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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세의 영웅 이수성(李秀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5. 3. 08:08

     

    * 전편에서 이어짐. 

     

    홍수전이 남경을 수도로 하는 기독교 왕국을 건설한 것은 실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빈 손으로 오직 신앙심만으로 하나님의 나라 태평천국를 세운 것이었다. 하늘의 계시를 받은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태평천국은 아직도 팽창 중이었으니, 어쩌면 머잖아 중국 땅에 기독교를 국교로하는 통일왕국이 세워지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홍수전의 태평천국이 정말로 기독교 왕국인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찍힌다. 태평천국의 기독교는 유럽의 정통 기독교에 비해 교리가 크게 왜곡돼 있었고,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그로부터 반 세기에 후에 나타날 사회주의적 통치 방식이었다. 일례로, 백성들이 태평군에 가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재산을 바친 후 공평한 분배를 받아야 했다. 

     

    그 반세기 후 나타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공동생산 · 분배의 방식으로 거의 100년의 세월을 구가하였으므로 지속될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은 방식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천왕 홍수전 자신이었다. 계속된 승리에 도취된 그는 남경 입성 후부터는 초심을 잃고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차츰 향락에 빠져갔던 바, 천왕부를 아방궁으로 꾸미고 많은 시녀들을 거느리는 등 역대 패주(敗主)의 모습을 드러냈다. 같이 혁명을 일으켰던 풍운산이라도 있으면 나았으련만 계림(桂林) 전주성(全州城) 전투에서 전사한 뒤였다. 

     

    홍수전이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자 부하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왕(東王) 양수청과 북왕(北王) 위창휘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익왕(翼王) 석달개는 자신도 계시를 받았다며 20만 군사를 이끌고 태평천국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했다.(이른바 '천경사변') 이와 같은 내분은 자연히 태평군의 전력을 약화시켰다. 태평군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증국번의 상군(湘軍, 민병대)이 전선에 투입되었던 것도 요인이었다. 이후 태평군은 초기의 막강함을 잃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석달개는 이후 독자적으로 봉기했으나 1861년 대도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붙잡혀 죽는다)  

     

     

    '천경사변'으로 파괴된 대보은사탑 이 탑은 남경성 남문 취보문 밖에 세워졌던 높이 80m의 거탑으로 벽체를 장식한 색유리와 기와로 인해 천하제일탑으로 불려졌으나, 익왕 석달개가 이 탑에서 포를 쏠까 두려워 한 남경의 태평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그림은 1721년 서양 선교사가 그린 것이다)
    현대적으로 복원된  대보은사탑

     

    이 무렵 태평군 내에서 이수성(李秀成)이라는, 가히 난세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가 출현하였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그는 태평군에 가담한 이후 처음에는 일개 병졸로서 출발했으나 거듭된 전공으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에 동왕 양수청의 부관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사령관급인 충왕(王)에 올라 실질적으로 태평천국의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글을 알 뿐만 아니라 뛰어난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두뇌의 회전 또한 기가 막히게 빨라 적의 허를 찌르는 갖가지 공격으로 관군과 민병대를 괴롭혔다. 그리고 나중에 개입한 영국군과 프랑스 군대까지 애를 먹였던 바, 자신이 임한 싸움에서는 거의 패한 적이 없었다. 

     

     

    이수성의 흉상

     

    ~ 게다가 그는 젊고 청렴했으며 빼어난 미남자이기도 했으니, 1864년 최후의 전투에서 그를 붙잡은 증국번은 그의 갸날픈 외모에 놀라고, 또 그 문장력에 놀라 태평천국에 관한 책을 남길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이수성은 불과 열흘 만에 7만 자의 책(200자 원고지 400장 분량)을 완성해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그가 이때 형장에 이를 때까지 수 많은 병사들이 예를 갖춘 일, 그리고 그를 고통 없이 한 칼에 죽게 하라는 증국번의 명령 등은 훗날 오랫동안 세인들에게 회자되었다. 

