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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행어사와 마패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5. 14. 03:17


    일요일 낮에 방영되는 KBS 'TV쇼 진품명품'은 상당한 장수 프로그램으로, 방영된지 20년이 넘는 것을 보면 우리 국민들의 문화재에 관한 관심이 꽤 깊은 듯하다.(엄밀히 말하자면 '골동품'이 더 가까운 표현이겠지만) 지금은 흥미가 좀 떨어졌지만 내가 한참 볼 시절에 기억에 담긴 두 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그 '한참'이 과거 두 역참(驛站)사이의 거리를 가리키던 데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이다. 옛 역참은 대개 30리 마다 하나씩 두었으므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2km가 되겠다. 그만큼 오래 걸리는 거리라는 얘기렷다. 내가 말했던 한참은 그 공간적 개념이 시간적 개념으로 바뀐 예가 될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과거 공무 수행자들이 그 역참에서 말을 징발할 때의 도구로 사용됐던 마패(馬牌)로서, 지금껏 마패는 '진품명품'에 1000점 가까이 의뢰된 단골손님이라고 한다.(그래서 기억에 담겨진 듯) 그런데 그 마패들은 대부분 가품이었으니 감정위원인 이상문 위원은 시중에 나도는 마패의 95%는 가짜로 보면 된다고 단정했고, 양의숙 위원은 그많은 의뢰품 중 진짜 마패는 일본 오사카 출장 감정 때 딱 한번 만났다고 했다.(그 물건은 조선 중기의 것으로 감정가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마패

    앞면에는 마필의 수, 뒷면에는 자호(字號)와 제작 연 월, 발행기관인 상서원인(印)이 새겨졌다.


    성암 고서박물관에 전시된 마패

    1434년(세종 16년) 5월에 발행된 주조 마패이다. 1434년은 기존의 목조 마패가 주조 마패로 대체된 시기이므로(2월) 위 마패는 조선의 마패 중에서는 거의 최초의 것이 되겠다. 



    본시 마패는 공무의 수행을 마치면 조정에 반납을 하는 물건이므로 시중에 나돌 수 없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궁중에 보관돼온 몇 점의 마패 외에는 전부 가짜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법하다. 마패를 발행하고 관리하는 부서는 병조 소속의 상서원(尙瑞院)으로, 지방은 관찰사나 병마사가 현지로 부임할 때 일정수의 마패를 발급받아 필요할 때 사용하도록 했다 한다. 관찰사와 병마사는 지방관직의 최고위급이니 마패는 정말로 아무나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마패 발급 절차도 매우 까다로워 관원이 병조에서 등급에 따라 증서를 받으면 상서원이 왕에게 보고한 후 발급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마패의 등급은 임무와 역할에 따른 것이지 서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새겨 있는 마필의 숫자가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패를 생각하면 드라마 등에서 "암행어사 출두야!"할 때 들이미는, 그리고 그때 클로즈업되는 말이 새겨진 둥근 쇠붙이가 떠오르는데, 가만 보면 그것이 용도와 맞지 않을 경우가 있다. 말한 바 대로 마패가 아무나 가지는 물건이 아닌 만큼 출두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확실한 징표로써 쓰였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때 클로즈업되는 말의 숫자가 대부분 다섯 개인 바,(이게 최고인줄 알고) 바로 그 점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암행어사가 사용한 마패는 통상 말 두 마리가 새겨진 2마패였다. 말했다시피 마패는 역참에서 말을 빌릴 때 사용한 징표로서, 거기 새겨진 마필의 숫자만큼 말을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암행어사는 혼자 다니거나 시종 한 사람만을 대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2마패 그 이상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드라마에서처럼 칼잡이를 한 명 달고 다닐 때는 당연히 3마패가 필요하겠지만 현실에서 그와 같은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암행어사가 지니게 되는 마패는 그 비밀을 유지해야 하므로 병조를 거치지 않고 승정원에서 미리 보관하고 있다가 파견 당일 지급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들어서는 국정의 문란과 더불어 그 운용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문제가 발생되기도 했지만, 마패는 그만큼 철저히 관리된 물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드물게는 말 다섯 마리 이상이 그려진 6~10마패도 발행되었다는데, 그것이 요구될 때는 전사자(戰死者)의 운송, 공물의 수납 같은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경우일 터였다.


        


    경찰박물관에 전시된 마패. 1730년(영조 6년) 6월에 발행한 것으로, 이때 제작된 것이 많았는지, 아니면 이 마패에 대한 복제품이 많은 것인지 옹정 8년 산 마패는 꽤 많이 눈에 띤다.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어사 박문수가 최초로 지방에 파견된 것이 1727년(영조 3년)이고, 이후로도 몇 차례 어사의 직을 수행했다고 하는 바, 위의 옹정 8년 산 마패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어사 박문수가 사용한 마패일지도 모른다는 야그^^)



    그런데 우리가 주변에서 마패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 위력으로 인해(말을 빌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물건에다 만들기도 비교적 쉬었기 때문이었으라 여겨진다. 그리하여 교통망의 발전으로 역참 체계가 사라지고 기존의 신분 체계가 무너진 일제 강점기 이후로는 아예 유기점 등에서 대량생산을 하였던 바, 옛 마패들이 시중에 나돌게 된 것이었다. 


