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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로마군단 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5. 13. 01:17

     

    로마군과 파르티아 군대와의 한판 싸움은 앞서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 I '에서 언급한 바 있다. 먼저 그 내용의 서두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과거의 대제국이었던 로마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을 점령한 후 더 이상 동진을 못한 것은 동방의 신흥강국 파르티아에 번번이 패한 까닭이었다. 저 유명한 폼페이우스의 상승군(常勝軍)이 유프라테스 강의 북쪽까지 진출한 적이 있지만 사실상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왔고,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이끄는 4만 군대가 원정에 나선 것이 그 두 나라의 대표적인 전투가 되겠는데, 로마군은 여기서 겨우 1만 명만 살아 돌아오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후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응원 속에 11만 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복수전에 나섰으나 그 역시 군사 2만을 잃고 허겁지겁 되돌아와야 했다.

     

     

    로마, 파르티아의 영토와 카르하이 전투가 벌어진 곳

     

    막강 로마군이 이렇듯 무력했던 것은 파르티아군의 기마술과 궁술에 고전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로마군의 주력은 잘 짜진 군영의 보병이었다. 반면 파르티아는 기병으로서 그들이 말 위에서 쏘아대는 활, 특히 도망을 가면서도 허리를 완전히 돌려 쏘아대는 이른바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에 로마의 보병 군단은 속수무책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로마군이 소수의 파르티아군에 번번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변칙 전술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까닭이었다.

     

    위 ‘파르티안 샷’은 그들이 몽골족의 일파인 훈족에게 배워 온 기술로서, 그것은 누구보다도 고구려 사람들이 잘 하던 마상(馬上) 기법이었던 바, 우리는 저 고구려 벽화에서 이러한 궁술을 익히 접한 적이 있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

     

    오늘 말하고자 하는 기원전 53년 카르하이 전투는 로마군이 위의 파르티안 샷에 제대로 당한 케이스였다. 기원전 55년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된 크라수스는 자신의 두 경쟁자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싶었고 그것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이루려 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54년 기병 4천을 포함한 총 4만 2천 명, 7개 군단의 대군을 이끌고 동방원정에 나섰는데, 초전에 파르티아군을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둔 크라수스는 그들과의 전쟁을 쉽게 생각한 나머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내륙 깊숙이 진군했다. 
     
    파르티아 귀족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군대와 싸우게 됩니다

    출처: http://goddls1.tistory.com/133 [행인1또는 甲士1의 피난처...]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흉상(BC 115-53) /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이끌었던 그는 부동산 매매와 임대업 등으로 부를 모은 엄청난 부자이기도 했으니, 포브스지가 2008년 선정한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 중에서 1698억 달러를 기록해 8위를 차지했다.('위키백과' 참조)

     

    젊은 귀족 수레나스가 이끄는 9천 명의 파르티아군은 계속 도망을 갔으나 그러면서도 수시로 몸을 돌려 파르티안 샷을 쏘아댔다. 이에 로마군은 추격군이면서도 적잖은 병력의 손실을 겪어야 했는데, 크라수스로서는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본래 크라수스의 용병술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걱정할 정도로 용렬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런데 양군이 카르하이 평원에 이르렀을 무렵, 도망치던 파르티아 군대가 갑자기 진로를 180도 바꿔 공격해왔다.(아마도 그쯤에 수레나스가 숨겨둔 매복군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추격의 과정에서 많은 병력의 손실도 있었거니와 순간적으로 돌변한 파르티아의 공세에 로마군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리하여 전투대형을 갖추고 뭐고 할 새 없이 그대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바, 4만 명의 로마군 중 살아 돌아간 자는 1만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참패를 당했다. 선봉에 섰던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전사하였으며 크라수스 역시 붙잡혀 목이 잘려졌고 그의 목은 파르티아의 수도 크세노폰으로 보내졌다. 더불어 이때 로마군 1만여 명이 생포되었고, 6,000명은 탈출했다. 이것이 기원전 53년 5월의 카르하이 전투였다. 
     
     
    카르하이 전투 묘사도 / 파르티안 샷에 당하는 로마군을 그렸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생포된 로마군 1만여 명은 어떻게 됐을까? 파르티아 왕은 그들을 제국의 동쪽 국경인 마르지아나 성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것이 2,400킬로미터나 떨어진 거리였으니 많은 사람이 장거리 이동 중에 사망했을 것이나 생존한 병사들은 파르티아의 동쪽 국경 지역에서 용병 부대로 정착했다. 국경을 접한 흉노족을 방어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이들 중 살아남은 자들은 기원후 20년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회복한 로마가 포로송환을 요구했을 때 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문제는 카르하이 전투에서 탈출한 6,000명의 행방이었는데, 이후 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1940년대부터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돼 왔다. 

