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아시아의 기독교 왕국 '요한'의 실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2. 15. 00:28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이 퍼시픽(Cathay Pacific)이라는 항공사는, 1946년 창립된 홍콩을 거점으로 하는 프리미엄급 국제 항공사이다. 중국어 표기는 국태 항공공사(國泰航空公司)로 돼 있어 혹간 중국 항공사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영국계 다국적 기업인 스와이어 그룹 계열의 항공사이다.세이 패식픽은 그저 발음만 달리 하는 같은 항공사이고,  드래곤은 2006년 홍콩 제2의 항공사인 드래곤 에어를 인수해  만든 자회사이다. 이로써 캐세이 퍼시픽은 중국 전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이룩하여 중국의 국영 항공인 에어 차이나(중국국제항공공사)에 버금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에 근무하던 회사의 대표가 스와이어 그룹 출신이라 귀에 친숙한데, 그는 자신이 그곳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무척 자부심 높던 사람이라 자주 그 회사를 입에 올렸다. 이를테면, 캐세이 퍼시픽이 큰 항공사이긴 하지만 스와이어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매출의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대표님과 사석에서 캐세이에 대한 약간의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나는 평소 알고 있던 대로 캐세이 거란을 뜻하는 키타이의 영어식 발음인데, 그 오랜 이민족의 나라가 아직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는 식으로 말을 했고,(조금은 요령부득으로) 이때 대표의 반응은 어이없고 불쾌하다는 것이었다. 

     

      "뭐, 거란? 고려 시대, 그 거란 말이야?"

      "예. 그 거란이요. 발해를 멸망시키고, 우리나라에도 쳐들어왔던..... 그 거란을 섬멸시킨 귀주대첩인가 하는 게 우리나라 3대첩(살수대첩, 한산대첩과 더불어) 중의 하나 잖아요?"

      "이 사람이, 지금 역사 강의해? 귀주대첩이 왜 나와? 그리고 그 거란족이 무슨 캐세이야?"

     

    반응이 생각보다 격해 그때는 말을 얼버무렸지만,(하도 펄쩍 뛰어 나도 자신이 없었다) 지금 다시 찾아보니 캐세이가 그 거란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1천 년 전에 멸망한 거란이 현대에 이르러 캐세이란 이름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인데, 2천 년 전에 멸망한 진나라가 차이나(China)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만, 차이나는 이후 중국의 고유 명사로서 지속된 것인 반면, 거란은 아무래도 갑자기 되살아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그렇다면 거란은 어떻게 해서 서방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것이 또 어떻게 중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이름이 되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셀주크 투르크(이하 셀주크 제국)라는 나라 및 그 나라와 오랜 기간 전쟁을 벌인 십자군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국가인 셀주크 제국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부터, 그리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유럽 제국에 성지 회복을 촉구하며 일어나게 된 장장 200년에 걸친 대전쟁이었다.(전쟁의 시발과 우르바누스 2세에 대해서는 '중세의 막장 드라마 카놋사의 굴욕 2',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 1' 참조)

     

    셀주크 제국은 10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사라센 제국의 동부로 이동한 투르크 계(Turks)의 민족이 세운 나라였다.(셀주크는 이동을 이끌었던 부족장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이후 그들은 이슬람에 동화되어 열렬한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되었고, 그 세력을 팽창시켜 11세기 중엽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였으며, 11세기 말인 술탄 말라샤크 1세(재위 1072-1092)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력이 커져 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영토인 소아시아 반도(현재의 터키)와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해왔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 제국은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황제 로마누스 4세가 포로가 되는 등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11세기 말 셀주크 제국의 최대 영토

     

    이에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마침 교황권의 신장을 꾀하고 있던 우르바누스 2세는 이것이 하나님이 준 기회라고 생각되었던 바, 1095년 11월 프랑스의 끌레르몽페랑 대성당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고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달변가였던 교황은 이슬람 제국과의 종교 갈등과 유럽 민족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며 성지 회복을 위한 설교의 목소리를 키웠다. 앞서도 소개한 그 설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 크리스트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성스러운 예루살렘이 저 야만의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했소. 우리 크리스트 제국의 국왕과 제후들은 봉기하여 성스러운 땅 예루살렘을 탈환해 주시오. 이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과거의 죄는 물론이요, 앞으로의 살육의 죄까지를 모두 면죄받게 될 것이오." 