    당시 만들어진 것들은 오늘날 관광지에서 파는 관광상품용 마패와 달리 그런대로 옛것인 바,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구별도 쉽지 않다. 이상문 위원의 말로는 진품은 그야말로 때깔부터 틀리다는 데 그건 어디까지나 전문가의 식견일 뿐 보통 사람 눈에는 구별이 쉬울 리 없다. 그리고 또 그 분 얘기로는 일제 강점기 무렵에는 마패를 집에 걸어두면 귀신이 범접 못한다는 축사(逐邪)의 의미까지 덧붙여져 더욱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는 바, 한마디로 시중의 마패는 모두 가짜라고 여겨도 무방할 것 같다.


    * 세세하게 설명하기는 힘드나 마패 뒤에 써 있는 글자가 윤자호 옹정 8년 6월(閏字號 雍正 八年 六月)이면 99.9% 가짜로 보면 되고, 황자호 천계 4년 3월(黃子號 天啓 四年 三月)이면 99.8% 가짜로 보면 된다. 인터넷에 감정 의뢰되는 마패들은 대부분 '윤자호 옹정 8년 6월' 마패인데, 옥션이나 G 마켓 거래 가격은 29,000~30,000원이다.(진품이라면 29,000,000~30,000,000원이 될 것이다) 가짜 중에는 교묘히 때나 녹을 입힌 마패들도 있으니 우선은 위에서 말한 이 글자들을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 '윤자호 옹정 8년 6월' 마패는 한 거푸집에서 나온 가짜가 유통된 것으로, 이것이 또 확대 재생산 된 것 같다. 그래서 시중의 가짜도 4~5 종류나 된다. 아래 '윤자호 옹정 8년 6월' 마패는 말의 숫자가 1~5마리로 모두 다르나, 이 중 No 4의 5마패는 완전 가짜이고, No 3의 3마패도 그럴 듯해 보이지만 가짜다. 아울러 No 1, 2의 1마패와 4마패도 진품이 아닐 확률이 99%이다.



    No 1.


    No 2.


    No 3.


    No 4.



    이상은 오늘 'TV쇼 진품명품'을 보고 난 후 마패에 관해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본 것인데, 덧붙여 양재동 등지에서 채집한 '말죽거리 잔혹사'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그것을 얘기하자면 먼저 주마등(走馬燈)부터 설명해야겠다. 알다시피 양재동 말죽거리는 도성 남쪽의 양재역참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말죽거리로 불리게 된 데는 여러 설이 분분하나 말에게 먹일 풀죽을 끓이던 곳과 관계가 있는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이곳에 많은 주막이 있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주마등은 주막의 입구에 걸어 음식과 숙박을 제공하는 업소임을 표시한 물건으로서 밤에는 그 안에 호롱불을 밝혔다. 그런데 그 등에는 달리는 말을 그려 넣어 여행과의 관계를 표시했는데, 불을 밝히면 내부의 공기가 데워지며 일종의 대류현상으로써 등이 회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치 말이 빨리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바, 인생이 주마등 같다(그처럼 빠르다)는 말은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주마등의 예(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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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종 임금 시절의 어느 겨울에 그 주막에서 술을 먹다 붙잡혀 치도곤을 당한 사내가 있었다. 그자는 다름 아닌 마패를 관리하는 상서원의 최맹손(崔孟孫)이라고 하는 말단 공무원이었는데, 폐기될 마패를 몰래 갖고 나와 그것을 이용하려는 시정 잡배에게 비싼 값에 판 후 그 돈으로 술을 먹다 포청 나졸들에게 붙잡히게 된 경우였다. 


    당대는 우리가 중국의 연호를 쓰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연호가 바뀌면 마패에 새겨져 있는 연호도 바뀌어야 되므로 앞에 것을 폐기, 혹은 보관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했다. 최맹손은 바로 그와 같은 텀을 노려 마패를 슬쩍했고 또 그것을 비싼 값을 받고 판 것이었다. 그것을 사 간 놈을 비롯해 일반 백성들이야 중국의 연호가 바뀌었는지 어쨌는지 알 길 없는 노릇이었고, 또 한동안은 이와 관계 없이 잘 써 먹었는데, 어느 순간 들통이 나고 말았다. 이에 말죽거리 주먹에서 술을 먹던 최맹손도 붙잡혀 들어가 치도곤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절도 행각과 장물거래 행위를 비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최맹손은 공무원이었으므로 그 죄가 더욱 중하다. 하지만 굳이 확대하자면 이 또한 자주국의 연호 없이 살았던 약소국가 국민의 비애 아닌 비애였기에 일말의 동점심도 인다. 



    조선 말기의 역참과 역참의 관리들


    양재동 말죽거리 푯말

    말을 새긴 듯한데 표시가 잘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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