     

     

    이수성이 쓴 태평천국의 난에 관한 기술서

    이 때의 글은 증국번의 가문에 보관돼 오다가 청나라가 망한 후 '충왕(王) 이수성 자술'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세상에 나온다. 이후 이 책은 태평천국의 난에 관한 신빙성 있는 유일한 텍스트로서 동서양 학자들의 연구자료가 되었다. 

     

    이수성의 칼

    이 칼은 고든 장군에게 들어가 영국에서 보관돼 오다 이수성의 칼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1961년 3월 영국 육군총사령관 캠브리지 공작에 의해 중국 혁명박물관에 헌정되었다.

     

     

    이같은 이수성과 진옥성(陳玉成) 등의 새로운 장수의 출현으로 태평천국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던 바, 항주와 소주 등의 요지를 점령하고 상해를 향해 진격했다. 이것이 1860년의 일이었는데, 이때가 바로 애로 호 사건에 의한 천진 조약 비준의 문제로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황제의 정원 원명원(圓明園)을 파괴할 즈음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불 연합군은 홍수전이 일으킨 이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영국과 프랑스는 내전을 지켜보는 형국이었지만 청나라와의 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면서부터 입장이 달라졌다. 2차 아편전쟁 후 청나라는 어쩔 수 없이 천진을 포함한 양자강 이북의 10개 도시도 개항하게 되었다. 영불연합군은 목적을 이룬 셈이었으니 다음 목표는 걸치적거리는 태평천국군의 제거가 되었다. 이수성은 영불연합군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지만 영불연합군은 태평천국과의 전면전을 택했던 바, 어쩔 수 없이 그들과도 싸워야했다. 

     

     

    원명원 정원의 로코코 양식 건물 '서양관' (1860년 파괴되기 전의 그림이다)
    남아 있는 서양관 흔적. 영불 연합군은 원명원을 파괴하고 그 안의 많은 보물들을 약탈하였다.
    태평천국의 난 전황도

     

    이수성은 그 당시에 맺은 천왕 홍수전과 영국군과의 조약, 즉 영불 연합군이 점령한 상해 지역을 연내에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따라 진군을 미루었으나, 기간이 지나자 1862년 1월 1일 즉시 상해를 들이쳤다. 전쟁은 내전을 넘어 이제 국제전으로 비화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해 미국인 와드(E. T. Ward)를 대장으로 하는 이른바 ‘상승군(常勝軍)’의 외인 용병부대까지 참전하게 되었던 바, 전쟁은 더욱 복잡하게 전개돼 갔다. 

     

    어찌됐든 상해를 점령하려는 태평군의 공격은 매우 거셌으니, 프랑스 제독 프로트가 전사하고 영국 제독 호프는 부상당했다.(이때 영불 연합군은 소총 5백 정과 탄약 36상자를 노획당했으며, 상승군 부대장 폴스터는 포로가 됐다가 나중에 무기와 교환되며 풀려났다) 이처럼 이수성의 공격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상해의 점령을 바로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일이 안 풀리려 했는지 바로 그때 남경의 홍수전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도착했다. 지금 남경이 청군에 포위돼 공격받고 있으니 빨리 와서 자기를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수성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홍수전은 자신이 좀 더 버티지 못하고 이수성을 부른 것을 나중에야 크게 후회했다. 이수성 역시 훗날의 술회에서 이때 상해를 점령하지 못한 것을 전쟁의 중요 실패요인으로 꼽았던 바, 이때 상해를 점령한 후 남경을 구원했다면 전쟁의 양상은 그때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이수성은 양수천이 북벌에 실패한 것, '천경 사변'이 발생한 것, 홍수전이 정사에 등한시한 것 등을 실패요인으로 꼽았다. 

