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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발 인물열전(천자문의 저자는 누구인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16. 07:30

      주흥사와 천자문


    한글 전용화와 더불어(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어 간자체의 상용화와 더불어) 이제는 일견 사문화(死文化)된 느낌도 들지만, 불과 2~30년 전만하더라도 ‘천자문(千字文)’은 최고의 한문 독본(讀本) 교재였다. 그리고 그 독본의 유구함은 적어도 1500년 이상은 될 터, 405년 백제의 왕인 박사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증명한다(왕인 박사의 기록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본서기 속일본기 고사기 등 일본 사서에 실려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한반도로부터의 한자 전래설을 신봉한다)



    일본 오사카부 히라가타시에 있는 왕인 박사의 묘소와 입구의 백제문.


    왕인 박사가 1600년 전 백제 아신왕 때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는 안내문 내용이 한글과 함께 써 있다. 


    왕인 박사의 묘. 



    일반적으로 이 천자문은 중국 양나라(502-557년) 때 주흥사(周興嗣)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저작 과정은 중국 남조(南朝) 시대의 사서인 '남사(南史)'에 실려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스토리는 '남사'의 것이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규경은 남사 주흥사전의 내용에 서우향 등이 쓴 잡설(주흥사가 왕희지 탁본의 글의 차운해 시를 짓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칼과 수염이 허예졌다는) 등을 섞어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만든 듯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주 연문 장전산고'. 오주 이규경이 쓴 잡학사전으로 서울대 규장각에 필사본 56권이 전한다.  



    중국 남조(南朝) 시대의 양나라 무제(502-549년) 때 주흥사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전한(前漢) 시대의 대학자 주감(周堪)의 후손으로 출중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그 또한 학문적 자부심이 남달랐다. 이에 그는 주변의 다른 학자들과 부딪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어느 날 운 나쁘게도 황제인 무제(武帝)와도 시문(詩文)을 갖고 부딪치게 되었다. 양 무제는 무식했던 무장(武將) 출신의 역대 남조의 황제들과 달리 학문적 조예가 깊던 자였고 자신 스스로도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는데, 왕희지의 시문 해석에 있어 주흥사의 지적질을 당하게 됐던 것이었다. 무제는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 바,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주흥사에게 다음과 같은 징벌을 내렸다.


    “뭐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그럼 내가 숙제를 하나 내마. 1000자의 글자를 갖고 사언고시(1구 4자의 시)를 짓되 그 시에는 똑 같은 글자가 하나도 들어가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한은 내일 아침까지다. 네가 내일 조회(朝會)때까지 그 시문을 지어 오면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자신이 망신당한 데 대한 분풀이였다. 1000자로서 4자로 된 시를 짓는다면 총 250구가 될 터, 그걸 하룻밤 만에 짓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욱이 같은 글자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게 지으라는 건 사실 집에 가 죽으란 소리와 진배없었다.


    “허-.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해갖고.....”

    집으로 돌아온 주흥사는 자신의 행동을 책망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일 터, 책상을 끌어 앉아 먹을 갈아댔지만 막상 시를 짓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날이 저물도록 아무런 시도 짓지 못했다. 도저히 250구의 시를 지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는 깊은 시름 속에 문득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날은 완전히 저물어 하늘은 캄캄했고, 달빛에 비친 땅은 누리끼리 빛나고 있었다. 주흥사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습을 옮겼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스름하구나.(天地玄黃)’  

    이어 하늘을 보니 저절로 다음 글이 이어졌다. 

    ‘이 우주는 넓고 거칠도다.(宇宙洪荒)’

    다음 글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해와 달이 차서 기울었으며,(日月盈昃) 별자리는 넓게 펼쳐지도다.(辰宿列張)’ 

    다음 글의 연결도 자연스러웠다.

    '추위가 오면 더위가 가고,(寒來暑往) 수확한 것은 겨울에 저장한다(秋收冬藏)'..... 

    이렇듯 자연의 섭리를 이어가던 그는 글이 막히면 아무 거나 갖다 붙였다. 

    '과일 중에는 배와 사과가 맛있고,(果珍李柰) 채소 중에서는 겨자와 생강이 맵다.(采重芥薑)' 

    '바닷물은 짜나 강물은 담수이며,(海鹹河淡) 비늘이 있는 것은 물속에 있고 날개가 날린 것은 하늘을 난다.(鱗潛羽翔)'.....


    이런 식으로 탄력이 붙은 글은 이후 역사의 사례를 들기 시작하자 더욱 거침없이 이어졌고 글도 장중해졌다.

    ‘복희씨는 용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짓고, 신농씨는 불의 이름으로 지었으며(龍師火帝) 소호는 새의 이름으로 짓고, 황제는 사람의 이름으로 지었도다(鳥官人皇)

    '이때 처음 문자가 만들어졌고,(始制文字) 복식이 제정되었도다.(乃服衣裳)'

    '자리에서 물러나 나라를 사양한 자는 요임금과 순임금이고,(推位讓國) 백성을 위로하고 죄를 물은 자는 주나라의 무왕과 은나라의 탕왕이라(有虞陶唐)'.....


