(매끄럽게 문지르다)에서 비롯된 말로서, 유럽 사회에서는 종이가 전래되기 전인 중세 이후까지 이 짓을 하였다. 재료로써 우유나 귀리 가루를 문질렀다 하며, 보는 바와 같이 처음에 써졌던 글씨가 바탕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종이가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넌 것은 12세기 말, 이후 독일 마르틴 루터의 손에 들어가 로마 교황청에 대한 반박문을 쓰기까지는 그 후로 또 300년이 걸렸다. 이것이 이 글의 주제인즉, 이때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종이와, 막 출발한 인쇄술 덕분에 루터는 자신의 생각을 대중에 전달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1517년의 일이니, 탈라스 전에서 고선지 장군이 패하고 700년이 지나서야 종이는 유럽 사회에서 대중화됐고, 그로 인해 종교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7년도, 70년도 아닌 700년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바꿔 우리나라로 오자면, 탈라스 전투가 있었던 751년은 통일신라에서는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이 완공된 해였다. 그때 탑에 봉안한 불교 경전이 지난 1966년의 중수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저 서역과 유럽 제국들이 종이의 존재조차 몰랐던 시절, 이미 신라인은 종이의 제조를 넘어 종이에 인쇄물까지 찍어내고 있었던 바, 당대 신라의 문화와 기술이 얼마나 첨단적이고 선진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최근 이 경전에서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때 만들어진 한자가 발견됐다고 해서 그 제작 시기를 조금 늦춰 잡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57년 사마르칸트에서 만들어진 종이는 단박에 이슬람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에 자극받아 795년에는 압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 대규모 제지공장이 건립되었는데, 사마르칸트 지에 감명 받은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재위 786~809)의 칙령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 시기가 이슬람 압바스 왕조의 황금기로서 바그다드의 문화 수준은 가히 세계 최고였으니, 종이 보급에 따른 학구심의 진작은 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서민들까지 글을 배워 종이에 남기고자 하는 양속(良俗)을 낳았다. 저 유명한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는 이 같은 사조의 산물로서, 알 라시드 왕 자체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헬레니즘 · 로마 시대의 인문 고전과 철학서는 물론이요 과학서적까지도 발간되었던 바, 중세 유럽의 학자들마저도 그리스 로마를 연구함에 있어서는 아랍의 책을 빌려야 했다.  그것은 과학도 마찬가지였으니 알코올, 알칼리, 알게브라(대수학), 벤조인(위장결석) 등의 단어도 모두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특이하게는, 유럽 제국의 특허 단어일 것이라 생각되는 admiral(함대 사령관)도 어원은 아랍어였다. 이것은 그들의 먼 항해에의 방증일 터, 실제로 동방 끝자락의 통일신라가 황금의 이상향으로서 소개된 책이 전해지니, 경주에 있는 원성왕(재위 783~798)릉과 흥덕왕(재위 826~836)릉에 낯선 서역인 상(像)이 서 있는 것이나 계림로에서 동로마 계의 황금 보검이 발견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못될 터이다.

     

     

    1154년 발간된 지리학자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의 세계 지도. 거꾸로 돌려보면 세계가 보인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신라. 지도 알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 지도 속의 70개 지역 세분도 중의 일부.남해 섬을 거쳐 신라에 도착한 까닭에(혹은 그렇게 들은 까닭에) 많은 섬들이 표현됐으나 '실라(신라)'라고 하는 지명 표시가 뚜렷하다. 책에서 그대로 옮겨온 부분이므로 거꾸로 돌려보면 이해가 편하다.  

     

     

    아랍인의 형상으로 유명한 원성왕릉의 동·서 무인상 
     흥덕왕릉의 아랍인 상
        경주 구정동 무덤 돌에 새겨진 아랍인 상 

    ~ 위 아랍인은 폴로 경기 스틱을 들고 있는데, 최근 발견된 '쿠쉬나메'라는 이란 고대 서사시를 보면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유민과 신라인들이 폴로 경기를 하는 내용이 등장한다.(격구라는 스포츠가 페르시아에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쿠쉬나메'는 11세기 이란에서 만들어진 서사시로, 7세기 경 사라센 제국의 침입으로 멸망된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민들이 신라로 들어왔다는 내용과, 그 유민 지도자인 아비틴이 신라의 공주와 결혼한 내용, 그리고 그 사이에 난 아들 파리둔 왕자가 군대를 이끌고 사라센으로 가 사라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쿠쉬나메'의 원본은 브리시티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구정동 방형분 화살 표시가 된 곳에 아랍인 상 돌이 있었다.(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9세기 경, 제지술은 다마스쿠스에 이르렀고, 1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이집트의 카이로에, 중엽에는 알렉산드리아에 다다랐으며, 11세기 초에는 아프리카 북쪽의 도시 페스까지 전래되었다. 12세기 초, 제지술은 드디어 바다를 건너게 되니, 당시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아랍인(무어인)에 의해서였다. 그리하여 1150년, 스페인 하티바(지금의 발렌시아)에 제지공장이 세워지니 이것이 유럽 최초의 제지공장이었다.

