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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17. 10. 26. 00:41
올해가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라 한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 교회 문 앞에 게시하고 그릇된 제도에 대해 토론할 것을 제의했다. 그것이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었다. 그 500주년에 즈음한 오늘, 나는 그 거대한 개혁의 초석이 된 고구려 출신의 한 남자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 이름은 고선지이다.
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의 유장(遺將) 고사계의 아들로, 20세 초반의 나이에 당(唐)나라 유격장군이 되어 당시 당나라의 가장 골칫거리였던 토번국(티벳)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당(大唐) 제국 전선(戰線)에의 화려한 데뷔였다.
이후 그는 740년, 달해부 전투에서 2천 기병을 이끌고 승리하여 중앙 무대에 이름을 올리고, 이후로도 서방 정벌전에 승승장구하며 마침내 747년, 안서사진도호부(安西四鎭都護府)의 도호(절도사)가 되었다. 아무리 당나라가 이른바 오픈 마인드의 국제적 감각을 지닌 제국이었다 하더라도 망국(亡國) 유민(遺民)이 안서사진의 절도사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일부 국역 사서에는 그가 안서도호부의 절도사라고 돼 있으나 안서도호부에서 나뉜 안서사진 도호부의 절도사임)
이를 테면, 그가 파키스탄 북부의 소발륙국(國)을 정복하고 개선했을 때 당시의 절도사였던 부몽영찰이 위계질서 위반의 구실로써 '개똥같은 고구려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사서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가 안서사진 절도사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모욕을 참고 견뎠을까를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
신당서(新唐書) 고선지 열전에는 “고선지는 얼굴이 깨끗하고 수려한 것이 무인(武人)의 용모는 아니었으나,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고, 도량이 넓었으며 일 처리에 민첩하고 용감하며 과단성이 있었다”고 써 있다 망국 유민 출신의 그가 안서절도사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평가에 더도 덜도 아닌,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였을 것이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하자면, 과거의 대제국이었던 로마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을 점령한 후 더 이상 동진을 못한 것은 동방의 신흥강국 파르티아에 번번이 패한 까닭이었다. 저 유명한 폼페이우스의 상승군(常勝軍)이 유프라테스 강의 북쪽까지 진출한 적이 있지만 사실상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왔고,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이끄는 4만 군대가 원정에 나선 것이 그 두 나라의 대표적인 전투가 되겠는데, 로마군은 여기서 겨우 1만 명만 살아 돌아오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후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가 11만 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복수전에 나섰으나 그 역시 군사 2만을 잃고 허겁지겁 되돌아와야 했다.
파르티아 제국 영역도
막강 로마군이 이렇듯 무력했던 것은 파르티아군의 기마술과 궁술에 고전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로마군의 주력은 잘 짜진 군영의 보병이었다. 반면 파르티아는 기병으로서 그들이 말 위에서 쏘아대는 활, 특히 도망을 가면서도 허리를 완전히 돌려 쏘아대는 이른바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에 로마의 보병 군단은 속수무책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로마군이 소수의 파르티아군에 번번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변칙 전술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까닭이었다.
위 ‘파르티안 샷’은 그들이 몽골족의 일파인 훈족에게 배워 온 기술로서, 그것은 누구보다도 고구려 사람들이 잘 하던 마상(馬上) 기법이었던 바, 우리는 저 고구려 벽화에서 이러한 궁술을 익히 접한 적이 있다.
‘파르티안 샷’이 묘사된 고구려 쌍영총 벽화
고구려 고사계 장군의 아들 고선지가 ‘파르티안 샷'에 능했을 것임은 불문가지일 터, 그는 이와 같은 궁술과 마술(馬術),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어쩌면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포용력, 그리고 천성적이었을 ‘날래고 용감하고 과단성 있는’ 성격으로 이방의 땅을 개척하였으며, 나아가 저 파미르 고원과 천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미지(未知)의 땅으로 진출해 나갔던 것이다.