     

    나아가 그는 동방에는 금은보석을 비롯한 온갖 재화가 널려 있다는 감언이설로 좌중을 충동질하였으니, 이에 각기 목적이 다른 제후들과 시민들이 미친 듯 십자군 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기독교 왕국을 세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성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이슬람의 군대에 번번이 패했는데, 1144년에는 십자군의 본영인 에데사가 함락되는 충격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그즈음 실추된 십자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만한 희망적인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당시 레바논 지역에 파견됐던 교황청의 위고(Hugo) 주교가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재위 1145-53)에게 보고한 내용에 근거한 소문이었다.(이 내용은 독일의 역사가 오토가 쓴 '두 도시의 역사'-Historia de duabus civitatibu-'란 책에도 실렸다) 그 소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영화 '킹덤 오브 해븐(Kingdom of heaven)'에 소개된 하틴 전투.

    1187년 7월,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부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예루살렘 십자군은 명장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군에 괴멸당하며 예수가 못 박혔다고 하는 '성 십자가'마저 노획당한다.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의 동쪽 지방에 요한네스(요한)이라고 하는 크리스트교 사제(師弟)왕이 있는데, 백성들과 함께 네스토리우스교를 믿는 독실한 크리스천 왕이다.(네스토리우스교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수수께끼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IIII' 참조)  사제왕이 얼마 전 투르크의 대군을 대패시키고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엑바티나를 일거해 점령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진군하여 티그리스 강까지 왔지만 배를 구할 수 없었던 바, 북방으로 올라갔다. 겨울에는 상류 쪽의 강이 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온난한 날씨로 강이 결빙되지 않아 지금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머잖아 우리를 도우러 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중앙아시아의 기독교 왕국 요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자 소문인데, 진위야 어찌됐건 이 같은 소문은 예루살렘 지역에 파견된 십자군을 넘어 유럽 전체에 큰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자신들 유럽인이 한 번도 당도하지 못한 미지의 동방 세계에 사제왕 요한이 건국한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는데, 게다가 초강국 셀주크 제국을 격파하고 곧 위기에 빠진 유럽의 십자군을 구원하러 온다고 하니 더욱 놀라 자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소문과는 달리, 그리고 그만큼 엄청났던 기대와도 달리 십자군 전쟁이 끝나가는 15세기 중반까지 사제왕 요한의 군대는 보이지 않았고, 그 후로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온 유럽인이 고대하던 사제왕 요한의 왕국과 그들의 군대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그건 그렇지 않았다. 다만 사제왕 요한의 기독교 왕국이 아니었을 뿐, 그때 그곳에는 셀주크 제국의 대군을 대패시킨 동방에서 온 한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는 다름 아닌 서요(西遼), 즉 거란이었다. 

     

    916년 거란족의 야율아보기(機)가 북중국에 세운 요나라는 이후 200년 동안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였으나, 1125년에 이르러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망국의 와중에 한 사람의 영걸이 나타났으니 야율아보기의 8대손인 야율대석(石)이었다. 그는 북방의 신흥강국인 금나라와 싸우는 대신 유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이주, 타슈겐트와 사마르칸드 일대의 카라한 왕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였던 바, 이것이 곧 서요(西遼)였다.

     

    그 서요를 셀주크 제국에서는 투르크어로 카라키타이(Qara-Khitai), 즉 흑거란이라 불렀으니, 얼굴이 검은 그들 거란족에의 통칭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반면 투르크족은 동양이 뿌리였으나 초원 스카타이족과의 오랜 혼혈로서 서양인과 같은 흰 피부를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투르크는 중국 북방의 유목민이었던 돌궐(突厥)에의 음차인 바, 흔히 그 돌궐족에 뿌리를 둔 셀주크 투르크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 그리고 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비롯된 현재의 터키(Turky) 공화국이 연상된다. 아울러 과거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던 돌궐족(동 동궐)이 연상되는 바,(<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우리가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 있다.(우리뿐 아니라 터키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그리고 터키가 과거 한국 전쟁 때 많은 병력을 파견해준 이유가 형제의 나라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건 잠시 생각해볼 문제다. 과거의 인연을 따져 한국이 형제의 나라였다 말한다면 북한 역시 형제의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건 아니고, 터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건 오스만 제국 이래로 러시아와는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한국 침략의 배후에 소련이 존재함을 알았기에 적극적인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고마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서요의 위치와 아율대석의 이주로. 서요의 위치와 영역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서요제국의 영역