     

    이어 1189년 프랑스 에로(Herault)에 스페인의 기술 원조에 힘입은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때부터 종이의 대규모 생산이 이루어졌으니 프랑스는 곧 중세 최대의 제지공업국이 되었다. 만들어지기는 스페인이 먼저였으나 스페인의 기술은 그곳에서의 아랍 세력의 철수와 함께 쇠퇴하였고, 대신 그들에게서 기술을 배운 프랑스가 수혜국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나라에의 전파에는 인색하였던 듯, 이웃나라 영국과 독일에는 14세기에 들어서야 제지술이 전파되었는데,(런던 1309년, 뉘른베르크 1319년) 더욱 먼 북구 제국과 신대륙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오슬로가 1550년, 필라델피아가 1650년인데, 캐나다는 1803년에야 비로소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종이 기술의 전파 경로

     

    이탈리아의 제지술은 기존의 유럽 루트가 아닌 터키와 시칠리아로부터 따로 전래된 경우이니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가 아랍의 제지술을 배워 돌아왔다. 그리하여 1276년에 세워진 몬테파노(지금의 파브리아노) 제지공장의 유럽시장 점유율은 한때 스페인과 프랑스를 압도하기도 하였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유럽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사병도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를 하였으니, 흑사병으로 죽은 자들(기록상으로 유럽 전 인구의 1/3)의 옷과 버려진 옷들, 즉 넝마(Rag)가 이용된 레그 제지술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1319년, 독일에도 제지술이 상륙했으니 신성로마제국의 자치 도시였던 뉘른베르크에 최초로 종이 공장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독일에서도 종이가 차츰 일반에게까지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앞서도 언급이 있었거니와 그 최고 수혜자는 마르틴 루터였다. 1517년, 당시 로마 교황청의 부정(면죄부 판매와 성직 거래 등)과 싸우던 루터는 궁리 끝에 자신의 주장 95개를 종이에 써 비텐베르그성(城) 교회의 문 앞에 내걸었다. 그리고 이 '95개조의 반박문'은 지사(志士)들의 공분(公憤)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때맞춰 보급된 종이와 인쇄술에 힘입어 순식간에 독일 및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바,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드디어 기존 종교에의 개혁이 요구되게 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전단지의 위력이었다.

     

     

    http://www.christianitytoday.com/images/67500.jpg?w=700

     

    관련 이미지

     마르틴 루터의 초상과 95개조 반박문 

     

     

    여기서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루터의 개혁론에 대해서 따로 지면을 할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단언하거니와, 교황청의 부패가 아무리 극심했다 하더라도, 또 루터의 개혁론이 백번 지당했다 하더라도 탈라스 전투로부터 비롯된 종이의 전래가 없었다면 그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며, 기독교(프로테스탄트)의 발생 또한 매우 더뎠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루터의 목소리가 크고 절절했던들, 종이가 없었다면 그의 주장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었겠으며 아울러 대중들 또한 그의 생각을 어떻게 전달받을 수 있었겠는가?

     

    흔히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중세의 2대 사건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2대 사건의 배후 모두에 탈라스 평원에서의 작은 전투가 숨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종교개혁의 성공에는 주창자인 마르틴 루터,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그, 그리고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탈라스 평원에 이른 고선지라는 3명의 위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필시 억지라거나 해괴한 이론이라고들 여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동급으로, 혹은 종속 관계로 묶는다.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인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종교개혁을 의도하여 인쇄술을 발명하지는 않았을 터, 인쇄술의 상관관계는 '배경'이나 '보완'이다. 인쇄술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중요한 또 한 가지 '배경'과 '보완'은 단연 제지술일 터, 그와 같은 제지술의 전래가 있어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이란 모든 지나간 발자국의 도드라진 흔적이겠으나 그 발자국에 반드시 의도가 담겨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저 탈라스 평원에 이른 고선지의 머릿속에, '이제 머잖아 다른 세계에도 종이가 전해지리라'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처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더 나아가 고구려의 배사법(背射法, Parthian Shot)이 마르틴 루터의 성공 요인이라고도 말하고 싶지만 이제껏 쓴 글이 희화화될 것 같아 재고한다.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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