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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의 막장 드라마 '카놋사의 굴욕'(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7. 11. 2. 04:41

     

    '카놋사의 굴욕'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익히 들어온 이야기다. 그 내용인즉슨 아래의 그림과 같다. 

     

     

    교과서 삽화 

     

    이를 좀 더 보완하자면, '당시 유럽 최강의 권력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자 임명 권한을 두고 싸우다 파문당하고, 결국 카놋사 성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3일간 자신의 죄를 빌어 겨우 파문의 철회시킨 사건으로, 중세 교황의 권력이 황제의 권력을 누르는 계기가 된 역사적인 사건' 쯤이 우리가 기억하는 카놋사의 스토리다. 그래서 그 사건인즉 언필칭 '굴욕'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의 것은 올바른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틀린 내용은 아닌 바, 사건이 일어난 1075년부터 그레고리우스 교황이 죽은 1085년까지 적어도 10년은 그러했다. 아니, 사실 이것도 너무 길게 잡은 것이니 그 반절인 5년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당장 위기에 몰린 하인리히 황제는 위의 그림과 같이(위 그림은 다시 설명하기로 하겠다), 좀 더 리얼하게는 아래와 같이 눈 덮인 카놋사 성 앞에서 처자식을 대동한 채 무려 사흘이나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빌지만

     

    위의 그림 못지않게 유명한 삽화 / 하인리히 4세 옆에 서 있는 사람이 황후 베르타이고 그녀가 손을 잡고 있는 아이가 훗날 아버지와 싸우게 되는 장남 콘라드이며, 그 위 창문에서 시시덕거리는 사람이 그레고리우스 7세와 정부 마틸데이다. 비교적 사실에 충실한 그림이나, 다만 하인리히 4세가 늙은이로 그려진 것은 맞지 않으니 그는 당시 26세의 청춘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굴육은 아주 잠깐이었고(당장은 견디기 힘들었겠지만), 결국은 와신상담 끝에 복수에 성공하니, 난공불락의 요새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간 그레고리우스를 장장 4년이나 공격하여 결국은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이탈리아 남부의 오지에서 죽게 만들어 버린다. 결국 승자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아닌 하인리히 4세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산탄젤로 성 / 보기에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원어로 Castle Sant' Angelo.

     

     

    정적이었던 교황도 죽었으니 그후 하인리히 4세는 명실공히 '신성하고 로마스러우며 제국다운(Holy Roman Empire)'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천수를 누렸어야 옳았을 터, 하지만 그의 권좌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니, 불행하게도 두 아들의 배신을 겪게 되고 결국 급사하고 만다. 위 삽화에서 그의 부인 베르타가 안고 있는 아기와 옆에 선 아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아울러 이상의 스토리 속에는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들이 다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최고위 성직자와 미망인과의 사련(邪戀),

     

    아들과 새 어머니와의 간통,

     

    아버지와 아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아니, 소위 막장 드라마로 지탄받는 연속극이라 해도 이와 같은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물론 작가는 쓰고 싶겠지만). 그런데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는 이와 같은 요소가 연속으로 등장한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라 불리는 안방 극장물이 지탄을 받으면서도 시청률이 높은 이유는 단 하나, 재미가 있어서이다. 방금 말했듯 이 '카놋사의 굴욕' 속에는 막장적 요소가 가득한 바, 만일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이 재미가 없다면 그건 전적으로 글쓴이의 책임 이리라. 

     

    나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려하는데, 먼저 이 스토리의 배경이 되는 카놋사 성의 성주는 누구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보자. 그 성의 주인은 뜻밖에도 아래와 같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틸데(영어로는 Matilda of Tuscany)였다. 

