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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항해 시대의 개막)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3. 07:18


    정복자 타리크가 바다를 건너 오기 전 이 해협은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이라 불려왔다. 그 옛날 이곳은 바다가 아니라 아프리카 아틀라스 산맥에 연결되어진 산이었는데, 그 산을 오르기 귀찮았던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괴력으로 산줄기를 끊어버렸다는 신화적 이야기에 근거를 둔 이름이었다. 신화에 따르자면 이에 산은 졸지에 갈라져 바닷물이 흘러들게 되었던 바,  그때 끊어진 산의 흔적이 앞에서 말한 타리크의 바위와 맞은 편 모로코 땅 끝에 위치한 몬테 아쵸(아쵸 산)라 불리는 바위다.







    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그와 같은 전설보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아틸란티스 섬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이라는 책 중의 한 챕터인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지나 큰 파도가 이는 서쪽 바다 속에 리비아(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거대한 섬이 있는데,(이에 지금은 섬이라기보다는 대륙으로 표현한다) 그 속에는 코끼리 등을 비롯한 온갖 동물과 진귀한 과일들이 자라며 땅 속에는 오리칼크(무지개 빛의 전설상의 보석)를 비롯한 귀금속 광물들이 풍부하다'고 기록했다.


    나아가 그는 '그 섬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운하와 항구가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부(富)를 찾아 몰려들었고, 도시 심장부에 있는 궁전과 신전은 금박의 첩탑과 상아의 천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은이며 벽과 기둥은 금과 오리칼크로 장식되었다. 또 신전에는 황금 신상(神像)들이 전사(戰士)의 모습으로 세워져 있는데 그 키가 매우 커서 천장에 닿을 정도다....'라고 썼다. 아울러 '그곳 사람들은 최초에 포세이돈이 제정한 법에 따라 공평한 삶을 영위했는데, 그 결말인즉 어느 날 격렬한 자진과 해일이 일어 단 하루만에 섬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화편"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플라톤이 아니라 자신의 사촌이자 같은 문하인(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리티아스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사실이며 출처는 자신의 증조부 드로피데스로서, 증조부는 그 이야기를 솔론*에게서 들었다'며 신빙성을 강조한다. 그러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소크라테스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데 큰 장점이 있는 대화'였다고 거든다. 



    솔론의 흉상(BC 640~558)

    고대 그리스의 최고 현인으로 칭송받는 인물. 역사학적으로는 당대의 부패를 시정하고 시민의 신분 상승을 꾀했던 '솔론의 개혁'으로 유명하다.



    이쯤되고 보니 후세의 사람들은 이들의 대화에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한마디로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21세기인 요즘도 아틸란티스 대륙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있는 마당이니 딴은 이해도 갈 일이었고, 저 유명한 트로이와 미케네 유적을 발굴한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도 그 출발은 어릴 적 본 동화책 속의 트로이 목마 그림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 속에 나오는 아틸란티스 섬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섬은 가라앉았다지만 근방에 가면 뭐 하나 건질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요행심에서였다. 태생적으로 모험을 좋아하는 그들 유럽인이기도 했다. 



    지브로올터 해협에 설치된 헤라클레스의 기둥 조형물. 해협 건너의 몬테 아쵸와 제벨 무사가 보인다. 


    당시 유럽인이 상상하던 바다 속 아틸란티스.


     

    그들은 그 황금의 대륙을 찾아 헤라클레스의 기둥 밖을 나섰다. 전설상의 거인 아틀라스가 기둥 밖 땅들을 떠받치고 있어 먼 바다로 나가면 떨어져 죽는다 믿고 있는 이들도 있던 때였지만, 그보다는 당장의 부가 시급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먼 바다로, 그리고 그보다도 더 먼 바다로 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이 바로 헤라클레스의 기둥 가까이 살던 포르투칼과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가장 바다 가까이 있었기에 행동 또한 빠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의 이미지.



    하지만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에 관한 역사성이 아니라 아틸란티스 섬에 관한 철학적 접근이었다. 크리티아스가 자신의 이야기에 비중을 두지는 않지만, '아틸란티스 섬 사람들은 점점 부패해졌고 나중에는 탐욕까지 더해져 주변 섬 나라에 대한 전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거대한 함선들을 앞세워 그 나라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는데 그 섬 나라 중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라는 지혜와 예술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국가 아테네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중기갑 기병과 기갑보병을 거느린 아테네는 침략군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아틀란티스는 차츰 쇠퇴했지만 멸망은 그와는 무관했다.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큰 지진과 해일이 아틀란티스 섬을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가라 앉혀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것이 풀 스토리였다. 


    플라톤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당연히 당대 사람들의 부패와 탐욕일 테고, 소크라테스가 그 대화에 끼어든 것도 이를 계고하고자 함이었겠으나, 후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은 안중에 없었으니 그들이 머리 속에는 오직 황금의 이상향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다를 헤매어도 그와 같은 섬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가까운 카나리아 제도는 물론, 먼 아조레스 제도의 많은 섬들 중에서도 플라톤의 대화 속의 잃어버린 대륙의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개중에는 자신이 유토피아*를 꿈꾼 것을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는 그 이상향에 대한 포션이 오히려 더 넓어져갔다. 

