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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왕의 진짜 능묘는?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0. 5. 28. 06:33

    *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일 턱이 없지 않은가?'에서 이어짐.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래 667년 멸망할 때까지 재위했던 고구려 왕은 20대 장수왕부터 28대 보장왕까지 모두 아홉 명이다. 이 중 마지막 보장왕은 중국으로 끌려가 장안 근방에 묻힌 것으로 기록돼 있는 바,(<구당서>) 북한 지역에 남아 있을 고구려 왕의 능묘는 8기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 장수왕의 평양 천도 시 이전돼 왔을 동명왕릉까지를 생각하면(<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모두 9기가 있어야 한다.

     

    ~ (깜박이 안 키고) 갑자기 끼어들기

     

    그런데 삼국시대 왕릉 중 피장자가 확실히 알려진 능묘는 모두 몇 기나 될까? 잘 모르긴 해도 꽤 될 것 같다. 경주에 있는 이름이 알려진 왕릉만도 손가락과 발가락 모두를 합한 수를 훨씬 넘으니 말이다.(하긴 역대 신라 왕이 총 56명이었으니.....)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중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삼국을 다 합쳐도 피장자가 명확한 능묘는 공주 무령왕릉 정도..... 놀랍지 않나요?

     

     

    경주 무열왕릉과 비석

    수학여행 때 모두 가 보았을 유명한 무덤이다. 능의 전방 좌측에 태종무열왕릉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어 원성왕릉, 흥덕왕릉과 더불어 피장자가 명확한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또한 김인문의 묘와 논쟁을 벌이고 있다.

     

     

    남한에 있는 백제, 신라 왕의 능묘도 이러한 데 북한 땅에 있는 고구려 왕들의 유택을 명확히 챙기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 있어 사실의 여부를 떠나 거두절미하고 소개하려 한다. 카톨릭 대학교 기경량 박사(팟방 '역사공작소'의 기량 쌤? )가 2017년 발표한 논문인데, 옮겨 쓰면 다음과 같다.

     

    다른 무덤들의 묘주는 각각 전(傳) 동명왕릉=문자명왕, 토포리 대총=안장왕, 호남리 사신총=안원왕, 전 동명왕릉 고분군 1호=양원왕, 전 동명왕릉 고분군 9호=평원왕, 강서대묘=영양왕, 강서소묘=영류왕, 강서중묘=대양왕으로 비정하였다. 장지명을 나타내는 왕호와 고분의 입지, 고분의 상대 편년 등을 고려하였다.

     

    그리고 즈음하여 앞서 말한 경신리 1호분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2017년 '한국고대사와 왕릉고고학' 세미나) 그곳에서 출토된 와당(막새기와)과 무덤의 구조, 위치를 근거로 제시했는데, 위치에 대해서는 "경신리 1호분은 대동강이 보이는 산기슭에 있는데, 이러한 입지는 집안 지역 적석총 왕릉과 유사하다"며 "장수왕은 평양 일대에서 자신의 고향과 가장 비슷한 경관을 가진 곳을 선정해 묻혔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역시 와당이다. "경신리 1호분의 특징은 평양 고분 중 드물게 석실 상부에 와당과 기와로 덮은 시설이 있다는 것으로, 집안(集安)시의 왕릉급 고분에서는 와당과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던 바, 경신리 1호분에는 국내성 시기에 만들어진 적석총(돌무지무덤)의 묘제가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보면 그는 이 기와를 빗물 침투 방지용 '개묘와'(蓋墓瓦)'로 여길 뿐 사당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은 듯하나 어찌됐든 경신리 1호분을 장수왕의 무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그런데 경신리 1호분이 장수왕의 묘라는 주장은 같은 해 중원대학교 주홍규 박사도 한 바 있어(<한국사학보> 제68호) 그 옳고 그름을 떠나 과거 노땅 사학자들의 도제식 가르침에서 벗어난 시각 자체가 기쁘기 한량없다. 학문적 특성 때문인지 역사학은 그 고루한 시각이 참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 식의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비상식적인 가르침은 탈피하자는 것이다.

     

    다만 기량 쌤이 경신리 1호분의 봉분 지름이 54m라고 설명한 것을 보면 그는 그 무덤을 조선조의 왕릉과 같은 원형분이라 여긴 듯하나, 국내성의 묘제가 남았다면 내 주장처럼 방형분이 옳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방형분도 기단만을 쌓고 둥글게 봉토를 올렸다면 지름의 개념이 나올 수 있으나 기량 쌤은 아무래도 훗날 변형된 원형분을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아래 사진을 보면 분명 기단 석축의 흔적이 나타나 있어 방형분이 원형분으로 변형된 듯하다. 참고로 장수왕이 평양에 건립했다고 하는 전(傳) 동명왕릉도 방형분이다.