     

     

    성 베드로 성당 지하무덤의 마틸데 조각상 /  오른쪽에는 몽둥이, 왼쪽에는 교황의 관모와 천국의 열쇠를 들고 서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녀는 예수의 애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와 거의 동급인데, 실제로 그녀의 무덤은 베드로의 무덤과 지척이다. 바로크 시대의 조각가 로렌조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함께 교황권을 수호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뜻이겠지만 과하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아무튼 그녀는 성 베드로 성당 지하무덤에 묻힌 유일한 여성이다.
    마틸데를 그린 일러스트 컷 / 오른손에는 칼, 왼 손에는 망토를 움켜쥔 강렬한 모습이다. 일명 '롬바르디아(평원)의 전사들'이라고 불렸던 토스카나 군사들은 출전에 앞서 늘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마틸데와 성 베드로를 위하여!"    
    현대적 이미지의 한 이탈리아 여성도 마틸데의 이미지 모델로 등장했다.

     

    우선 이 매력적인 여인의 전력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그녀가 이 막장 드라마의 실제적인 주인공이기 때문이니, 그러기 위해서는 마틸데의 영토 토스카나 왕국부터 살펴보자. 보다시피 토스카나 왕국은 신성로마제국과 교황령의 영토 사이에 위치한, 말하자면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나라였다. 우리에게는 같은 이름의 피혁 제품으로 귀에 익숙한 지방이다. 

     

     

    토스카나 왕국의 영역 

     

    그런데 그 위로는 과거의 화려했던 로마제국의 영광을 꿈꾸는 독일 황제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수시로 영토 확장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마틸데의 아버지인 토스카나 백작이 사냥 중에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고, 이에 신성로마제국을 비롯한 주변의 나라들이 토스카나의 땅을 노리게 되었다. 그러자 아직 어린 세 자녀를 둔 토스카나 백작 부인 베아드리체는 자신의 친척인 로렌 땅의 영주 고두프루아를 새 남편으로 맞이했다. 수염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나름 효웅으로서, 그자라면 토스카나 땅을 여하히 보존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격노했다. 자신이 침 발라 놓은 토스카나 땅을 듣보잡 고두프루아가 쉽게 꿀꺽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두프루아는 이번 일을 기화로 야심을 드러내며 주변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가기 시작했던 바, 하인리히 3세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1055년 하인리히 3세는 드디어 대군을 동원해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하인리히의 대군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고두프루아는 일찌감치 제 고향 로렌으로 도망쳐 버렸고, 베아드리체는 어린 아들 및 두 딸과 함께 사로잡혔다. 피렌체에서 열린 승전 연회장에 거지 옷을 입고 나선 베아드리체는 하인리히 3세에게 제 남편 고두프루아가 점령한 땅들을 바친 후 기존 토스카나 영지에의 보존을 애원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으니, 하인리히 3세는 마틸데의 두 동생을 카놋사 성에 연금시키고 베아드리체와 마틸데를 볼모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얼마 후 마틸데는 두 동생의 의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는 바,(말로는 병으로 죽었다지만) 이에 절치부심하며 복수를 맹세한다. 훗날 그녀가 자신의 복수에 교황권의 힘을 빌린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유럽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맞설 사람은 교황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신성로마제국 영토

     

    하인리히 3세의 치세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사실 마틸데의 복수심은 그저 평생의 분노로서 끝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하인리히 3세가 돌연 급사하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4가 황위를 계승하는데, 그때 나이 불과 여섯 살이었다. 이에 그의 어머니 아그네스가 섭정을 하게 되자 이를 기회로 로렌으로 도망갔던 고두프루아가 돌아와 아그네스와 협상을 벌인 끝에 마틸데와 어미 베아드리체는 풀려나 귀향하게 되었다. 자신의 가족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자신의 친구인 플랑드르의 백작 등과 함께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겠다는 협박과, 새로운 황제 하인리히 4세에 대해 영원히 충성하겠다는 강온 양면책이 먹힌 것이었으니, 외교력은 제법이었던 고두프루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고두프루아 역시 1069년 돌연 암살되었다. 충분히 배후가 의심되는 죽음이었지만 베아드리체로서는 이제는 달리 하소연할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녀가 의지하고 하소연할 곳은 오직 제 딸 마틸데뿐일 터, 이에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데는 더욱더 하인리히 가문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으로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였다. 