     

    * 영국 작가 토머스 모어의 소설 제목으로, '세상에 없는 곳(No-Place)'이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의 세상 보는 눈이 제법 커진 15세기 무렵,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향을 현실에서 찾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항해 시대'의 개막이었는데, 그 첫 단추를 꿴 사람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한 포르투칼의 항해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였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까지의 첫 장거리 항해에 성공한 사람이었는데, 그 뒤를 이은 바스쿠 다 가마는 케이프타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이후로도 2번이나 인도를 항해하였던 바,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 루트를 따라 아시아로 갈 수 있었다. 첫 단추와 둘 째 단추가 아주 잘 꿰진 까닭이었다. 이제 다음 단추를 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희망봉의 위치와 사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아프리카 남단까지의 항해에 성공하고 1488년 5월 귀환길에 이 봉우리를 발견한다.

     

    희망봉

    그는 여기서 심한 폭풍을 겪은 탓에 이곳의 이름을 '폭풍의 곶(Cabo das Tormentas)라 명명했는데, 당시의 국왕 주앙 2세는 향후의 사람들이 항해를 두려워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 이름을 '희망봉(Cabo da Boa Esperanca/Cape of Good Hope)'으로 바꾼다. 

     

    포르투칼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

    바스쿠 다 가마와 그를 후원한 엔리케 왕자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바스쿠 다 가마의 석관

    해외로부터 부를 축적한 포르투칼이 1502년 짓기 시작해 1672년에 완공한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로 남문 입구에는 엔리케의 동상이, 내부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석관이 안치됐다.

     


    이해에 민감한 유럽의 항구 사람들과 달리 아시아의 사람들은 자신들 이방인 상인의 진입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멀리서 찾아 온 친구마냥 환대했다. 이는 원래 이방인들을 손님으로 여기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었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유럽인들에게는 반가운 노릇이었다. 이곳이 비록 자신들이 찾던 황금의 이상향은 아니었으나 유럽 시장에 내다 팔면 돈이 될만한 진귀한 물건들은 존재했다. 당시 유럽인의 입맛을 자극하기 시작했던 후추와 같은 향신료는 그야말로 쌔고도 흔했다. 모험심 앞섰던 이들이 그것들을 가져 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자본이 없는 자들은 총을 들고 뛰어들었으니 당연히 뺏아오고자 하는 마음에서였고, 그나마 그것도 마련하지 못한 자들은 그저 맨몸뚱이로 덤벼들었다. 허드렛 일을 하며 배 밑바닥에서 쪽잠을 자더라도 제 나라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것을 복원한 배를 보면 웬만한 범선이라 해도 그저 거대한 돛에 가려 감춰졌다 뿐, 그 선체 자체는 실로 빈약해서 저걸 타고 어떻게 대양을 항해할 수 있었을까, 의아하게 여겨질 정도다. 이에 큰 파도나 풍랑을 만나 부숴지거나 좌초되는 일도 빈번했으리라 여겨지는데, 그와 같은 배를 타고 나간 이들 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 또한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저들의 속담에 '전쟁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을 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저들은 분명 항해를 어렵고 위험한 일로 여겼던 듯하다. 이에 그 목적이야 어찌됐든 신세계를 향한 저들의 진취적 용기와 모험심은 먼저 인정해줘야 될 것 같은데, 훗날 '미지의 나라 조선'이라는 말만 듣고 우리나라와의 교역을 위해 'Corea호'라는 네덜란드 상선이 제조되었던 일을 보더라도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저들 유럽인의 기상이 읽혀진다.(일본 나가사키를 왕래하던 자국 상인들로부터 '조선은 쌀 외에는 별 다른 교역 상품이 없는 가난한 나라'라는 비관적 소식을 들은 까닭에 비록 출항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지만.....)


    기실 목숨을 건 그 길고 먼 항해보다는 걸어서라도 아시아로 가고 싶은 것이 그들 스페인과 포르투칼인의 마음이었지만 앞서 말한대로 그 길은 오스만 투르크라는 사나운 나라가 막고 있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드라큘라 백작의 억울한 누명 1, 2' 참조)싫든 좋든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로는 멀리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가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으니 그보다는 훨씬 가까운 신대륙이 더 좋은 타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 사람들은 아시안인들보다 훨씬 더 무지하고 양순하였던 바, 아무 거나 유럽의 물건들을 던져주고 거기 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오면 그만이었다. 막무가내 꼴똥 피사로가 가져온 황금같은 것을 가져오면 더 말할나위가 없겠지만 그건 거기서도 귀한 물건인 바, 멕시코의 은(銀)은 꿩 대신 닭이 됐고, 한 번 맛보면 끊기 힘들다는 담배는 그야말로 돈이 됐다. 자본이 좀 있는 자들 중에는 아예 구리와 주석 같은 광산을 개발해 떼돈을 벌어가며 지역의 왕 노릇을 하는 자까지 생겨났다. 


