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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더 대왕과 티레 전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12. 09:21

    *앞서 올린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1편이 바이러스에 오염돼 삭제시키고, '알렉산더 대왕과 티레 전투'라는 제목으로 다시 글을 썼습니다. 혹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2, 3편의 전편을 찾는 분이  계시면 이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를 말할 때 흔히들 부르는 알렉산더(Alexander)는 영어 이름이고 원래는 알렉산드로스(Alexsandros III, BC 356-323)이다. 본 블로그에서는 인명이든 지명이든 본래의 이름으로 적으려 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알렉산드로스를 택하겠다. 원어명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은 일반적인 일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워낙에 영어 번역본의 영향이 커 대부분의 명칭이 영어식이었다. 예를 들자면 로마 장군 줄리어스 시저는(Julius Caesar)는 그 영어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려왔지만 지금은 본래 이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아니면 적어도 율리우스 케사르 정도로는 불린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만일 그들이 지금 살아 있어, 지나갈 때 영어식 이름을 부른다면 알렉산드로스는 그나마 발음이 비슷해 돌아볼지 모르지만 아마도 카이사르는 그냥 지나칠 것이다. 아무튼 사설이 길었으니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자.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으며 BC 336년 아버지 필립포스 2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20살 때의 일이었다. 따라서 그 혈기가 왕성했을 것임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일인데, 사실 그 전부터 그의 정복욕은 대단하였던 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아버지 필립포스 왕의 승전보를 들을 때마다 기뻐하기는커녕 이렇게 불평했다는 것이다. 


      "이런 젠장! 이러다간 이것저것 다 빼앗겨버리고 정작 내가 정복할 땅은 하나도 안 남겠어."


    사실 그 아버지 필립포스 2세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마케도니아는 본시 발칸 반도 북쪽에 위치한 변방국으로서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 테베의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였다.(그래서 왕자 시절에는 테베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그는 거기서 그리스의 군사학을 익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나라를 크게 키워 BC 337년, 자신이 만든 코린트 동맹의 맹주(의장국)로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의 전 도시국가를 주무를 수 있었다. BC 338년 테베·아테네 연합군을 격파한 케로니아(그리스 중부 델포이 동쪽 지방) 전투가 바로 그 분수령이었다. 



     필립포스 2세의 흉상


     

    그 코린트 동맹으로써 마케도니아는 변방의 소국에서 명실공히 발칸 반도의 최강자로 등극할 수 있었는데, 그저 말이 좋아 동맹이지 사실은 발칸 반도의 거의 모든 나라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동맹국은 타 동맹국이 군사력을 필요로 할 때 이에 응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군사적 주종관계인 셈인데, 사실 군사력을 빼앗기고나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별로 없다.(1991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할 때 그리스 정부가 국호의 사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이같은 역사적 이유에서였다)


     

    1991년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위치

    면적은 남한의 1/4, 마케도니아인이 국민의 대종을 이루며 마케도니아어가 국어이나 남슬라브어도 쓰인다.

     

    수도 스코페 시내의 알렉산드로스 동상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그리스의 국호 사용 반대로 2018년 결국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갈등의 정점에 이 사람이 있다.



    이렇듯 그리스 제국을 평정한 필립포스는 이제 그들을 이끌고 소아시아, 즉 페르시아 제국의 땅으로 진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바, 이는 그에 앞서 벌어진 연회에서 보여준 알렉산드로스의 거친 행동으로 알 수 있다.


    당시 필립포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이혼을 하고 클레오파트라라고 하는 어린 후궁을 새 왕비로 맞았는데, 이 결혼 피로연에서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와 큰 갈등이 있었다. 이에 술김에 제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칼로 찌르려다 미끄러져 넘어졌고, 이를 본 알렉산드로스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내뱉었다. 


      "보시오! 이제 바다를 건너가 세상을 정복하려는 분이 겨우 저 자리에서 이 자리를 건너뛰지 못해 쓰러진 모습을!"


    그리고는 제 어머니 올림피아스를 에피루스(그녀의 친정 나라)로 피신시킨 후 자신도 크로아티아로 도망가 숨어버렸다. 부자는 얼마 후 화해를 하긴 했지만 앙금은 남아 있었는데, 그즈음 아버지가 부하 장수에게 암살당했던 바, 황망히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까닭에 그는 부왕을 살해했다는 소문에 오랫동안 시달리게 된다)


    그렇지만 그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곧바로 동방원정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필립포스 2세가 죽자 우선은 테베와 아테네가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반란을 진압하고 북방으로 나아가 도나우 강변 일대의 야만족 반란을 진압했는데, 또 다시 테베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데 재차 시간을 빼앗겼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철저히 파괴하고 3만 명의 시민을 노예로 팔았으며 6천 명 이상을 처형시켜 응징하였다. 



