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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21. 07:56


    1388년 음력 4월, 고려의 최영 장군이 이끄는 5만 대군이 3차 요동 정벌에 나섰다. 1370년(공민왕 19년) 이성계의 1, 2차 원정에 이은 3번째의 요동 정벌이었다. 고려가 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한 것이 언뜻 공격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요동 철령(鐵領) 이남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곳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으나 몽골제국의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며 약 100년간을 지배하였다. 그것을 공민왕의 고토 회복 정책으로 겨우 되찾아왔는데,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새로이 중원의 패자(覇者)가 된 명나라 주원장이 이곳이 과거 원나라 땅이었다는 구실로 새로 철령위(鐵嶺衛)라는 군영을 설치해 일대의 땅을 접수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1388년/우왕 14년)


    고려로서는 이와 같은 명나라의 행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명나라는 1385년 이후, 북쪽으로 쫓겨 간 원나라(北元) 정벌을 이유로 공마(貢馬)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해왔던 바, 고려로서는 잔뜩 기분이 상한 상태였었다. 그렇잖아도 북원(北元)에서 명나라의 정료위(定遼衛)를 함께 치자 졸라대는 것을 혹시 저들만 좋은 일시키는 게 아닐까 하여 애써 참고 있는 마당이었는데, 선왕(공민왕) 때 겨우 회복한 고토를 언감생신 거저먹겠다고 나선 명나라에의 응징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에 최영을 총사령관(팔도도통사)로 하는 기병 2만 천명을 포함한 약 5만의 요동 정벌군이 꾸려지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한번은 붙어야 될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1370년 이성계와 지용수가 점령했던 동녕부 요양시의 위치.(붉은 색 박스 안) 

    북원이 협공을 제의한 정료위도 정료 우위가 관할하는 아래의 파란 색 박스 지역이 아닌 정료 중위나 좌위가 관할하 붉은 색 박스 지역일 것으로 짐작됨. 붉은 사선( / )은 동녕부와 쌍성총관부의 경계쯤으로 여겨지는 곳.

     


    ~ 쌍성총관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아래 지역은 아닙니다. 상식적으로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그림이예요. 생각해보세요. 몽골과 중원을 지배하던 광활한 영토의 대원제국이 이 조그만 땅덩어리를 다스리자고 100년간 관리를 임명했겠어요? 그리고 (기존의 학설을 좇자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이성계가 함경도로 갔었어야지 왜 압록강 너머 요동으로 갔겠어요?(정말로 쌍성총관부가 함흥 부근에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했을 겁니다. 원래 거기가 제 고향이니 고향 땅 회복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제 세력도 그만큼 키울 수 있었을 테니까요)


    ~ 이건 일제강점기의 일본학자들이 쌍성총관부가 곧 철령위니까,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철령 이북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갖다붙인 거예요. 그래서 쌍성총관부의 그림은 어디나 다 똑같은데, 일제강점기 때 조선시대 지도의 함경도 남쪽과 고려 천리장성의 남쪽을 합성시켜 만든 것을 해방 후 우리의 사학자들이 또 아무 생각없이 갖다 쓴 거죠. 설마하니 아직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위키백과'의 쌍성총관부 위치

    '위키 백과'에서는 위의 노란색 지역이라고 친절한 설명까지 달아 놓았는데, 하루빨리시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동녕부 역시 평안도 일대가 아님은 자명하나, 단 탐라총관부를 제주도에 두었음은 확실하다. 


    금성출판사 백과사전의 쌍성총관부 위치(역시 똑 같다)

    녹색지대가 공민왕 때 수복한 영토라고? 으왕, 웃긴다.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쌍성총관부 위치(마찬가지)



    ~인터넷에서 퍼 온 그림인데, 여기서 말하는 철령이 강원도 철령은 아니겠죠? 


    ~ 네이버 블로그 책사풍후 역사학보에 표시된 철령위의 위치는 아래 지도와 같습니다. 거기 철령과 요동군이라 써 있는 글자가 보이시죠? 거기는 고려 충선왕(1275-1325)이 원나라로부터 심양왕으로 봉해져 다스리는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충선왕은 고려 왕과 심양왕(요동 왕)을 겸했던 거죠.(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회령왕이 황제가 되는 데 큰 도움울 주었으므로. 이 사람이 원 무종임) 2대 심양왕(이때부터 이름이 심왕으로 바뀌었음)은 충선왕의 조카인 왕고(王暠) 되었다가 그 다음부터는 고려 충목왕과 충정왕이 계속 심왕을 겸했는데, 마지막엔 탈탈불화(재위 1354-1376)가 되었어요. 이름은 몽골 이름이지만 고려 사람으로, 2대 심왕 왕고의 손자입니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다시 원나라의 통치에 놓이게 됩니다. 원래 자기네 땅이었으니 가져가도 할 말은 없죠.(쩝;;)