    콜럼부스라는 신대륙의 발견 자는 이후 카리브해 연안을 2차례나 더 탐험하며 갖다 팔 물건이 없나 눈을 부릅뜨고 다녔는데, 종국에는 그곳의 원주민을 데려다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영국의 흑인 사냥꾼들에 앞선 노예상의 원조였다. 콜럼부스는 더 큰 욕심에 스페인 국왕에게 자신이 개척한 식민지의 전권을 달라고 졸라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대신 요구한 식민지에의 지분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 같은 욕심으로 인해 그 말년은 매우 불행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신앙심은 깊었으니, 자신이 첫 항해 때 발견한 신대륙의 섬에 '엘살바도르(구세주)'라는 이름을 붙였고, 2차 탐험 때인 일요일에 발견한 섬을 '도미니카(안식일)'라 했으며(정작 자신은 쉬지도 않았으면서), 3차 탐험 때 발견한 세 봉우리가 연속된 ⋀⋀⋀ 이러한 모습의 산을 보고는 '트리니다스(토바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트리니다스(Trinitas),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다만 유럽인의 호‧불호(好‧不好)의 차이일 뿐 신대륙의 모든 것은 돈이 되었다. 국가에서도 그들의 행위를 말릴 이유가 없었을 터, 스페인에서는 자신들의 국기에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을 새겨넣어 그 기둥을 빠져나가 돈을 벌어오라 홍보하였을 뿐 아니라 아예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강조한 화폐를 발행하기까지 하였다. 과거 마젤란이 남미 대륙을 따라 항해할 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래서 자신의 일기에 '몬테 비데오(산이 보였다)'라는 한 줄 글을 써 자신의 불안하고 착잡한 심정을 표현했지만, 지금의 사람들에게서는 그와 같은 불안감 따위는 찾아보려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더불어 양심 또한 찾을 길이 없었던 바, 남의 땅을 마치 제 땅인 양 차고 앉아 이것 저것 가져오라 명령을 해대었다. 예전에는 그나마 뭐라도 주며 을러댔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왕실 문양과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그린 스페인 국기 

     

      

    십자가와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새겨넣은 당대의 스페인 주화. 당대 스페인의 영향력으로 신대륙에서도 통용된 이 화폐는 이후 미국 달러 표시에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달러를 말할 때 쓰는 불(弗)은 아래 달러 모양의 차용인 바,(그 비슷한 모양새로 인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입식(入植)돼버렸다. 


     

    가상 화폐 비트코인의 이미지에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입식됐다. 


    마젤란의 초상과 그의 세계일주 항해도 

    포르투칼의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은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의 필리핀까지 갔으나 막탄 섬에서 부락민과 싸우다 죽고 그의 부하들만 인도양과 희망봉을 돌아 출발지인 스페인 산루칼 항으로 귀환한다.

     

    마젤란의 초상과 그의 세계일주 항해도 

    비록 마젤란은 오지 못했지만 부하 선원들은 돌아왔던 바, 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를 기화로 필리핀의 존재를 알게 된 스페인은 이후 군대를 파견해 복속시키는데, 필리핀이라는 국호는 당시의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됐다. 스페인은 이후 19세기 말까지 300년 간 그곳을 지배한다.  



    불과 몇 십 년까지만 해도 이슬람 제국에 시달리던 이베리아 반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유럽의 강국으로서 자리잡았던 바, 특히 스페인은 유럽 여러나라의 내정까지 간섭하고, 아르마다라는 무적의 함대를 앞세워 지중해와 대서양의 바다를 제 집 앞마냥 휩쓸고 다녔다. 그러다 1588년 8월 8일(외우기 쉬운 날짜인지라.....) 결국은 네덜란드 앞 바다에서 영국의 함선에게 깨지고 만다. 그동안 축적된 부를 앞세워 중남미의 식민지는 물론 아시아 태평양를 호령하고, 한때는 유럽의 나라들까지 들었다 놨다 하던 스페인 제국의 영광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스페인을 대신해 유럽의 강자로 떠오른 나라는 아르마다를 격파한 나라 영국이었다. 이후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이라는, 어쩌다보니 전 유럽의 국가가 모두 참가하게 된 이 전쟁에서의 승자의 권리를 이용해 스페인 본토 내에 있는 아주 작은 반도 지역을 요구하였다. 바로 헤라클레스의 기둥, 즉 지브로올터 해협이었다. 훗날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였을 때, 별로 한 것도 없는 러시아가 오직 청국과 영불연합군을 중재했다는 댓가로 청국으로부터 연해주 그 큰 땅을 얻어낸 것을 보면, 또 아편전쟁 후 영국이 청국으로부터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뺏어낸 훗날의 예(例)에 비추어보자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의 영국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겨우 면적 5.8 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한 아주 작은 땅 덩어리였다. 그들은 과연 왜 그랬을까?  





    * '지브로올터 해협에 관한 이야기(대영 제국이 시작되다)'로 이어짐.


    * 그림과 사진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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