     

    그런 가운데 일어난 싸움이 서돌궐, 즉 셀주크 투르크와의 카트완 전투였다. 요나라의 서역 침공 당시 자신의 힘으로는 거란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카라한 왕국이 셀주크 제국의 술탄 산자르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사마르칸트의 동북쪽 카트완 평원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셀주크 제국의 왕 산자르와 서요의 왕 야율대석이 직접 군사를 지휘한 대전투로서, 1141년 9월에 벌어진 이 전투가 유럽 사회를 흔드는 발단이 된 것이었다. 결과는 유럽 사회에 알려진 바 그대로 야율대석의 대승이었다.(아랍측 사서에서는 산자르의 병력이 10만이었고 키타이의 병력은 더 많았다고 기록돼 있는 반면 중국측 사서에서는 정 반대의 상황이 적혀 있는 바, 아마도 양측 모두 10만 정도의 백중한 세력이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카트완 전투 전황도 / 는 산자르의 공격로, 는 야율대석의 공격로이며 는 산자르의 패주로이다. 이후 야율대석은 사마르칸트를 거쳐 부하라와 호라즘을 정복하고 탈라스 평원을 경유해 수도인 발라사군으로 귀환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거란족은 이후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나 셀주크 제국은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는 바, 이 전투가 양국의 향배를 가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말한 바대로 이 세기의 대전이 서방 기독교 사회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때 그들이 이 나라를 사제왕 요한의 나라라고 착각을 한 것은 셀주크 군 측에서 서요의 왕 야율대석을 중국식 명칭인 왕과 거란식 명칭인 칸의 혼합인 '왕 칸'으로 불렀기 때문이라 여겨지는데, 이것이 비슷한 발음의 '요한'으로 인식되어 유럽 사회에 전해진 듯하다. 그밖에 그들이 십자군을 도우러 티그리스 강까지 왔다거나 하는 이야기 등은 이 승전보가 유럽 사회에 전해지는 동안 희망사항이 첨가되어 부풀려진 것으로 보인다. 

     

    서요는 약 100년가량을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존속하다(1124-1218) 그 후 세워진 호라즘 왕국과 함께 칭기즈칸의 몽골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곳의 거란, 즉 키타이는 이후 캐세이가 되어 또 하나의 중국명으로서 유럽 사회에 인식되게 되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항공사 이름으로서 쓰이게 된 연유였다. 그들 왕은 덕종(德宗), 인종(仁宗) 등 중국식 시호를 채택했으나 대외적으로는 '칸'으로 불렸고, 연경(延慶: 1132~1134년), 천희(天禧: 1211~1218년)와 같은 중국식 연호를 사용하였다. 국교로 둔 특별한 종교는 없었고 불교와 이슬람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혼재되어 존립했는데, 아래와 같은 변발식의 헤어스타일은 이곳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요의 무덤에서 발견된 거란인의 모습
    거란인의 매 사냥을 그린 송나라의 그림.

     

    사제왕 요한에 관한 여러 이미지

     

     

     

     

     

     

     

     

     

    그 실체가 모호했음에도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제왕 요한은 그에 관한 여러 위조문서들이 만들어지고 또 그에 근거한 책들이 출간되기도 하였는데, 때로는 그것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경략의 일환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과거 그 땅이 유럽인인 사제왕 요한이 다스리던 곳이라는 것이었다.

      

     

     

    'Land of Prester John'이라는 명칭이 붙은 세계 지도

     

    사제왕 요한 의 전기 (물론 가짜다)

     

    사제왕 요한에 관한 위조 서류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책에 삽입된&nbsp; 사제왕 요한의 삽화 (브리티시 도서관 소장)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