    ~그 요동군의 남쪽이 쌍성총관부인데, 거긴 원래가 고려의 고유 영토였어요. 그걸 어떠 고려 놈들이(조휘, 탁청 등) 원나라에 갖다 바친 것을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공민왕이 되찾아 왔는데, 이 지역을 명나라가 통치하겠다고 하니까 고려가 열받은 거죠.(아무튼 이성계는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이 지역을 명나라에게 그냥 넘겨준 겁니다. 헐~)




    '충선왕 시절 고려와 심양의 지도'

    '위키백과'에서 그대로 퍼온 그림인데, 이건 그런대로 맞는 거 같음.



    그런데 원정에 즈음해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벌군의 우군도통사로 임명된 역전의 용장 이성계가 요동 정벌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선왕 시절, 이미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2차례의 요동 정벌을 성공리에 마치고 온(1370년 1월과 8월) 이성계가 이번에는 이상히도 몸을 사렸는데, 그 반대론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소역대불가(以小逆大不可: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를 보면 아마도 명나라와의 싸움에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자신이 과거 요동의 올자산성(兀刺山城)과 요성(遼城)을 공격해 원나라가 점령했던 동녕부를 일시나마 되찾았을 때는 명(明)과 원(元)의 외전(外戰)으로 인해 비교적 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나라가 북진해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중인 바, 이번에 맞붙게 될 명나라 주력군과의 싸움을 조금 버거워 하는 듯도 보였다



    14세기 말(1381년)의 아시아

    이 같은 지도는 기존 우리나라 학계에서 주장하던 쌍성총관부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학설인지를 말해준다. 



    게다가 이성계는 이번 싸움을 밀어붙이고 있는 고려의 최고 권력자 최영의 의도도 의뭉스러워 보였으니 어쩌면 이 원정이 자신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이미 고려 왕조는 과거 백 년간의 무신정군을 경험했던 바, 변방으로부터 승승장구해 온 자신을 큰 위협으로 느낄 수도 있을 터였다. 그의 생각에는, 만일 이번 원정에서 승리한다면 자신은 요동 총독과 같은 변방지기로서 죽을 때까지 명나라와 싸워야 될 것 같았고, 패한다면 전장에서 죽거나 책임을 물어 죽임을 당할 것도 같았다. 총사령관으로 선두에 서겠다던 팔도도통사 최영이 서경(평양)에 이르러 갑자기 홀로 머문 것도 의문스러웠다. 아무튼 이래저래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지만 명령이니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인 터, 어기적 거리며 압록강 위화도까지는 나아갔다. 하지만 예상대로 폭우로 인해 강물이 잔뜩 불어 있었다. 


    “허. 이거 큰일이로군. 아무래도 당분간 도강(渡江)은 힘들 것 같소. 내, 이래서 장마철에의 원정은 불가하다 했거늘.....”

    위화도에 들어선 이성계가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자신의 상장(上將)인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바라보았다. 조민수도 불어난 강물이 남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게나 말이오. 이성(泥城)원수 홍인계와 강계(江界)원수 이의는 이미 강을 건넜다 하니 한참 전투를 치르고 있을 텐데 말이오.”


    그랬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경에서 원정군이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은 고려의 요동 주둔군은 이미 명나라 내륙으로 진출하였고, 압록강 남쪽을 위수(衛戍)하던 이성과 강계의 두 장수는 강을 건너 명군(明軍)과의 한차례 전투를 치뤄 승리를 거둔 후 본군과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뿐만 아니라 우군(友軍)인 발해만 연안의 여진족(발해 여진) 군사들도 이미 요동으로의 출병해 고려의 본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성계와 조민수는 서경에서 위화도까지 가는 데 무려 19일을 소요했고, 위화도에서도 불어난 강물을 핑계로 14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려 33일을 미적거린 셈이었으니 장마가 지기를 목매어 기다린 사람이 아니고는 보여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이 그동안 한 일은 서경에 장계를 띄워 국왕 우왕과 최영에게 원정의 재고를 요청한 것뿐이었는데, 이때도 이성계는 4대 불가지론을 재차 들먹였다. 그는 이때 특히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다’는 점을 역설했으나 기실 이것은 싸우기 싫다는 소리와도 진배없는 말이었다. 그 같은 악조건은 상대인 명나라 역시 같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염려된다'는 점도 매 한 가지 소리였다. 