     

    마틸데는 계부 고두프루아의 유언에 따라 그의 아들이자 의붓오빠인 고두프루아 4세와 결혼을 하였다. 그렇지 유감스럽게도 그 아들은 교활했던 아비 고두프루아와 달리 유약한 초식남으로서(꼽추였다는 말도 있다) 마틸데의 복수심과 권력욕을 만족시켜줄 위인이 못되었다. 그녀로서는 제 자신이 직접 칼을 뽑아 들고 북진하고 싶었지만(그래서 팔루다 출신의 아루두이노라는 직업군인을 교관으로 삼아 혹독한 군사 훈련도 받았지만) 그러기에는 팔이 여전히 가늘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가녀린 팔뚝을 원망하던 마틸데는 문득 자신이 무척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틸데는 자신의 미모를 복수의 칼 대신 사용할 것을 결심하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자신의 복수를 대신해줄 다른 남자를 찾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 다른 남자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자신의 영지 바로 남쪽에 있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청빈 청렴의 대명사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사 출신으로 교황이 된 후에는 교회를 개혁시키고(성직 매매의 금지와 성직자의 결혼 금지 등과 같은), 황제와는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고 있는 패기 있는 사내였다.

     

     

    ISdN - Matilda of Canossa 2 by laether-mad

     

     

    '청빈한 수도사 출신의 교황이라고? 언뜻 이빨도 안 들어갈 거라 생각되겠지만 이런 자들이 오히려 쉬운 법이지. 나 같은 미인은 고사하고 여자조차 안아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야. 교황이고 황제고 간에 남자란 다 같은 법이거든. 게다가 그자는 이곳 토스카나 출신이니 만나보면 통하는 무엇이 있을 게야.' 

     

    마틸데는 자신이 구상하고 또 직접 나서기까지 하는 이 미인계가 자못 기특하고 짜릿하게 여겨졌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이미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던 바, 그녀로서는 남편이라고 하는 존재부터 치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이 거추장스러운 존재의 제거도 교황의 손에 맡기기로 마음먹었으니, 바티칸의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자신의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지금처럼 가정법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역사상으로 무슨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것처럼 마틸데의 이혼은 쉽고 빠르게 결정되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은 생후 몇 개월도  안 돼 죽고 말았던 바, 흔히 빚어지는 양육권의 문제도 없었고 재산권 분할 소송도 없었다. 남편 고두프루아 4세는 제 영지인 로렌을 소유하면 되고 토스카나 영지는 원래대로 마틸데가 소유하면 그만이었다. 

     

    끝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던 그녀의 남편은 자신은 물론 그 어머니까지 나서 바티칸에 읍소했으나, 무슨 까닭인지(사실 까닭이 따로 있었겠냐만은) 교황의 판결은 끝내 돌이켜지지 않았다.(그녀의 남편 고두프루아 4세는 이에 분개해 훗날 벌어진 교황과 황제와의 싸움에서 하인리히 황제의 편에 서게 되나 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을 죽음을 당한다)

     

    이제 거리낄게 없어진 마틸데는 정식으로 교황을 자신의 카놋사 성으로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이후 교황은 뻔질나게 카놋사 성을 드나들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이 결정된 것도 그즈음이었다.(1076년 2월 22일)  교황의 성직자 임명권을 반대한 황제에 대한 징계라는 것이 파문의 이유였다. 중세 시대의 파문이란 곧 교회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던 바, 황제고 뭐고 간에 아무런 실권이 없는 존재로 추락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앞서도 말했듯 당시는 예수가 전부인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었다.(*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 I참조)     

     

    그렇다면 이쯤에서 파문의 단초가 된 성직자 임명권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그것은 주요 도시의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에 대한 임명권을 교황이 갖느냐, 황제가 갖느냐 하는 것으로서,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의 긴 싸움도 그 발단은 공석이 된 밀라노 대주교의 임명에 관한 일이었다. 