    하지만 그렇다고 일사천리로 글을 짓지는 못했으니, 무엇보다 같은 글자를 두 번 쓰지 못하는 것이 난관이었다. 문장의 구성 또한 그러했으니 어조사(語助辭)를 넣어 편히 글을 짓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동어의 반복이 될 터인즉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에 필력이 뛰어난 그였고 게다가 목숨이 달려있는 일이었던 터,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글을 지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234구 완성되자 나머지 8구는 왕을 빗대 꾸짖었고,

    ‘고루하고 배움이 부족하면,(孤陋寡聞) 어리석고 몽매한 자와 똑같이 꾸짖는도다.(愚蒙等誚)' 

    마지막 8구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간절했던 어조사를 채워 넣는 것으로 모든 글을 끝냈다.

    '말을 돕는 데 쓰는 어조사는(謂語助者) '언·재·호·야와 같은 것이다.(焉哉乎也)'

    나름 분풀이를 한 것이었다.


    이렇게 1000자의 글을 완성하고 나니 어느덧 날이 밝아 있었다. 그는 대충 의관을 정제한 후 자신이 지은 글들을 주섬주섬 말아들고 입궁하여 황제에게 나아갔다. 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주흥사가 올린 글을 향해 꽂힌 가운데 무제가 서둘러 그 글을 펼쳤다. 자신의 명령 그대로 4구로 이루어진 시들은 모두 250구, 정확히 1000자였다. 무제는 입을 쩍 벌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는데, 사람들은 그 순간 다른 일로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주흥사의 머리가 하룻밤 만에 백발이 되었던 까닭이니 이것이 밤새의 노심초사 때문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가 지은 그 1천자의 시문을 따로 백수문(白首文)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 글은 똑같은 글자가 없는 까닭에 이후 아동들의 훈학(訓學)에 쓰였다. 



      천자문에 대한 엄청난 반전


    이상이 천자문에 관한 풀 스토리로, 그 내용에 있어 별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알려진 위와 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놀랍게도 모두 사실이 아니다. 우선은 그 시기가 맞지 않다. 이미 짐작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주흥사라는 사람이 이 책을 쓴 시기, 즉 중국 양 무제(502~549년)의 시기는 왕인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 준 405년, 즉 백제 아신왕(392-405)의 시기보다 무려 100년이나 뒤진다. 만일 그 천자문이 동일한 내용이라면 주흥사 이전 이미 책이 존재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100년의 갭은 천자문 곳곳에서도 나타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천자문에는 중국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일컬어지는 3황 5제 때를 시작으로(앞서 말한 龍師火帝 鳥官人皇), 후한 시대의 여포와 마균, 서진(西晉) 시대 초기 인물인 혜강과 완적까지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포는 활을 잘 쏘았고 웅의료는 공을 잘 다뤘으며(射僚丸) 혜강은 칠현금 연주를 잘했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다(嵇琴阮嘯)’


    혜강과 완적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로 잘 알려진 인물들인데, 그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이후 서진과 동진, 그리고 양나라에까지 이르는 100년 동안의 인물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기타 등등으로 보면 천자문의 저자는 주흥사가 아니라 위나라 문제(文帝), 즉 조조의 아들 조비 치세 당시(220-226) 상국(相國: 재상)이었던 종요(鍾繇)의 설이 유력할 듯싶다. 사실 이것이 천자문의 저자에 대한 중론이기도 한 바, 그 종요에 대해서는 위와 흡사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알려진 바와 같이 조비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폐위시키고 위나라를 세워 황제에 오르니 그가 곧 위문제(魏文帝)였다. 그리하여 한나라 400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때 종요는 한나라의 종언(終焉)과 헌제의 폐위를 매우 가슴 아프게 여겼다. 그런데 종요의 그 같은 연민이 결국은 조비의 귀까지 들어갔고 이에 조비가 참수를 명했으나 주위 사람들이 종요의 문장과 학식을 아깝게 여겨 이를 말렸다.(종요는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에 조비는 다음과 같이 명을 고쳐 내렸다.


    “글자 1천자를 가지고 4언 고시를 짓되 그 글에는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 원리 및 대자연의 법칙,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도덕적 근본 원리가 모두 포함돼야 한다. 단, 그 1천자 중 똑같은 글씨가 한 자라도 들어가면 안 되며, 그 기간은 단 하루다.”


    이는 마치 조비가 동생 조식을 죽이려 이른바 칠보시(七步詩)를 짓게 한 삼국지의 내용과 흡사해 언뜻 신빙성이 실린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자면 칠보시의 출전은 연의이고, 그 내용의 유사함은 오히려 픽션의 개연성을 느끼게도 해준다. 아무튼 종요는 이와 같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 250구(句)로 된 1000자의 시를 올렸던 바, 이때 사람들이 하룻밤 만에 그의 머리카락을 보고 그 글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종요의 천자문 저자설을 찾아볼 수 있는 글



    이상의 이야기는 천자문이 종요의 저작이라는 근거가 됐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출전이 명확치 않고, 위와 같이 따져보면 그 또한 의심의 여지가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때의 종요의 나이는 70살로 셀 머리라면 벌써 세야 옳았을 듯하며, 무엇보다 위의 혜강과 완적을 고사를 인용할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헤아려보자면 이때 혜강의 나이는 불과 8살이요, 완적의 나이는 20살이다. 아직은 무슨 업적을 남기거나 유명세를 탈 나이가 아니다.