    아무튼 그것이 받아들여질 리 없었을 터, 결국 마음을 굳힌 이성계는 조민수를 회유해 군사를 돌이켰다.(엄연한 명령 불복종이자 쿠데타였다) 그리고 그 군대를 이끌고 수도 개경으로 쳐들어왔다.(서경인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갈 때 19일이나 걸렸던 것이 수도 개경으로 올 때는 불과 9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미 고려의 군사를 다 내준 터, 최영에게는 그들과 맞설 병력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고려의 정예병은 원정군에 모두 포진된 마당이라 싸움에 있어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개경 도성은 쿠데타군에 의해 이틀 만에 함락되었고 최영은 붙잡혀 참수되었다. 우왕 또한 폐위되어 그의 아들 창(昌)이 왕위를 이었으나, 1389년 그 역시 폐위되고 이성계의 꼭두각시인 공양왕이 뒤를 이었다. 아울러 이때 이성계와 같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조민수도 제거되었다.



    위화도 회군 도해


    중국 땅에서 바라본 압록강 위화도



    당연히 공양왕도 얼마 가지 못했다. 1392년 공양왕을 폐한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스스로 고려의 왕위에 올랐다. 그에 앞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잘하면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역성(易姓)의 대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바, 고려의 거목인 정몽주를 타살함으로써 마지막 걸림돌을 없앴다. 아울러 정도전을 비롯한 이른바 신흥사대부들은 자신들이 구상했던 전제(田制)개혁을 실시하여 지난 권문세족들의 세력 기반을 박탈하였다. 일러 과전법(科田法)이라는 새로운 토지분배 방식으로서 기득권 세력의 땅을 뺐은 것이었다. 조민수가 제거된 것도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가장 먼저 한 일은 명나라에게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알리고 명태조 주원장에게 자신의 즉위에 대한 승인을 요청한 일이었다. 아울러 그 새로운 나라의 국호를 선택해달라고 ‘조선(朝鮮)’과 ‘화령(和: 이성계의 탄생지)’의 각각 두 글자를 적어 보냈다. 주원장은 유서 있고 아름다운 이름이란 이유로(아마도 중국인 기자가 찬탈한 '기자 조선'을 염두에 두었던 듯) 조선을 선택했고, 그것이 곧 나라의 국호가 되었다.(1393년, 태조 2년 2월) 즈음하여 이성계는 나라의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스스로 제후의 나라를 자처하는 3 문(門)의 정궁(正宮)을 지었다


               

                        

              한양성의 정궁인 경복궁의 구조. 정문인 광화문부터 본전인 근정전에 이르는 문이 모두 3개다. 


                             


               

               북경성의 정궁인 자금성의 구조. 정문인 천안문부터 본전인 태화전에 이르는 문이 모두 5개다.



                

    지금은 모두에게 잊혀진 고려의 정궁 만월대. 정문인 주작문에서부터 본전인 회경전에 이르는 문이 모두 5개로, 고려가 황제국의 지위를 가진 자주국이었음을 증언한다. 


                

                  개성 고려박물관의 만월대 모형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방문 기록인 '고려도경'을 보면 서긍은 본전인 회경전에 도착할 때까지의 다섯 개 문의 규모에 적이 놀란다. 사진은 회경전 앞 돌계단으로, 사진 속 설명대로 규모가 너무 커서 4개의 돌계단을 모두 담을 수 없었다 위의 것은 국내에 있는 모든 사진 중에서 3개의 계단을 담은, 가장 넓게 찍은 거의 유일한 사진이다.



      

      만월대 출토 용두


      

      수창궁 출토 용두

      

       만월대에서 출토된 금속활자들



    명태조 주원장은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고려가 쳐들어온다고 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었는데, 그 정벌군의 대장이란 놈이 오히려 제 나라를 쳐들어가 원수들을 제거하였음은 물론 요동 땅에서도 아예 손을 뗐던 바, 주원장으로서는 정말이지 하늘이 내려주신 놈이었다.(실제로도 그런 발언을 하였다) 게다가 왕이 된 이성계란 자는 처음부터 바싹 꼬리를 내리고 아부하기 바빴으니 이른바 사대문서(事大文書)인 표전문(表箋文)을 올려 억만년 동안의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주원장은 문체가 불손하고 자기를 비하하는 글자를 썼다 해서(주원장은 자신이 거지 출신이요, 승려 출신이라는 데 심각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온 사신들을 옥에 가두고 글을 쓴 장본인을 명나라로 압송하라고 을러댔다. 