그가 절도사(도호)가 되었던 안서사진도호부는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하는 곳이었을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고토(故土)에 설치되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당나라는 668년 동방의 강국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초대 총독에 설인귀를 임명하고 정복지를 9도독부 42주 100현(縣)으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안동도호부란 명칭은 동쪽을 안정시키고 설치한 통치기관쯤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안서도호부는 당나라의 서쪽 땅에 설치한 통치기관이 될 터인데, 그 관할 영역이 넓어 안서대(大)도호부로 호칭되기도 한다. 안서사진도호부는 안서도호부의 팽창으로 인해 새로이 설치된 관청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서부(西部)인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에 위치하여 중앙 아시아 90여 개 속주를 통치하였다. 안서사진은 귀자, 비사, 소륵, 언기의 4개 도독부로 이루어졌으며, 백제 멸망 후 공주에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것과 비견하면, 도독부는 도호부보다는 작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당제국과 안동·안서도호부
안서사진도호부의 역할은 그 4개 도독부를 관할하며 통치하는 것이었으나, 안동도호부의 경우처럼 머무는 주둔군이 아닌 서쪽으로 진출하는 부대였다. 사진(四鎭)을 더 넓게, 혹은 육진, 팔진, 십진으로 늘리라는 것이었다. 고선지의 군대는 그 임무를 받들어 그야말로 ‘끝없이’ 서진했다. 고선지 군대의 실제적 목적은 실크로드 교역로를 확보하고 장악하는 것이었던 바, 막힘만 없다면 그 종착지인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747년, 고선지는 달해부 원정에 이은 2차 서정(西征)을 시작한다. 귀자를 출발한 그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과 파륵천의 급류를 넘어 토번의 연운보(칸시르)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파키스탄 북쪽, 눈 덮인 힌두쿠시 산맥의 탄구령(다르호트 고개, 해발 4,700m)을 넘어 중앙아시아 소발륙국(지금의 길기트)의 수도 아노월성(城)을 정복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건조한 땅 타슈켄트를 향해 진격한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슬람 제국의 영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는데, 고선지는 길기트 · 타슈켄트 접경에 이르러 이슬람 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교통로인 다리를 파괴하여 이스람의 영향력을 단절시킨 후 본진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홍려경어사중승(鴻豈卿御史中丞)에 올랐으며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 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의 작위를 받는데, 이때 그가 점령한 나라가 대소 72개 국이었다.
749년, 다시 서정에 나선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 너머의 걸사국(치트랄)과 돌기시를 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키는데, 이듬해 걸사국의 반란, 그리고 페르가나와 석국과의 국경 분쟁을 기화로 서정을 이어간다. 750년, 네 번째 원정에 나선 그는 걸사국을 공격해 재 복속시킨 후 계속 서진하여 석국(지금의 타슈켄트)을 점령하고 다시 구국호(지금의 사마르칸트)로 나아간다. 이때 고선지는 석국 전투에서 투르크계 왕인 거비시(車卑施)를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 하에 사로잡는데, 그는 약속대로 석국 왕 부자(父子)를 수도 장안으로 호송시킨다.
고선지가 그들을 장안으로 보냄은 필시 거기서 호의호식하며 생을 마치라는 뜻이었을 터, 하지만 여러 번의 승리에 취해 방만해질 대로 방만해진 당 조정은 석국의 왕을 한낱 패전지장(敗戰之將)으로 취급해 죽여 버리고 만다. 백제가 멸망했을 때 당 고종은 붙잡혀 온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번국(蕃國) 왕의 예우로써 대접했지만, 당시의 황제 현종은 이미 양귀비에 푹 빠져 제대로 된 정무가 불가능했던 즈음이었다.
이것이 고선지에게는 큰 동티가 되었으니, 죽은 석국 왕의 아들이 장안을 탈출해 압바스 왕조의 호라산(지금의 이란) 총독 아브 무슬림에게 당나라 군대의 서진과 부왕(父王)의 죽음을 고변한 것이다. 당시 아브 무슬림은 그 역시 동진(東進)을 위해 이란 동쪽 메르브의 키즈카라 요새에 주둔 중이었는데, 지금 고선지가 진출한 구국호와는 부하라성(城) 하나만을 사이에 둔 지척의 거리였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아브 무슬림은 자국군 및 동맹국에서 징집한 10만의 대군을 조직해 부하 장수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로 하여금 동진하게 만든다.
고선지는 이때 사마르칸트와 동 투르크매니스탄을 정복하고 안서사진의 본진이 있는 귀자도독부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으나, 이슬람 제국의 동진 소식을 듣고 다시 군사를 지휘해 천산산맥을 넘는다. 말하자면 고선지의 5차 원정인 셈이었는데, 751년 7월, 드디어 양국의 대군이 키르기즈 산맥의 남쪽 평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탈라스 강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리게 된다.(탈라스 강이 흐르는 탈라스 평원은 지금도 두 나라-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국경을 이루는데,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강의 상류로 짐작될 뿐 확실치 않다)
“저것이 진짜 서융(西戎, 서쪽 오랑캐)의 군대로군.”
적을 대한 고선지의 담담한 일성(一聲)이었다. 동서 대군의 첫 만남이자 첫 대결이라는 이 스팩터클한 시나리오가 크랭크인되려는 역사적 순간치고는 건조한 일성이었으되, 다만 강 건너 이슬람 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전장에서 지낸 몸이었지만 우선은 낯선 상대였고, 게다가 상대는 족히 10만은 돼 보이는 대군이었다.(이 부분은 소설적으로 묘사해 보았다)
그 끝도 없어 보이는 대군이 그리 넓지 않은 강 너머의 평원에 가득했던 것이었다. 반면 자신의 군대는 2만 5천 정도...... 그렇다고 물러설 그도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해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다시 설명이 있겠으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고선지의 이 어쩔 수 없었던 판단 미스의 순간, 성공이 결정되었다.
