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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일 턱이 없지 않은가?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5. 26. 06:48

     

    내가 사는 구리시는 면적 33㎢로 전국에서 가장 작은 시이다. 하지만 그 작은 시가 '고구려 도시'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있어 언뜻 이율배반적이기도 한데 살펴보면 나름 타당성도 있다. 지난 1989년 구리시 아차산에 산불이 나며 고구려인이 쌓았던 성채(보루)가 드러났고 그로부터 비롯된 수차례의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그리하여 구리시는 대한민국(남한)에서 고구려 유물이 가장 많이 나온 도시가 되었고, 자칭 '고구려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 당시 산불 진화에 동원됐던 김민수라는 사람은 이후 향토사학자가 되어 고구려 유적을 발굴하고 이를 학계에 알렸던 바, 구리시 고구려 도시화의 일등공신이고, 구리시의 마지막 관선 시장이자 3선 민선시장으로 장기 봉사한 박영순 전 시장은 구리시를 '고구려의 도시'로 표방하고 각종 정책을 시행한 마찬가지의 일등공신이다.(이 훈위를 내리고 공신록에 올린 사람은 평범한 일개 구리시민이지만, 시민이란 그 자체로서 자격이 있다 생각하는 바이다 ^^)

     

     

    광개토태왕 동상과 복제비

    구리시청 근방 광개토광장에 건립됐다.

     

     

    구리시의 고구려 도시화 사업은 역대 자치장에 따른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그런대로 잘 이어져 지난 2008년인가는 '고구려 역사관' 건립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에 무슨 야로가 있었는지 몇몇 관계자들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그런 마당에 시장님(안승남)은 시장님대로, 자매결연을 맺은 해군 구축함 광개토대왕함이 퇴역하면 구리시가 인수해 전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혹자는 그 장소가 한강변으로서 구리시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하고, 혹자는 '고구려 역사관' 건립과 연계돼 전시될 것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고구려 역사관' 건립은 아직 첫 삽조차 뜨지 못했는데도.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구축함 광개토대왕함과 제원

     

     

    그래서 나도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관'이라는 데 관심을 갖고 그 조감도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그 순간 문득 웃음이 터졌다. 그것이 중국 집안(集安)시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을 모델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나 이것이 웃을 이유는 못 되었을 터, 아마도 그 위에 지어진 번듯한 기와집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무덤 위에 지어진 집이 무척 우스꽝스러워 보였던지라.....

     

     

    '고구려 역사관' 조감도

    그림 앞에 선 분은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으로 구리시에 살고 계셨던 선생께서는 바쁜 집필 일정 속에서도 '고구려 역사관' 건립에 앞장 섰으나 그 시작도 보지 못하고 올 3월 18일,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음. 뭐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곧 내 생각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고구려 장군총 위에는 원래 사당과 같은 집이 있었다고 하며 일제시대 때의 조사에서 건물의 난간 구멍 자리와 함께 기와장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처음으로 답사해 기록을 남긴 사람은 1905년 일본학자 도리이 쥬로(鳥居龍藏)였고 이어 프랑스 학자 샤반(Chavannes, E)과 도쿄제국대학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교수가 다녀갔는데, '동북아역사넷'의 발간 자료에서는 1913년 세키노 답사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장군총(將軍塚)이라고 알려진 고분은 세키노가 집안을 조사할 때도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고분이었다. 이는 광개토대왕비에서 동북으로 약 13~14정(町) 정도에 위치한다고 적고 있다. 세키노는 장군총의 구조를 꼼꼼히 기술하고 있는데, 장군총에서 다수의 기와를 채집한 사실도 적어 두었다. 현재 일본의 여러 기관에 보관되어 있는 세키노·이마니시 기증의 기와들이 이때 채집되어 일본으로 반출된 것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된다. 이들 기와들이 장군총 위에서 출토되는 현상을 두고 세키노는 고분 내부로 빗물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개묘와'(蓋墓瓦)로 판단하여 기단의 외연을 따라 확인되는 구멍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세키노가 집안을 답사했을 무렵의 장군총  

     

    장군총에서 채집돼 일본으로 반출된 기와. <조선고적도보>

     

     

    세키노는 죽을 때까지 무덤 위에 집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노련한 사학자도 몰랐던 것을 내가 알 리 만무했으니 실소를 터뜨린 것이 무지의 소치는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이후 나는 이 건축물이 장수왕의 무덤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바, 무덤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때문에 세키노는 수많은 기와장을 확인하고도 가옥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니 그것들은 봉토와 석실의 빗물를 막는 '개묘와'라 여겼던 것이며, 까닭에 봉분 위의 기둥 자국들 또한 기와와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그 건축물이 장수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생각한 이유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상식과도 같은 단순한 지식으로부터였다. 다름아닌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취해 427년 수도를 국내서에서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다닐 때 이렇게 배우면서, 배우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나 이것이 드넓은 만주 땅을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여운이 배어나게 만든 바로 그 사건인데, 아무튼 그렇다면 장수왕은 평양에서 죽었을 터, 고도(故都)인 국내성으로 운구되어 묻힐 까닭이 전혀 없었다.

