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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레오파트라의 최후(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9. 23:59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에서 이어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처음 만난 곳은 터키 남부 도시 타르수스로, 훗날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로서 우리에게 더 익숙한 곳이다. 앞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곳 소아시아 지방은 기원전 42년 제 2차 삼두정치의 결과로 안토니우스에게 할양된 땅이었다. 그는 그 이듬해 이곳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기 위해 면세 혜택을 베풀었는데, 이에 관한 조칙을 직접 발표하러 왔다가 내친김에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하였다. 그녀가 그전 로마의 내전 당시 자신의 반대파인 퀸투스 캇시우스를 지원한 데 대한 문책을 하자는 것이었다.(공화파와의 내전이 일어났을 때 안토니우스는 캇시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와 싸웠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소환에 몇 번이나 불응하다 한참만에야 키드누스 강을 거슬러 타르수스에 나타나는데, 이때 안토니우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있는 상태였음에도 호화롭게 장식된 배 위에 비스듬히 누운 클레오파트라에 보고 한마디로 뿅!가버리고 만다. 우선은 이국적인 관능미의 아름다움에 반한 것인데, 게다가 그녀가 마련한 선상 파티 석상의 화려함과 준비한 이벤트들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歷戰)의안토니우스를 뼈속까지 녹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당시 클레오파트라는 29살 절정의 나이였다)

     

     

    타르수스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미팅을 한 장소에 세워졌다는 문으로, 속칭 '암캐의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이곳이 사도 바울의 고향인 관계로 바울의 문으로 불리다 최근에는 다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당시의 모습을 그린  마리오 카스텔뉴브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1920 x 1080 cm)
    관능미 넘치는 배우 힐데르가드 닐이 열연한 영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1972)의  한 장면

     

      "허! 이렇게 치장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겠군."

    배 안을 둘러본 안토니우스의 첫 마디였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자태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음에도 짐짓 어깃장을 놓았다. 그런 안토니우스를 그녀가 멋지게 받아쳤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예요. 지금 당장 저 혼자 1만 세스텔치아를 써 보이죠."

    1만 세스텔치아는 대강 2억 원 정도의 돈이라 하는데, 이때 그녀가 그 자리에서 제 귀에 달린 커다란 진주 귀걸이를 식초에 녹여마셨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역사가 플라니우스의 '박물지' 등에 의거) 이것을 본 안토니우스가 더욱 넋을 빼앗겼을 것임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베 네치아 팔라초라비아에 있는 지오바니 티에폴로의 프레스코화. 클레오파트라가 진주 귀걸이를 녹여 마시는 광경을 묘사했다.
    세기의 미녀 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출연한 '아스테릭스 클레오파트라'의 한 장면 

     

    그럼 이쯤에서 앞에서 거론한 질문, 즉 '클레오파트라는 정말로 미인이었나?'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해보자. 말한 바대로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플루타르쿠스는 이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직설적인 답을 내놓았다. 

     

      "(그녀는)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첫 눈에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의 미인은 아니다. 다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그녀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바, 좌중을 사로잡는 지식과 화술, 하나하나에서 드러나는 섬세한 예의범절, 몸에 밴 고급스런 자태는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주어 마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녀는 선천적인 아름다움보다 후천적인 노력으로서 사람들의 호감을 얻어냈다는 것이니, 그녀에게서 선천적 요인이라 할만한 점은 카시우스 디오가 말한 현(絃)을 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밖에 없었다. 위에서 말한 그녀의 '고급스런 자태'가 귀족적인 분위기라는 뜻도 있겠지만 결국은 후천적 노력의 결과물일 터, 함부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장소에 걸맞은 준비된 지식과 에티켓이 그녀를 돋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가 그만큼 자신을 갈고 닦았음일 터, 이것은 과거 이집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카이사르의 부하가 배에 불을 질러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까지 번지게 한 일에 대해, 그리하여 장서각의 도서가 일부 소실된 데에 그야말로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일화로도 알 수 있다. 