    아울러 주원장은 과거 고려의 요동정벌에 놀란 때문인지, 만일 너희가 말을 안들으면 수군과 육군을 동원해 단숨에 조선 땅을 밟아버리겠다는 협박을 수시로 해댔던 바, 이 기회에 대륙을 넘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어놓겠다는 수작인 듯 보였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찍소리도 못하고 그저 머리를 조아려대기 바빴으니, 이렇게라도 대국에게 왕조의 교체를 인정받아 국내에 있어서의 왕권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자 이에 재미를 들렸음인지 주원장은 조선에 대해 더욱 무리한 조공을 강요해댔고, 그러면서도 조선국왕의 금인(金印:옥새)과 고명(誥命:황제의 승인서)만큼은 끝내 내려주지 않아 이성계는 죽을 때까지 대외적으로는 왕의 칭호를 얻지 못한 채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師)라는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호칭으로 불려야 했다.(그야말로 굴욕이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3/Hongwu.jpg

    주원장의 초상(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이런 와중에 또 한 번의 표전문 사건이 일어났다. 주원장의 트집 이유는 앞과 비슷한 경우였는데,  이번에는 그 도를 더해 조선의 사신을 잡아죽이고 다시 글을 쓴 자의 명나라 호출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번에 글을 쓴 사람은 다름아닌 정도전이었다. 이에 난처해진 이성계는 계속 다른 사람들을 보내 무마하려 들었으나 보내진 사신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던 바, 그렇게 죽은 사신 김악향의 아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다 미쳐버렸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명나라에 가지 않고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하더니 어느날 이성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그간 신(臣)이 따로 진법(陣法)을 연구하고 이에 맞춰 군사들을 훈련시켰으며 아울러 몇 년치의 군량을 확보해 놨습니다. 이번에야 말로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때이옵니다.'


    이 기회에 다시 요동을 정벌하여 고구려의 옛 강역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로서는 이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터, 이번에는 그가 대답 주기를 차일피일해댔는데, 그러자 정도전이 다시 글을 올렸다. '외이(外夷: 변방 오랑캐)가 중원을 공격해 차지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거늘, 태상왕(이성계)께서는 왜 결정을 못내리고 미적대고 있는가'하는 내용으로서, 이번에는 요동을 넘어 아예 중원을 차지하자고 졸라댄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정벌을 위해 삼군부(三軍府) 군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변경의 성들을 구축시킴은 물론 양계(兩界: 북계와 동계)에 군량미를 옮겨 비축하는 등 전쟁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성계보다도 그 아들 이방원이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사병(私兵)을 키우며 이제나저제나 왕위에 오를 날만을 고대하고 있던 인물이었던 바, 자신이 양성한 사병들을 혁파하여 삼군부의 군인으로 만들려는 정도전이 결코 달가울 리 없었거니와 그의 힘이 커지는 것 또한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로 요동정벌이 단행된다면 목매어 기다리던 자신의 왕위 계승에의 충분한 방해거리가 될 터였다. 이리하여 이른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해버렸던 바, 조선의 요동정벌과 대륙진출에의 꿈 또한 영원히 소멸돼 버리고 말았다. 



    사대주의의 개척자 이성계의 초상(태조 어진의 복제품)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



    이후 조선은 애오라지 중국을 사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국은 왕이 즉위하면 중국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저들이 몽니를 부려 즉위를 허락하지 않으면 몇 번이건 몇 년이건 간에 매달려 간청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때마다 알랑방귀 일색의 표전문을 올려야 했는데, 이것이 저들의 마음에 차면 다행이거니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또 앞서와 같은 수모를 되풀이해 겪어야 했다. 어디 그뿐이랴. 이 중국에 대한 사대만을 믿고 국방을 게을리한 결과, 뜻하지 않은 왜구의 침입으로 무려 7년 동안이나 강토의 백성들이 애꿎은 피를 흘려야 했는데, 이때 도와주겠다고 온 저들 명나라 군인들의 횡포는 오히려 왜구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조선 관리들은 뺨을 맞고, 저들의 가마를 메야 했으며, 배고픈 백성들은 배불리 먹다 게운 저들의 토사물을 먹어야 했다. 또 그마나도 걸리면 발길질을 당했다. 