     

    ~ 장수왕은 33살인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후 64년을 장수하다 97년을 일기로 별세한다. 그래서 장수왕인데, (피라미드를 조성한 이집트 파라오처럼 예외의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자신의 재위 말엽이나 사후에 능묘가 조성된다. 이렇게 볼 때 장수왕이 국내성에 가서 묻힐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매우 상식적인 생각으로서, 상식을 뒤집기 위해서는 대단히 특별한 비상식적인 사건이 뒤따라야 하지만 역사에는 그만한 사건이 없고, 늦게나마 실제적으로 백제 침공이 이루어지게 되는 바, 오히려 평양 장지(葬地)의 당위성을 찾게 된다.

     

     

    장군총

    장수왕의 무덤으로 오인되고 있는 무덤으로 청나 말기부터 군분(将军坟)으로 불렸고 장군총의 명칭은 일본인 학자 도리이가 제 식으로 변형시킨 말이다. 중국에서의 정식 명칭은 우산하(禹山下)1호분이다.

     

    그렇다면 국내성 장군총은 누구의 무덤일까? 여기저기 뒤적거린 결과 두 가지 대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첫번 째는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이며 (기존의 개토대왕릉이라고 알려진) 태왕릉은 고국양왕의 무덤일 것"이라는 한밭대 공석구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각 무덤에서 출토된 와당을 근거로 광개토대왕이 묻힌 무덤이 태왕릉이 아니라 장군총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폈던 바, 그 증거로써 태왕릉과 장군총과 천추총에서 출토된 와당을 비교 분석한 결과를 내놓았다.

     

    ~ 그는 먼저 집안시에 있는 또 다른 고구려 고분인 천추총을 광개토대왕이 개·보수했다고 보았다. 천추총에서 광개토대왕의 생전 연호 '永樂(영락)'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또 천추총에서 함께 출토된 이파리 6개짜리 연화문 와당의 제작시기 역시 광개토대왕 때라고 보았다. 광개토대왕이 천추총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영락' 명문 기와와 이 와당을 함께 제작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공 교수는 기와에 등장하는 ‘未(미)’자를 간지로 보고, 제작 시점을 광개토대왕 재위 17년인 407년(정미년)이라 추정했다.

     

    문제는 태왕릉에서도 이 와당과 문양의 구성 방식 등이 거의 같은 판박이 형태의 연화문 와당이 출토됐다는 점이다. 그는 이에 대해 "천추총과 태왕릉은 비슷한 시기 개·보수되었고, 태왕릉 역시 광개토대왕 시절인 '영락' 연간에 개·보수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태왕릉은 광개토왕릉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왕의 사후, 장지 마련을 위해 왕릉이 건설됐다고 볼 때 살아있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무덤을 개·보수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므로) 대신 공 교수는 태왕릉에 묻힌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의 선대왕인 고국양왕일 것이라고 보았다.

     

     

    태왕릉

    태왕릉이라는 명칭은 이 무덤에서 발견된 벽돌에 새겨진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태왕의 능이 산처럼 굳건하기를 바람)'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로 인해 광개토대왕릉 설이 생겨나게 되었다.

     

    위 태왕릉에 앞선 사진

    무덤 떼가 자라기 전의 사진으로, 석축으로 몸체를 쌓고 석실을 만든 후 잡석으로 마감한 형태를 살필 수 있다.

     

    천추총

    태왕릉과 같은 묘제의 무덤으로 한 변의 길이가 85m에 이르는 국내성 무덤군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태왕릉, 211호 무덤과 함께 빅3를 이룬다. 

     

    천추총에 앞선 사진

    몸체 석축과 석축 버팀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쪽은 태왕릉, 오른쪽은 장군총의 와당

    태왕릉과 장군총에서는 모두 이파리 8개짜리 연화문 와당이 출토됐다. 이 둘은 거의 같은 시기의 것으로 짐작되므로 장수왕이 아버지의 무덤인 장군총의 축조와 할아버지의 무덤인 태왕릉의 개·보수에 이 와당을 함께 썼다고 볼 수 있다. 공석구 교수의 주장을 따르자면 이와 같은 연유로써 장군총의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 된다.