    여기서 혜강(嵇康; 223-262)이란 인물은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대표 현인으로 술을 좋아하고 기행을 일삼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위나라 공녀(패목왕의 딸)와 결혼한 엄연한 황실의 부마로서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벼슬아치였다. 그는 이후 위·진(魏·晉) 교체기에 당대의 혼란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하남성 죽림에 은거하였으나, 이후 진나라 무제(武帝) 사마염과 사돈을 맺고 다시 현실 정치에 참여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내내 야당(野黨)의 자세로 국정에 임했던 바, 외부로부터는 큰 신망을 얻었지만 내부로는 많은 정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앞에서 말한 종요의 아들인 종회(鍾會; 등애와 함께 촉나라를 멸망시킨 무장)의 참소로 사사(賜死)되는데, 그가 죽을 때 연주한 칠현금 곡인 광릉산(廣陵散)은 음악사적으로 유명하다.


    ~종회는 우리나라와도 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인물로서 다름 아닌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의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다. 알다시피 관구검은 유주자사(幽州刺史) 당시 고구려의 동천왕이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치고, 내친 김에 고구려를 정벌하여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켜 동천왕을 옥저 땅으로 몰아낸 장수인데, 이때 세운 공적비인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가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다. 이후 관구검은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의 전횡에 대항하여 문흠(文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종회와 사마소가 이끄는 대군에 패퇴하다 화살을 맞고 죽는다. 이 과정은 정사에 자세하지만 연의에도 주요 대목으로 등장한다.



    길림성 오녀산성 박물관에 있는 관구검기공비.(요녕성 박물관에도 같은 비가 있는데 어느 쪽이 진품인지 불분명하다)


    관구검기공비의 탁본. 관구검기공비는 1906년 만주 집안현 판석령 도로공사 중 우연히 발견됐다. 



    말했다시피 종요가 당시 8살이었던 혜강을 자신의 시에 거론했을 리는 만무한즉 이것만으로도 종요는 천자문의 저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역시 말했다시피 혜강과 완적에서 끝나는 인물 열전으로 보자면 주흥사는 저자에서 더욱 멀어진다. 그렇다면 천자문의 저자는 누구일까? 추정하거니와 나는 그 저자를 종요의 큰 아들이자 종회의 한 살 터울 형인 종육(鐘毓;226-263)으로 보고 있다. 종육은 조비의 아들 조예의 치세에 문신으로 입신하였는데, 14살의 약관에 산기시랑(散騎侍郞)에 오른 인재였다. 삼국지 종육전에 보면 그는 관직에 있을 때 민생을 보살피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고, 촉나라의 제갈량이 기산으로 진출했을 때 직접 출전하려는 위 황제 조예를 말려 화를 미연에 막았으며, 관구검의 반란 때도 대장군 사마소를 도와 공을 세웠다. 말년에는 청주자사와 형주자사 등을 역임했다.


    그 말년의 전후, 촉나라를 정복한 그의 동생 종회는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의 전횡에 반발, 제갈량의 심복이었던 강유(姜維)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촉나라에서 독립하려다 감군(監軍) 위관(韋瓘)의 공격을 당해 죽고 만다. 나의 추정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니 이때 종육은 동생 종회로 인해 죽음의 목전에까지 이르나 앞서 말한 그간의 공적과 자신의 문필로서 그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종육이 황제를 알현할 때 무섭고 두려워 땀을 물같이 흘렸다는 시기에 맞지 않는 삼국지 종육전의 일화도 당시 상황의 반영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가 죽은 나이는 37세, 천자문의 저술로 허예진 머리에 뭇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나이 대이다. 아울러 그는 혜강과 동시대를 살다가 인물로, 혜강의 칠현금 연주 능력과 완적의 휘파람 솜씨를 논할 자는 천자문의 저자 후보군 가운데서는 오직 종육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껏 천자문의 저자로 회자되는 주흥사는 천자문과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는 여러 사서에 나오는 대로 양무제의 명으로서 전대(前代)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글자 중에서 1000자를 집자(集子)에 천자문을 편집한 인물로 여겨진다. “양서(梁書)” ‘주흥사전(傳)’에 나오는 ‘차운왕희지서천자(次韻王羲之書千字)’, 즉 ‘왕희지가 쓴 글자의 운을 빌려 만든 1000자’도 바로 이를 말함인데, 그 1000자를 집자하느라 하룻밤 만에 머리가 허예졌을 것 같지는 않다. 



    왕희지 행서 천자문 


    종요의 선시표(宣示表)종요는 해서의 대가로서 유명하다.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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