     

     

    이집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실화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이때 카이사르는 '고의가 아니며, 자신이 아닌 부하의 과오였다' 말로서 싹싹 빌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도와주려고 온 사람이 보일 모습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이 일 이후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되었고 결국은 로마까지 같이 가 죽음 직전까지 같이 한 사이가 된다. 모든 사서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로마에서의 그녀는 여왕 대접을 받았지만 그 행동은 매우 조신하였다는 것이니, 그저 나대었을 것이라는 일반인의 통념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클레오파트라를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던 키케로마저 사신(私信)에서는 언급을 회피했음은 그녀의 처신이 그만큼 적절했다는 방증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때와 장소에 맞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안토니우스도 카이사르와 같은 경우이다. 그가 클레오파트라와 에페수스 켈수스 도서관에서의 테이트를 즐겼다는 일화나, 페르가몬 대도서관의 2만 권의 책을 쓸어 결혼 선물로 주었다는 이야기 등은 그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을 외모에서 찾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실례라 할 수 있다. 안토니우스가 단지 클레오파트라의 미색에만 반했다면 결코 그 오랜 세월을 같이 할 수 없었을 터, 그 두 사람은 정말로 죽음도 같이 했다. 만일 안토니우스에게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집트의 여왕으로서의 재력이었겠는데,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일세의 야심가가 지닌 당연한 선택으로서 간과될 수도 있을 것이다. 

     

     

    터키 에페수스 켈수스 도서관 유지
    에페수스  중심가와 켈수스 도서관의 위치
    터키 베르가마 페르가몬 도서관 유지 
    도서관이 있던 페르가몬 아크로폴리스의 복원도와 평면도 
    위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페르가몬 신전은 아예 통째로 뜯겨져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멋없이 복원되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제 영토를 돌며 시혜를 베풀고 또 영토를 넓히는 전쟁에 나서느라 몇 년 간의 공백이 이루어지지만, 이후로는 그녀와 찰떡이 되어 내내 붙어다녔다. 그녀 또한 성심성의의 내조를 아끼지 않았으니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돌아왔을 때는 키프로스까지 마중 나가 위로해주었고 또 자신의 재산을 풀어 지원해주었다.(*'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로마와 파르타아와의 전투 참조) 이에 힘입었을까,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에 이루어진 아르메니아 원정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귀환하는데, 그는 그간의 관례를 벗어나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가졌다. 

     

    안토니우스의 이같은 행동은 로마 시민의 분노를 자아냈지만 그러든 말든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던 바,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왕중왕으로 선언했으며 그간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생긴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에게도 각각의 영토를 앞세운 거창한 제왕의 칭호를 내렸다. 웃기는 건 이때 카이사리온에게 자신이 정복하지도 않은, 엄연한 남의 나라 땅인 파르티아 왕의 호칭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자식이나 클레오파트라의 자식에게 실질적인 영토분할이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 자식들이 통치를 할만큼 장성한 나이도 아니었던 바, 말하자면 일종의 립 서비스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로마의 영토를 클레오파트라 일가에게 떼어주었다는 인식을 주기 충분한 행동이었으니, 이 또한 로마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옥타비아누스는 이런 분위기를 계속 부추켰다)

     

    또한 그는 이때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중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였는데, 그녀에게는 립 서비스가 아닌 실질적인 영토를 내려주었던 바, 기존의 유대 땅을 넘어 레바논과 시리아와 키프로스 섬, 그리고 서쪽 영토인 키레네 속주까지 딸의 이름을 빌려 떼어주었다. 어찌보면 클레오파트라로서는 횡재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클레오파트라에게 큰 재앙이 되었으니, 로마 시민들의 분노의 타깃이 그녀에게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고,(BC 33년 안토니우스가 본부인인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이혼을 하고 클레오파트라의 품으로 간 일까지 겹쳐) 결국은 옥타비아누스의 선전포고를 불러오게 된다. 