     

     

     

    두번 째는, "장군총은 동명성왕(=주몽)의 무덤이자 사당"이라는 동국대 윤명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과감하게도 장군총을 고구려의 시조묘로 본 것인데 그 근거로써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의 기록을 들었다. "고구려는 700여 년 동안 최소한 세 군데 수도를 두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에는 놀랍게도 세 번째 수도인 평양지역의 중화군에 시조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으로 불리는 진파리 10호분이다. 세 번째 수도에 시조묘를 조성했다면 420여 년간 도읍한 국내성에도 반드시 시조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장군총이라는 것이다.

     

    운 교수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광개토대왕릉과 비교하면 이 무덤의 조성에는 큰 공이 들어갔다. 두부 자르듯 올려놓은 돌이 세월과 풍우로 인해 밀려나지 않도록 촘촘히 짜맞추고 아랫돌에는 턱을 만든 후 윗돌을 얹었다. 예사 건축물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면 당연히 주몽의 무덤도 옮겨와야 한다. 시조인 주몽의 무덤은 어떤 무덤보다 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은 주몽의 무덤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 무덤과 달리 돌을 반듯하게 잘라 7층으로 올리고, 그 위에는 제사를 지내는 건물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군총 건축기법의 사진 도해

    '두부 자르듯 올려놓은 돌들이 세월과 풍우로 인해 밀려나지 않도록  촘촘히 짜맞추고 아랫돌에는 턱을 만든 후 윗돌을 얹었다'

     

    뒤쪽에서 본 장군총

     


    고구려의 첫 수도로 알려진 곳은 환인 지역이고, 두 번째는 국내성, 세 번째가 평양 지역이다. 그런데 고구려와 같이 강력하고 자주성이 나라의 천도에 있어서는 시조묘도 옮겨갔을 가능성이 큰 바, 이는 평양에 있는 동명성왕릉이 증명해준다. 여기서 윤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두 번째 수도 국내성에 있던 동명성왕릉은 장군총이 된다. 기존에 있던 무덤을 파서 그 부장물을 이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옮겨간 도읍지에 시조 제사를 지내는 신전을 지었을 것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집안 국내성 장군총의 구조는 이 논리에 매우 부합된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세 건물

    경사는 45도로 상승하며, 몸체와 묘실, 사당이 정확히 3등분된다.

     

    전 형태의 구조를 갖춘 장군총 지역

     

    장군총 제 1배총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평양에 당연히 남아 있어야 할 장수왕의 무덤을 찾아야 할 차례인데 그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사실, 집안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것은 중국인들의 주장에 일본인들이 편을 들어준 것에 불과하고, 평양에는 오래전부터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2기의 무덤이 존재했다. 그 하나가 위에서 말한 전(傳)동명왕릉이고 다른 하나는 '한왕묘'(漢王墓) 혹은 '황제묘'(皇帝墓)로 불렸던 경신리 1호분인데, 이 중 경신리 1호분이 장수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경신리 무덤군은 평안남도 평성시 동남쪽 11km 지점의 대동강 유역에 위치한다. 경신리 1호분은 밑변의 길이 54m, 높이 12m에 이르는 초대형 방형묘로서 석축 위에 잡석과 봉토를 얹었다. 이 무덤은 평양 지역에 조성된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일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된 무덤이기도 하다. 봉분에서는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기와편이 출토되었는데, 그 모양새가 집안의 태왕릉이나 장군총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다. 특히 평양 지역의 봉토분 중에서 와당과 기와가 확인된 것은 경신리 1호분이 유일한데, 이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사당 지붕의 그것이니, 바로 장군총 위에 지어졌던 집의 것과 같은 용도의 기와이다.

     

    이는 장수왕릉이 평양의 시조묘로써 동명성왕릉과 동급의 대접을 받아다 해석할 수 있을 터인데, 만일 전동명왕릉에서 기와의 발견 흔적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면 저 동명성왕릉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의심받아 마땅하다.

     

    * '장수왕의 진짜 능묘는?'으로 이어짐

     

     

    경신리 1호분 전경

     

    널방 북면

     

    봉분에서 수습된 와당과 기와

     

    평양특별시 동명성왕릉

    1994년, 북한이 김일성의 교시로써 단군릉('악마의 문' 인골은 한민족의 조상인가?')과 더불어 대대적으로 개건한 능이다. 동명왕릉은 조선조에도 진짜 무덤으로서의 입지가 확고했고, 1917년 중수 공사는 조선총독 사이토가 참여할 만큼 비중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쩌면 무덤의 주인이 바뀌어야 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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