활을 누가 먼저 쏘았는지, 강을 누가 먼저 건넜는지 알 수는 없었다. 탈라스 강 일대에서는 곧 물과 땅을 가리지 않은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그것이 멈추고 계속되기가 무려 5일, 강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고 벌판은 시신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는데, 언뜻 당나라의 군사의 것이 더 많은 듯도 보였다. 하지만 아직은 우열을 판단하기 어려울 즈음, 갑자기 고선지 군의 후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맹군이었던 투르크계의 갈라록(葛邏祿, 천산산맥 남쪽의 유목민)이 당을 배신하고 후방을 공격해 온 것이었다. 상황인즉 투르크인 왕 거비시가 참수된 데 대한 응징으로 여겨졌지만, 어찌됐든 뜻하지 않은 전개였다. 고선지는 이 상황에서도 한동안 싸움을 독려했으나 점점 좁혀오는 적들을 상대하기가 힘들어졌다. 얼마 후, 포위에의 위험을 느낀 고선지가 후퇴를 명했다. 이제는 승패의 추가 기울었음이었다.
후퇴의 명령과 동시에 당 나라 군대는 정신없이 도망쳤고, 이들을 갈라록의 군대가 막아서기는 했으나 집요하게 쫓지는 않았다. 이븐 살리흐 또한 대승(大勝)이라는 결과에 만족하며, 미처 달아나지 못한 당 나라 군사들을 전리(戰利)삼아 사마르칸트로 돌아왔다.(사마르칸트는 그 전에 이미 아브 무슬림에 의해 회복된 듯하다)
이것이 훗날 유명해진 동서의 대격돌 탈라스 전투의 전말이다. 여기서 ‘훗날’이라고 한 것은 당시는 동서의 개념이 희박하였던 바, 이 싸움 역시 그 시절의 흔한 전투 중의 하나로 여겨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은 까닭이다.(패전이기 때문일까, 중국 사서에서의 탈라스 전투에의 기록은 미미하다) 그것은 전투 후 양쪽의 대응으로도 알 수 있었으니, 안서사진도호부로 되돌아온 고선지는 대패를 했음에도 아무런 문책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서역 개척의 공로를 인정받아 우우림(右羽林)대장군과 금오대장군이라는 무장 최고의 직위를 받았으며, 다시 정2품격인 밀운군공(密雲郡公)에게 봉해졌다.
호라산 총독 아브 무슬림 역시 본래의 이슬람 영역이었던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를 회복하였을 뿐 그 이상으로 동진하지는 않았다. 다만 천산산맥 일대의 중앙아시아 제국은 기존의 불교권(圈)에서 이슬람권으로 재편되는데, 이는 당나라가 점령지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탈라스 전의 패전으로서 서역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곧이어 터진 안사(安史)의 난이라는 대란에 나라가 휩쓸려가는 바람에 더 이상 서역에 눈을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755년, 불행히도 고선지 장군은 이 난에 연루돼 억울한 죽음을 맞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탈라스 전투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아브 무슬림 역시 그의 세력 확산을 경계한 칼리프 알 만수르에 의해 암살당한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탈라스 전투는 이후로도 400여 년간이나 승자의 역사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것은 전투의 주역이었던 아브 무슬림의 암살과 관계가 깊을 듯하다. 압바스 왕조의 역사에서 아브 무슬림은 반란을 일으키려다 살해당한 반역자 정도로만 취급되었던 바, 그의 전공(戰功)인 탈라스 전투도 묻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앞서 말한 대로 탈라스 전투는 그 후로 완전히 잊혔다가 400년이 훨씬 지난 12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1160~1233)의 “완전한 역사”에 처음으로 조명된다.
이슬람 측 사서에는 고선지 군대가 먼저 강을 건너자 이븐 살리흐가 공격을 개시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후 이슬람 군이 포진을 하며 대치한 상황, 갈라록 군이 당나라 군의 후방 측면을 공격한 상황, 당나라 군이 포위되거나 도망가는 상황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탈라스 전은 오늘 날에 이르러 큰 주목을 받게 된다. 그것은 이 전투가 미친 세계 문명사의 지대한 영향 때문이었으니, 다름 아닌 종이의 서방 전래였다. 이 전투에서 붙잡힌 많은 포로(약 2만 명이라고 전한다) 중에 종이 만드는 기술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757년 사마르칸트에서 저 유명한 '사마르칸트 지(紙)'를 만들어냈는데, 이 중국의 제지법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래된 것이었다.
*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I)'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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