    이후 저들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망했는데, 그때도 소중화(小中華)를 표방하며 사대의 명분만을 외치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호되게 당해, 임금이 얼어붙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찧어야 하는 청사에 길이 남을 치욕를 겪어야 했다. 이소역대불가(以小逆大不可)라는 이성계의 주장이 무색하게 만주 변방의 소국 청나라는 대국 명나라를 공격해 결국은 그 큰 나라를 모두 빼앗았는데, 그 분수령이 되었던 사르후 전투(1619년)에서의 병력은 명군(軍)은 무려 16만, 청 군은 4만 5천에 불과하였다. 청군은 병력은 과거 230년 전, 이성계가 이끌고 갔던 요동 원정대 5만의 군사보다 적은 수였다. 




    인테넷에서 사르후 전투를 검색하면 바로 위와 같은 지도를 만날 수 있는데, 어느 지도를 보든 과거 이성계의 요동정벌 지도와 별반 다를지 않은 모양새를 보게 된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랐으니, 사르후 전투 후 청나라는 명나라를 명망시키고 중국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한 반면, 요동에서 철수한 조선은 500년 내내 중국에 시달리다 결국은 일본에 의해 망하고 만다. 



    명나라가 망한 후 조선에서는 북벌을 해 청나라와 싸우자는 일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언뜻 대견하고 기특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보다 더 웃기는 짬뽕이 없다. 북벌로써 청나라를 정복해 다스리자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상국(上國)인 명나라에게 돌려주자는 이도저도 아닌, 그야말로 아무거나 막 넣어 만든 웃기는 짬뽕에 더도 덜도 아닌 주장이었다. 이것이 조선 지배층의 생각이었고 사대부들의 생각이었는데, 그나마 성사되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이상의 북벌론은 언제 없었졌는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후 조선을 괴롭힌 것은 중국보다 일본이었다. 나라의 쇄신에 성공한 그 왜구들은 일개 번국(藩國)의 영주들조차 정한론(征韓論)을 들먹이더니 제국주의 일본의 정책으로까지 승화돼 결국은 조선을 삼키고 말았다. 또 그 와중에 저 청나라는 제 나라 망해가는 줄도 모르고 조선에 대한 종주국이요 상국의 행세를 하겠다며 덤벼들었는데, 그때까지도 중국에 목을 매고 구국(救國)의 동아줄처럼 붙들고 늘어지는 벼슬아치들과 위정자들도 부지기수였던 바, 그와 같은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 지경이었다. 이상의 것들을 한숨 속에 바라본 한말의 선각자 박은식 선생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조선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여 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이 조선일 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다.…. 어릴 때에 벌써 머리 속에 노예정신이 깊게 뿌리 박혀, 평생의 학문이 모두 노예의 학문이고 평생의 사상이 모두 노예사상이다. 이와 같이 비열한 사회에 처하여 소위 영웅자(英雄者)가 누구이며, 소위 유현자(儒賢者)가 누구이며, 소위 충신자(忠臣者)가 누구이며, 소위 공신자(功臣者)가 누구이며, 소위 명류자(名流者)가 누구인가? 필경 노예의 지위일 뿐이다.”


     

    박은식 선생(1859-1925)의 서거를 보도한 중국 신문기사(1925. 11. 4/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나라는 망해도 역사는 망하지 않는다(國可滅 史不可滅)'는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역사에는 가정이 통용되지 않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가끔 이성계의 가상 요동정벌을 논한다. 그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명나라를 들이쳤다면 어떻게 됬겠느냐는 가상의 과거를 논함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렇다 저렇다 할 말들이 많겠지만 나는 그 성패(成敗)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다는 다만 우리의 선제공격으로 대국과 한판 붙을 수 있었던 역사상의 유일한 기회를 놓친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후 500년 내내 사대의 길만을 걷다 망한 조선이란 나라가 그저 불쌍할 따름이며, 아울러 그들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주자(朱子) 성리학의 길이 결국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이었다는 것이 그저 어이없을 따름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우리의 안방 극장에는 커다란 소재를 제공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몇 번이고 리바이벌돼 제작, 방영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가련한 사대주의의 시작이 그저 통탄스러울 뿐이다. 아래의 드라마도 그 속을 알고 나니 불편했다. 이 영화에서 미국인 네이던 알그렌(톰 쿠르즈)과 같이 싸우는 영화 속의 이 멋진 '라스트 사무라이'는 과거 정한론(征韓論)을 맹렬히 주장했던 사쓰마 번주(藩主) 사이고 다카모리다. 얼마나 허약해 보였으면 이같은 변방의 일개 번주마저 조선을 넘보았을까?(☞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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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