     

     

               넓어진   클레오파트라 왕국의 영역

     

    기원전 32년 말, 로마 시민의 여론을 등에 업은 옥타비아누스는 드디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먼저 싸움을 걸었다는 구실을 제공하기 싫었음인지, 아니면 안토니우스가 강세인 육전을 피하기 위함인지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게만 선전포고를 하여 두 사람을 당황시켰는데, 아닌게 아니라 싸움은 해전 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결국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그리스 서쪽 악티움 반도의 앞 바다에서 세 사람의 운명을 건 마지막 결전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에서는 약 7만 명의 군사와 500척의 함선이 동원됐고, 안토니우스는 군사 8만 명, 400척 함선이 동원됐다. 거의 팽팽한 전력이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지휘관으로서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옥타비아누스의 군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립파가 총사령관을 맡았다.(석고 뎃셍의 단골로 우리에게 익숙한 바로 그 사람이다) 

     

     

    아그립파(BC 63?-BC 12)의 흉상  

     

    전력이 비슷했던만큼 전투 역시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전투 도중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클레오파트가 탄 갤리선을 위시한 60척의 이집트 함선이 전열을 이탈하여 갑자기 펠레폰네소스 반도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일이 벌어졌던 바, 안토니우스가 탄 지휘선도 전열을 이탈하는가 싶더니 그 배 역시 빠른 속도로 클레오파트라의 갤리선을 뒤쫓은 것이었다. 이 상황은 아그립파도 이해가 안됐던 듯 한동안 멀거니 그 배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배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다시 전투에 집중했는데, 이때부터 싸움은 옥타비아누스 군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지휘관이 없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는 갈팡질팡하다가 각개격파됐고, 싸울 의욕을 잃은 그들은 어느 순간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세기의 대해전은 이렇듯 조금은 싱겁게 끝이 났다. 

     

    악티움의 위치와 전황도
    악티움 해전을 묘사한 당대의 부조

     

    역사에 기록돼 있는 악티움 해전의 전황은 분명 그러하다. 하지만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왜 전열을 이탈해 도망갔는지,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그런 그녀를 왜 정신없이 뒤쫓았는지 설명해주는 역사책은 없다. 그저 여러 추측만 난무할 뿐인데, 나 역시 그 추측에 하나를 더하자면 그녀는 저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집트 왕국을 지키기 위해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이 싸움이 넘어갔다 판단을 했고, 그리하여 차후 옥타비아누스와 새로운 협상을 진행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충분히 새로운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꼭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오히려 최악의 경우로 내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싸움을 어느 정도 수습해줘야 할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쫓아온 생각지도 못한 경우가 바로 그것인데, 결국 이것은 이도 저도 아닌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안토니우스가 쫓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가는 바가 없다. 

     

    역사가 플루타르쿠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분노에서 그랬는지, 혹은 클레오파트라의 꾸지람을 듣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 그랬는지 안토니우스는 타에나루스(펠레폰네소스 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항구)에서 3일 동안이나 뱃머리에 앉아 혼자 지냈다고 한다. 그것을 클레오파트라의 시종들이 애써 두 사람을 화해시켜주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때까지는 안토니우스가 완전히 패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막강 육군, 즉 보병 19개 군단과 기병 1만 2천 명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던 바, 안토니우스는 육군을 지휘하고 있는 카디나우스에게 사람을 보내 전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육군으로서 다시 한번 옥타비아누스와 겨뤄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제 뜻대로 되지 못했으니 그들은 전령이 도착하기 전 이미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을 했고, 강력한 우군이었던 헤로데(성서의 헤롯 대왕)도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투항을 해버렸다.(이후 유다 땅의 분봉왕으로서 천수를 누일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공로 때문이었는데, 잘 알려진대로 그의 치세 때 예수가 탄생하게 된다) 안토니우스가 저녁을 먹으며 자신의 부하들에게 '내일이면 혹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될는지도 모르니 오늘 밤은 즐겁게 마시자', '내가 전투를 하려는 것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롭게 죽기 위해서이다. 장수가 명예롭게 죽는 장소로서 전장보다 더 좋은 장소가 어디 있느냐' 등의 말을 했다는데, 주력 부대가 항복함으로써 명예롭게 죽을 기회마저 잃고 말았던 것이다. 

