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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철검 스토리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5. 21. 03:12
예전에 북한산에서 정릉 쪽으로 내려오다 청수장 매표소 앞 두부 전문 음식점에 걸린 탤런트 이계인 씨의 사인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위트 있게도 자신의 이름 앞에 '강철검'이라고 써 놨던 바, 아마도 그가 음식점에 들렀을 때는 국민드라마 '주몽'을 찍고 있을 때이거나 아니면 종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 드라마에서 야철장(冶鐵匠) 모팔모 역으로 열연을 했다.
그때 그가 맡은 임무가 바로 한(漢)나라의 칼에 뒤지지 않은 강철검을 만드는 일이었고, 갖은 실패 끝에 마침내 강철검을 만들어 내 시청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사인에 '강철검'을 닉네임처럼 붙인 것은 그다운 재치를 보인 재미난 발상일 수 있었다.(운전 중 신호위반으로 걸린 그가 면허증 제시를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자신의 이름을 대며 선처를 요구했을 때, 그 경찰관이 "외계인이라도 봐줄 수 없다"고 대답했다는 일화보다는 덜 재미 있지만. 이건 본인이 직접 말한 실화임 ^^)
강철검을 완성한 후 기뻐하는 모팔모
그런데 이 강철검 스토리에는 한가지 큰 오류를 안고 있었다. 동이족(東夷族)의 기술이 중국에 한참 뒤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의도가 '고난을 극복하고 중국에 앞서는 철기 제련술을 개발해 마침내 한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드라마의 도식적 패턴을 좇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역사 왜곡이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대 중국이 한반도보다 문명이 발달됐고 한반도는 그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장했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그리고 작가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드디어 강철검을 완성한 모팔모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중국의 제련술에서 힌트를 얻어 강철검을 만든다.(그렇다면 이건 분명 역사 왜곡이다)
모팔모가 만든 강철검에 아작난 중국산(중국산이 예전이라고 좋았을 리 없다 ^^)
앞서 '하와(夏娃)는 한민족의 조상일 가능성이 더 높다'에서 언급했거니와 1982~1983년, 동이족의 영역이었던 요하(遼河)와 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집단 주거유적인 사해(査海) 유적과 흥륭와(興隆窪) 유적은 자그만치 8200~7600년 전의 것으로서 중국 문명의 뿌리라는 황하문명의 연대에 최소 3천6백년을 앞서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아울러 홍산문명권(기원전 3500년 전 신석기 후기 문명과 청동기 문명까지를 아우르는)에 속한 하가점(夏家店)에서 발견된 청동기는 기원전 2400여년 전의 것으로서 주(周)나라 청동기에 최소 천 년을 앞서는 것이었다.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홍산구의 홍산유적지.
철성분을 많이 함유해 근방의 지명이 적봉(赤峰)과 홍산(紅山)이 됐다. 이곳에서 한민족과의 연관성을 보이는 신석기 후기 유물과 청동기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일본 학자가 그린 요하문명권 지도에서 찾아본 사해, 흥륭와, 하가점 유적
이후 위 요하문명권의 지역에 자리하여 성장한 고조선과 부여와 고구려의 철기 문명 또한 당연히 중국의 그것을 훨씬 앞섰다. 아래의 글은 이종호가 쓴 《한국 7대 불가사의》 〈고구려 개마무사〉에 실려 있는 '중국보다 앞선 우리 민족의 철기문명'에서 발췌한 것으로 충분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닌다.
고고학사에 따르면,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 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도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되어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소아시아의 초기 철기
2007년 우리나라 중앙박물관 특별전에 나들이 온 아르메니아 우라르투 왕국의 철심 박힌 청동검(일본 히로시마 대학 소장)
구리시 '고구려 대장간 마을'
대장간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구려 마을을 재현해놓은 곳으로 <태왕사신기> <바람의 나라> <선덕여왕> <안시성> 등이 촬영됐다.
고구려 대장간
고구려 안악3호분 부월수
'고구려 대장간 마을' 유물전시실의 전시물
아차산 고구려 보루 출토 부월(도끼)
'고구려 대장간 마을' 유물전시실의 전시물
고구려 오회분 4호묘 벽화 속의 대장장이 신과 수레바퀴의 신
대장장이 신 확대
'고구려 대장간 마을'의 재현된 대장간 화덕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며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주철은 쇳물을 주물로 부어 대강의 형태를 만들고 마무리 단조를 통해 얻은 쇠를 말한다. 다량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섭씨 1,535도 이상의 고열을 필요로 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의 문화가 진전되었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뉘었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견해다.
하지만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들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에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 되는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 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철의 화학조성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중국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강철다운 강철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의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진천 석장리 제철용 송풍관
한민족이 질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고조선 영역에서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황해도 운율 일대 노천 철광산이 대표적인 철 생산지로 철제 망치와 징이 출토되었다. 또한 《고광록》에는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청도),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철 생산지가 많다. 오늘날의 무순 일대와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가 철산지로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 연철제품이 발굴되었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주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강철은 기원전 2~1세기에 제련됐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 함유되어 있다. 이 도끼는 탄소가 1% 이상 함유된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음을 보여준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누어지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되었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2001년과 2004년에 아차산 고구려 제4보루에서 출토된 철기를 대상으로 최종택, 박장식 교수가 금속학적 미세 조직을 분석한 결과 연철을 가지고 제련하는 첨단제강법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관강법으로 만든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구리시 아차산 고구려 보루 출토 투구
함께 출토된 칼과 도끼
발굴 후 정비된 아차산 제4보루
신성(고이산성) 입구
고구려는 요하 동쪽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선인 무순에 신성을 쌓았다. 수ㆍ당은 이 신성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고구려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유는 무순(푸순) 지역이 유명한 철 생산지이기 때문이었다.
신성(고이산성) 표석
신성은 둘레 4km의 토성으로 4세기 전연의 모용외, 613년 수나라 왕인공, 645년과 667년 당나라 강하왕, 도종, 이세적과의 전투가 치러졌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무순 안산 제련소
무순 광산은 아직도 중국 산업의 보고이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되어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추론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鎧馬武士)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 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000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더욱 개선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중국은 개마무사가 무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이를 주력군으로 육성하지 않았다.
물론 중국 역사를 통틀어 기병 제도를 전혀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운용한 기병은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나 중국의 용병으로 이민족을 끌어들였을 때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운용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좀 더 근원적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개마무사들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재위 227~248) 조에 동천왕이 보병 2만과 철기병 5천을 이끌고 비류수 전투에서 위나라 군사 3천 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위·촉·오 시절 막강했던 위나라 군사도 고구려 개마군단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무순 신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투구
국립김해박물관의 마구와 갑옷
국립중앙박물관의 삼국시대 갑옷
경주 쪽샘 유적 영문 브로셔
2009년 경주 쪽샘지구 주곽에서 온전한 세트의 마갑과 투구, 목가리개가 출토됐다.
강원도 철령에서 발견된 3세기 고구려 철제 말
'주몽'에 등장하는 한나라 철기병
이처럼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앞선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탄생했음에도 드라마 '주몽'에서는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한나라 철기병이 공포의 대상으로 출현한다.(하지만 철갑기마병이 등장하는 것은 3세기로,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한나라에도 우리나라에도 없었다)
부여가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초강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절절맬 때 중국의 한나라는 철기군을 운용하는 모습은 실제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무시한 채 막연하게 우리 민족은 중국 한족에 비해 문명 수준이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비하의식에서 비롯된 매우 잘못된 발상임을 알 수 있다.(위 이종호의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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