     

    ~나는 이전에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교황과 황제가 왜 싸우는가, 그 임명권에는 대체 어떤 실익이 걸려 있는 것인가 궁금했었는데, 최근 몇 번의 대통령 선거를 경험하며 알게 됐다. 동네 교회의 목사나 신부가 설교 중에 뱉는 좌편향 · 우편향의 설교가 신도들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경험상으로 보자면 목사님은 대개 우편향, 신부님들은 대개 좌편향인데, 좌우야 어찌 됐든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신도들에게 주입, 혹은 강요하는 일은 절대 지양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 그렇게 정치에 관여하고 싶다면 차라리 출마를 하시라!)

     

    하인리히 4세기 파문당하자 가장 득의만면한 사람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이었다. 그 이유는 뻔한 것이었으니 이제 자신들도 황제가 될 기회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은 제후들의 발호로써 준내전 상태에 돌입하였고, 이를 제압할 수 없었던 하인리히 4세는 우선 슈파이어(Spires) 성으로 도망쳐 장기 농성에 들어갔지만 그것이 답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짐을 깨달은 하인리히 4세는 그해 12월, 아내 베르타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몰래 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 덮인 알프스의 몽스니 고개를 넘어 토스카나의 카놋사 성에 이르렀다.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자신의 잘못을 빌어 파문을 철회시키고자 함이었다.(1077년 1월 21일)

     

     

    하인리히 4세가 농성한 슈파이어 성 /  바이에른의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함께 미국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된 꿈의 궁전이지만 하인리히 4세에게는 악몽의 성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하인리히 4세가 카놋사 성 앞에서 맨 발로 눈밭에 서서 잘못을 빌은 날은 무려 사흘. 알프스의 바람과 혹독한 추위가 절정에 달한 그 엄동설한 속에서 수도사의 옷만을 걸친 채 맨 발로써 3일 간을 버텨야 했던 하인리히 4세의 괴로움이야 오죽했으랴. 하지만 카놋사 성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는데, 그의 아내 베르타와 어린아이들까지 문 앞에 서고 나서야 마침내 성 문이 열렸다. 드디어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된 황제는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마틸데 백작에게 그야말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파문령은 겨우 철회될 수 있었다.  

     

     

    http://image.yes24.com/images/chyes24/3/6/6/7/3667aa293c5c42984c665754f23a7586.jpg

    삽화 해설

    앞에서도 소개한 이 그림은 12세기 초 베네딕트 교단의 수도사 도니조(Donizo)가 쓴 '마틸데의 생애(The Vita Mathidis)'에 수록돼 있으며,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나오는 익숙한 그림으로, 가운데 왕관을 쓰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하인리히 4세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 성 안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은 일견 그레고리우스 교황으로 생각되지만, 그가 아닌 토스카나 백작 마틸데이다. 하인리히 4세의 생사여탈권이 사실상 마틸데에게 달려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왼쪽에 크게 그려져 있는 수도사 복장의 사람이 그레고리우스일까? 아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장 후고로서, 이 일의 중재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마틸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에게 싹싹 빌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그레고리우스가 클뤼니 수도원 출신임을 감안하면 상황이 쉽게 이해되는데, 그림이 말하는 내용인즉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이 일에 별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황제는 겨우 독일로, 즉 자신의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국내의 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져 있었다. 그가 없는 사이에 제후들은 황제의 매형이자 슈바벤의 공작인 루돌프를 대립왕( 對立王 Gegenkὅnig)으로 내세웠고, 이에 신성로마제국은 두 명의 왕이 대립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내전은 3년간이나 지속되었지만 그 종국은 시민과 농민을 중심으로 새로운 전투부대를 조직한 하인리히 4세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대립왕 루돌프는 전투 중에 오른손이 잘리고 그로 인해 죽었으며, 이에 새로운 대립왕으로 내세운 헤르만 폰 잘름이 이끄는 제후군마저 하인리히 4세의 군대에게 궤멸되었던 것이다. 

     

    내전에서 승리한 하인리히 4세의 창끝은 곧바로 이탈리아를 향했다. 마틸데의 토스카나 왕국과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있는 로마를 치기 위함이었다. 사실 카놋사의 굴욕쯤은 눈을 감고 넘어가려고도 했었지만, 내란 중인 1080년 교황이 두 번째로 자신을 파문하고 대립왕 루돌프를 신성로마제국의 정통 국왕으로 선언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인리히는 그 배후에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데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바였다. 