     

    역시 플루타르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이때 알렉산드리아 바다 가운데 짓고 있는 티모니움 궁에 있었다 하는데  이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도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마치 모든 희망을 던져버리고, 그 희망 속에 남아 있는 괴로움마저 떨쳐낸 해탈에 이른 사람처럼.....  그리고는 알렉산드리아 부르케이움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으로 와 홀로 자신의 배를 칼로 그었다.(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오보를 접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그는 그나마 운이 없었다. 그것으로 단번에 목숨을 끊지 못했던 그는 과다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내내 괴로워 하며 죽어가야 했다.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가 달려와 안토니우스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에 얼굴을 묻고, 여보라고도 부르고 폐하라고도 부르며 미친 듯 오열했다 하는데, 이때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이렇게 울지 말고 가서 살 길을 찾으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고통을 잊으려 했는지 아니면 목이 말랐는지 포도주 한 잔을 청해 마시고는 숨을 거두었다.('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안토니우스가 그 이튿날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즈음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정중한 대접 속에 그를 한 차례 만나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는지 자신의 방으로 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약을 먹었는지 독사에 물리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클레오파트라를 찾았을 그녀는 아무런 외상 없이 2명의 시종과 함께 죽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그녀의 죽음을 확인 한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즉 카에사리온의 처리에 대해 망설였다. 그는 이미 에디오피아를 지나 인디아까지 도망갔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꼬임에 빠져 이집트로 되돌아오다 붙잡힌 상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그에 대한 처리를 당대의 유명 철학자 아레이우스에게 물었는데, 그의 간단한 답에 간단히 목이 날아갔다.   

     

      "카이사르가 너무 많은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소(小) 카이사르라고 불리는 카이사르의 양자였고, 카에사리온 역시 카이사르의 아들로 알려져 있었던 바, 훗날 분란의 여지를 만들지 말라는 조언이었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300년 왕조는 역사 뒤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남은 것은 최후의 승자 옥타비아누스의 영광 뿐이었다. 

     

    이제 전쟁은 끝이 났고 로마의 공화정과 과두정치도 끝이 난 듯 보였다. 하지만 로마로 돌아온 옥타비아누스는 의외로 공화정 체제의 복귀를 선언했다.(BC 27년 1월 13일) 이에 로마 원로원은 3일 동안의 고심 끝에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 즉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 명칭은 분명 황제(Empire)가 아니었으나 로마의 그 누구도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후대의 역사가들 역시 이 날을 제정(帝政) 로마의 기원으로 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제 로마는 세습 왕정이라고 하는 새로운 체제가 탄생한 것이었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포럼 앞에 있는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클레오파트라의 두상이라 알려진 조각상들.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역대 클레오파트라로 분장한 배우들에 비할 얼굴은 없는 듯하다. 워낙에 빼어난 미인들만 영화나 뮤지컬에 출연한 탓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모니카 벨루치 

     

     

     

     

     

     

    비비안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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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서린 제타존스  

     

     

     

     

     

     

     

    힐더가드 닐

     

     

     

     

     

     

     

    안젤리나 졸리 

     

    1995년 미스 이탈리아 출신의 안나 발레  

     

    최초의 흑인배우 리어놀 바렐라 

     

    클레오파트라 에 관한 여러 이미지

     

      역대 클레오파트라 모음

     

    * '클레오파트라의 해저 왕궁(안토니우스의 꿈)'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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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