     

    1955년 옥스퍼드 대학교 호머 H 덥스 교수는 중국의 사서에서 사라진 로마 군단에 대한 추측 가능한 내용을 찾아냈다. '한서' 진탕열전이었다. 한서 진탕열전에는 놀랍게도 흉노족 질지 왕의 휘하에서 싸우는 소수의 이색적인 군사가 등장한다. 기원전 36년 흉노 토벌에 나선 한나라 군대가 북흉노의 본거지인 지지를 공격했을 때(키르기즈 평원 일대) 토성 밑에서 이중의 목책을 쌓고 어린진(魚鱗陣)을 펴고 있는 100여 명의 군사가 있었던  것이다. 

     

    ~ 그밖에도 로마군에 관한 내용은 <진서(晉書)>, <수서(隋書)>,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오량지(五凉志)> 등에서도 발견된다.

     

     

    어린진을 펼치는 로마군
    어린진 유형

     

    어린진, 즉 물고기 비늘 형태의 진법은 로마군이 즐겨 쓰던, 방패로 만드는 방어진이었고, 두 겹의 목책 역시 로마군들이 사용한 방어용 울타리였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흉노는 패배하였던 바, 천 명이 투항하고 145명이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 병사 중에 어린진을 펴던 이들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들은 이후 또 어떻게 되었을까? 호머 덥스 교수는 어찌 됐든 그들이 이유 없이 살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가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됐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 중국 서북민족대학 관의권 교수와 호주 애들레이드대학 데이비드 해리스 연구원 등은 카르하이 전투’에서 로마군단이 사라지고  20년이 지난 후 중국 감숙성 난주 시 북쪽에 리첸(驪靬, Liquian)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출현한 사실을 알아냈다. 리첸은 중국어로 그리스 · 로마 세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호머 덥스 교수는 이곳 리첸이 지지 전투에서 생포된 로마인의 후예가 정착한 곳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감숙성 리첸현의 위치
    최근 발견된 로마군 추정 무덤의 묘지명

     

    기원후 9년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모든 도시 이름을 ‘현실에 맞게’ 고치라는 칙령을 내렸다는 사실, 그리고 이 칙령에 따라 한때 리첸을 ‘지에루’로 바꿨는데 지에루는 ‘포로들이 세운 도시'를 의미한다는 사실도 덥스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로마군은 당시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이곳에 온 셈이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흉노의 용병이 되어 중국 군대와 싸운 것이다. 그리고 또 그들에 사로 잡혀 이곳 리첸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을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로마에서 리첸까지의 이동 경로 / BC 53년의 카르하이 전투와 BC 36년의 지지 전투가 표시돼 있다.
    지지 전투 묘사도

     

    흉노는 원래 기록을 남기지 않는 민족이었던 바, 카르하이 전투에서 도망친 그들은 동쪽으로 오는 과정에서 초원의 주인인 흉노족과도 한판 붙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니, 6000명에서 급격히 줄은 100여 명이라는 숫자가 그것을 말해준다. 흉노와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저들의 수하가 되었고, 그리하여 이번에는 먼 이역 땅에서 중국 군사와 싸우게 된 것이었다.(따라서 어찌 보면 용병이란 말은 맞지 않는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드라마틱한 일이 정말로 일어났을까 새삼 의심스러워지기도 하는데, 그것이 사실임을 그 후예들이 증명한다.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은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애매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것이니, 그 로마 병사 100여 명의 DNA가 2000년이 지난 지금껏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푸른 눈의 리첸 주민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흉상 비교
    리첸 주민들의 이국적인 생김새
    리첸의 이쁜 베이비(아그그--)
    난 아니거든!

     

    마지막으로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께서 이에 관해 쓴 글 하나를 소개한다. 읽을 때마다 왠지 숙연해지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내용이다. 그리 힘주어 쓰지도 않은 듯한데 이상하게도 가슴에 와닿는 글이다. 아무튼 글의 힘이란 무섭다. 

     

    중국 과학원은 최근 이 지역에서 유럽인 체형 시신 99구를 발굴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에도 이곳에는 서구인과 흡사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왜 서쪽 로마가 아닌 동쪽으로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하서주랑 한복판에서 흉노의 용병이 되었던 로마군의 인생유전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2016년 4월, 이덕일 사랑(舍廊)'

     

     

    지지 전투가 일어난 곳 / 지금의 키르기즈스탄과 러시아 국경 지대이다.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키르기즈스탄 북쪽 평원
    리첸에 세워진 로마풍의 정자 '여간정
    리첸의 당대 유적지
    이 사건에 관해 쓴 책 '리첸의 수수께끼'
    리첸 현의 관광 팜플렛
    리첸의 아우구스투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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