     

    이수성은 이후 어쩔 수 없이 남경을 지켜야 했는데 이때부터 태평군은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밖에서 싸워야 할 장수가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 무렵 증국번에 이어 이홍장과 좌종당이 이끄는 민병대까지 조직되어 태평군을 공격했던 것이었다. 또 즈음하여 영국에서 파견된 명장 찰스 고든이 상승군을 이끌기 시작했던 바, 그 또한 태평군에게는 불리한 전개였다.  

     

     

    남경성 전경
    남경성  지도
    찰스 고든의 초상화

     

    이수성이 남경성을 방어하는 동안 태평군의 주요 거점인 안경(安慶)과 항주와 소주를 차례로 탈환한 민병대는 1862년 5월, 청군과 함께 남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이수성은 홍수전을 탈출시키고 자신도 살길을 찾으려 했지만 남경 사수를 고잡하는 홍수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군이 남경성을 옭죄어오고 식량이 바닥나자 홍수전은 성서 출애급기에 나오는 탈로(만나) 먹으면 된다며 솔선수범하여 이슬 맺힌 들풀을 먹다 1864년 6월 1일 배탈이 나 죽었고, 얼마 후인 7월 19일 남경은 함락되었다.

     

    이때 이수성은 홍수전의 아들인 어린 천왕 홍천귀복을 데리고 남경성을 탈출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때 자신은 상태가 나쁜 말을 타고 홍수전의 아들은 좋은 말을 태워보냈던 바, 결국 3일만에 뒤쫓아온 증국전(증국번의 아우)의 상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증국전은 그동안 이수성에게 당한 분풀이로써 그의 팔과 허벅지를 베었는데, 이에 이수성이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상전을 모시는 몸이거늘,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무엇이 있소?"

     

    윗선의 명령에 따라 충성을 다한 것 뿐인데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힐문이었다. 이에 그 말이 타당하다 여긴 증국번이 린치를 금지시키고 이수성과의 대화를 시작했던 바, 위에서 말한 태평천국의 난에 관한 회고록이 저술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회고록의 저술을 마친 1864년 8월 7일 저녁, 이수성은 형장에 끌려가기 앞서 증국번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와 합심해 청나라를 무너뜨릴 생각을 해야지, 어찌 죽이려고만 드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수성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고도 하나 이것은 옳지 않으니, 그는 기독교 왕국의 건설보다는 청조 타도, 그리고 올바른 나라 건설에 뜻이 있었음을 그 마지막 말에서 옅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이어 그해 10월 25일, 유리걸식하던 홍수전의 아들도 붙잡혀 죽게 되는 바, 태평천국의 난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마지막에 즈음에 몰살된 태평군은 약 30만 명이었으며 난이 진행된 기간은 약 14년이었다.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복은 이수성의 덕분에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난민으로 위장해 농가에 숨어들어 일꾼이 되었으나 워낙 일이 서투른 탓에 곧 쫓겨나고 만다.(농사일이라곤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이후 유리걸식하던 홍천귀복은 행동거지를 수상하게 여긴 청군에 체포되었고, 이후 청군의 취조에 적극 협조했으나 태평천국의 2대 황제였다는 죄가 가벼울 수 없어 결국 그해 11월 8일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당한다. 그때 나이 15살이었다.

     

    능지란 '천천히 오르는 구릉'이란 뜻으로서 죄인이 최대한 고통을 받으며 천천히 죽게 만드는 극형인데 점을 조금씩 벗겨내 죽인다. 홍천귀복에게 가해진 칼질은 모두 1,003회였으며 2박3일 동안 내내 비명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사후 시신은 도륙되어져 눈알과 생식기는 비싼 값에 팔려나갔고 기타 살점 등도 모두 매진되었다. 아버지 홍수전으로 인해 아들 홍천귀복은 중국 역사상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이수성의 죽음(극화에서)
    증국번
    이홍장/위 두사람은 이후 중국의 거대 군벌로 군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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