     

    하인리히는 남벌에 나서기 전, 독일의 주교들을 위협하고 부추켜 이번에는 역으로 그레고리우스를 교황에서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와 대립하던 클레멘스 3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옹립한 후, 두 원수를 치러 알프스를 넘었던 바,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치닫게 되었다. 

     

    하인리히 4세가 공격해 온다는 소식에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마틸데는 급히 군사들을 차출하여 그들 연합군으로 하여금 롬바르디아의 평원과 남벌의 길목인 볼타 만토바나 성을 지키게 하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유독 신앙심과 주군에의 충성심이 강한 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투에 크게 유용하지는 못하였으니, 상대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예병이었고 또한 3년간의 내전을 치른 경험 많은 군사들이었다. 교황과 마틸데의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던 바, 마틸데는 의탁할 곳을 찾아 북으로 달아났고, 교황은 로마의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가 농성하였다.

     

     

    격전이 벌어졌던 볼타 만토바나 성

     

     

    교황이 도망간 산탄젤로 성은 이름난 요새로서,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한 명의 장수가 지키면 능히 천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이른바 일기당천의 요새였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무려 4년간이나 성 공격에 매달려야 했으니 108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을 함락시키고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 입성에는 산탄젤로 성의 함락보다도 그레고리우스의 잔꾀가 역으로 도움이 되었으니, 그가 하인리히의 공격을 막겠답시고 데려온 이탈리아 남부의 노르만인과 그들이 고용한 사라센 용병들의 무차별적인 로마 약탈이 화근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들 3만 5천 명의 군대로서 하인리히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반면 민심은 이반되었으므로 결국 로마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었다. 

     

     

    천사의 다리에서 바라본 산탄젤로 성

     

    로마에서 밀려난 그레고리우스는 몬테카지노와 시칠리아 섬 등을 떠돌다 결국 망명지인 이탈리아 살레르노에서 쓸쓸히 영면했다.(1085년 5월 25일) 그는 다음과 같은 비통한 유언을 남겼지만 아무도 공감하는 이 없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세상을 떠돌다 죽게 되었노라."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시신 
     그의 시신은 살레르노 대성당에 안치됐다. 자신의 죽음이 억울하였는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썩지 않아 방부 처리하여 모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지난 2010년 7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유리관 속의 그레고리우스를 방문했다 . 

     

    한편 북쪽으로 달아난 마틸데는 어찌 되었을까? 그 역시 하인리히 4세에게 쫓겨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아니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 7세와는 달랐으니, 마틸데는 독일 바바리아 가문에 몸을 의탁한 후  바바리아의 후계자 벨프 5세와 결혼한다.(당시 마틸데는 43세의 중년이었는데, 반면 벨프 5세는 불과 17살이었으니 남자 꼬시는 능력은 타고 난 여자였던 것 같다) 게다가 이후 그녀는 오히려 하인리히 4세의 아들 콘라드와 그의 동생 하인리히 5세를 유혹해 아버지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게 만드는데, 다음 편에서는 그 과정 및 아들 콘라드와 아버지의 후처(러시아의 공녀인 에우프락시아)와의 근친상간, 그리고 그 두 아들과 하인리히 4세와의 한판 승부를 조명해 보겠다. 

     

     

    카놋사 성의 위치
    카놋사 성의 원경 
    카놋사 성  관광 엽서
    골조만 일부 남은 카놋사 성 /  마틸데가 죽고 100년 뒤 카놋사 성은 이웃 도시 레기오(Reggio)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안내원으로부터 그 시절 얘기를 듣는 관광객들
    눈 덮인 카놋사 성 / 굳이 관광 안내원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눈 덮인 카놋사 성의 폐허가 그때의 이야기를 충분히 전해준다. 이와 같은 눈밭 속에서 하인리히 4세는 2박 3일을 견디었다.   
    그림으로 전해지는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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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