     

     

    경신리 1호분의 기단 석축 흔적

     

     

    일제시대의 경신리 1호분 

    봉분은 원형으로 변했으나 기단 석축의 흔적은 남아 있다.

     

    경신리 1호분 널방 내부 돌문

     

    널방과 널길 그림

    널길은 길이 5m 이상, 폭은 1.5m이고, 이 널길에서 널방 사이에 돌문이 있다. 널방은 동서 3.5m, 남북 3.3m, 높이 3.5m이다.

     

    평양 시내에 위치한 동명왕릉은 1974년 북한 문화재당국이 발굴 조사를 마치고 1994년 대대적으로 개건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등재가 완료된 유적임에도 여전히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 설왕설래되고 있다.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을 몰아부친 까닭인데,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물론 장수왕이다.

     

    능묘의 형식은 장군총과 같은 계단식 적석총에서 봉토석실분으로 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취하고 있어 이 무덤이 평양 천도 초기에 세워진 능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기와 모양은 기단부 한변의 길이 22m, 높이 8.15m인 방형분으로 그리 큰 편은 아닌데, 이 무덤이 장수왕의 능묘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신리 1호분의 기단부 한변의 길이는 54m로 동명왕릉의 2.5배에 달하는 평양 일대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조성 시기가 동시대로 추정되는 두 무덤의 건립에 있어 장수왕의 무덤을 시조묘의 무덤보다 거의 3배나 크게 만들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자면, 현재 남아 있는 기록 중 가장 이른 <제왕운기>(고려말 이승휴의 저작)에는 동명왕의 무덤이 평양 남쪽 용산묘(龍山墓)라고 기록돼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府)의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의 경계 용산(龍山)에 있다고 돼 있는 바, 지금의 동명왕릉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북한학계에서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능묘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유도 능묘가 고구려 안학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그외에도 북한은 1974년 발굴조사 때 일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화려한 연꽃무늬 벽화를 찾아내 무덤의 위상을 격상시켰고(무덤에 벽화가 없어 왕릉급일 수 없다는 일본학자의 주장이 있었으므로) 동명왕릉이 속한 진파리 고분군의 무덤 배치가 동명왕릉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도 주요 판단요인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정릉'(定陵)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편이 무덤 앞 절 터에서 출토된 일이었다. 즉 이 절이 시조묘를 지키는 원찰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음이다.

     

     

    동명왕릉과 정릉사의 위치(그림 오른쪽 하단)

     

    1917년 일제 개건 후의 동명왕릉

     

    복원된 정릉사

     

    1994년 개건된 동명왕릉

     

    개건되기 전의 동명왕릉 원경

    뒤에 보이는 무덤이 진파리 1호분과 3호분이다.

     

    개건되기 전의 동명왕릉

    동명왕릉의 호칭이 생겨난 것은 구한말 고종 때이며 지금의 모양 역시 고종 때 정비된 것이다.

     

    김일성 종합대학 력사학부에서 그린 널방 그림

     

    널방 입구에서 바라본 널방

     

    1974년 발견된 널방 연꽃무늬 벽화

    지름 12cm 가량의 연꽃 100여 개가 발견되었는데 총 640개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널방 천장

     

    진파리 1호분 천장화

     

    강서대묘의 황룡도

    진파리 1호분 및 강서대묘 천장화와 비교해보면 진파리 10호분(전 동명왕릉)이 얼마나 고식(古式)의 능묘인지 알 수 있다.

     

    널방과 널길 그림

    길은 길이 3~3.09m, 폭 1.69m, 높이 1.87m이며, 안으로 들어가며 좁아진다. 널길에서 널방으로 들어가는 곳 문을 달았는데 문턱과 문확만 남아 있다. 널방은 방형평면에 꺾음천정이며, 크기는 동서 4.21m, 남북 4.18m, 높이 3.88m이다. 널방의 벽과 천정에는 연꽃을 그렸다. 

     

     

    하지만 북한이 동명왕릉의 근거로서 주장하고 있는 위의 것들은 장수왕릉의 그것이라 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으며, 경신리 1호분에서 발견된 와당과 기와가 진파리 10호분(현 동명왕릉)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진파리 10호분이 장수왕릉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즉 경신리 1호분이야말로 국내성의 묘제 위에 사당이 세워진 전통적인 시조묘 양식의 동명왕의 무덤이요, 전(傳) 동명왕릉, 즉 진파리 10호분은 수수한 형식을 취한 장수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진파리 10호분의 추정 축조연대는 5세기 말로, 평양에 있는 모든 무덤 중에서 491년 사망한 장수왕의 무덤으로 비정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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