    테베를 응징하는 알렉산드로스를 그린 현대의 일러스트레이션



    반면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은총을 베풀었는데, 이는 코린트의 이츠무스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코린트 동맹의 맹주로 천명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곧 벌어질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알렉산드로스를 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 맹주 대관 축하연에 많은 하례객들이 몰려들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진대 이때 저명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만이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이에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찾아가 소원을 물었다가 '햇빛을 쬘 수 있게 좀 비켜달라'는 대답을 들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그리스 코린트 항 인근 공원에 이 일화를 담은 동상을 세웠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자국의 군사와 동맹국의 군사를 이끌고 드디어 역사적인 동방 원정에 나선다.(명분은 과거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한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 첫 전투가 그해 5월 헬레스폰토스 해협 건너 그라니코스 강가에서 벌어진 그라니코스 전투였다. 마케도니아·그리스·트라키아 연합군 4만 7천 명과 페르시아군 2만 4천 명, 그리고 그들이 고용한 용병 2만 명이 엉겨붙은 대접전이었다. 



    그라니코스의 위치와 알렉산드로스의 진격로


    전투가 벌어졌던 그라니코스 강


    그라니코스 전투 도해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군과 파르메니온의 그리스·트라키아 연합군의 여러 공격 루트가 그려져 있지만, 그라니코스 전투는 작전에 의한 것보다 백병전에 의해 결정난 것으로 보인다. 즉 마케도니·그리스·트라키아 연합군의 전투력이 페르시아 군에 앞섰던 것이다. 


    그라니코스 전투를 그린 19세기 그림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군대와 필사의 백병전을 벌였던 듯, '플루타르쿠스 영웅전'에는 다음과 같은 생생한 기록이 묘사돼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손에 든 둥근 방패와 투구 좌우에 꽂은 새털 장식으로 인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삽시간에 그의 주위에 사방에서 적병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다가 어느결에 배막이 갑옷 한 자락에 적병이 던진 투창이 꽂혔다. 그러나 다행히도 경미한 상처만을 내었다. 그런데 그때 페르시아 장수 로에사케스와 스피트리다테스가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스피트리다테스의 공격을 잡싸게 피하면서 나머지 한 사람, 배막이 갑옷을 단단히 갖춰 입은 로에사케스를 창으로 찔렀다. 너무나 힘껏 찔럿던 까닭에 자기 창이 부러지자 재빨리 칼을 뽑아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이들 두 사람이 맞서 싸우는 동안, 되돌아서 온 스피트리다테스는 옆으로 바짝 다가와서 등자(발걸이)를 딛고 안장 위로 솟구치면서 큰 손도끼를 들어 알렉산드로스의 투구를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투구 꼭지는 한쪽 새털 장식과 함께 갈라져 날아갔다. 그러나 투구 밑바침 쇠가 튼튼해서였는지 도끼날이 머리에 닿았다 뿐, 알렉산드로스는 위태했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스피트리다테스가 도끼로 내리찍으려 했다. 그 찰나, 알렉산드로스의 부장 클리투스가 재빨리 달려들어 단번에 창으로 짤러죽였다. 그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의 칼이 로에사케스의 옆구리를 갈랐다. 


    기병대가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동안 마케도니아의 밀집방형진 부대(팔랑크스)가 강을 건너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양군의 보병이 진격해 와 대전투가 벌어졌다.....


    마치 무협지를 보는 듯한 플루타르쿠스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에의 기록이다. 아무튼 그라니코스에서 승리를 거둔 알렉산드로스는 순조롭게 내륙으로 진출한 후 카리아(CARIA) 일대의 저항군을 섬멸한 후 다시 프리기아를 점령한다.(맨 위의 진격로 참조) 이 프리기아의 수도가 고대의 왕 미다스의 전설이 어린 고르디움이었다.(미다스 왕은 디오니소스 신의 도움으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만드는 재주를 얻었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제 딸마저 황금으로 변해버렸다) 


    곳 고르디움 성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산수유 나무의 껍질로 꼰 밧줄로 단단히 매듭져 묶어놓은 전차를 보게 된다. '누구든 이 밧줄의 매듭을 푸는 자는 세상을 정복하리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그 유명한 전차 밧줄로 '고르디우스의 매듭(The Gordian Knot)'이라 불리는 그것이었다. 이에 관해 대다수가 '이때 알렉산드로스가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렸다'고 알고 있고, 그에 관한 그림도 모두 아래와 같은 식이다. 그러면서 '어려운 일일수록 발상의 전환과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교훈으로써 쓰인다. 조금 다르게는 알렉산드로스의 급한 성격을 말해주는 일화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이자 부하 장수인 아리스토불루스의 말은 다르니, '알렉산드로스는 전차의 멍에를 붙들어맨 이음쇠에서 못 하나를 뽑아 버린 뒤에 그 멍에를 밑에서 잡아당겨 쉽사리 풀 수 있었다'고 말한다. 플루타르쿠스는 자신의 책에 이 두 가지 사례를 모두 적어놓았는데,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알 수 없다. 


    그 다음의 큰 전투는 BC 333년 11월 잇수스에서 벌어졌는데, 우리가 익히 보아 온 아래 그림의 싸움이 벌어진 곳이었다. 이 전투에 페르시아의 국왕 다리우스 2세는 1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직접 참전하였던 바, 알렉산드로스를 더 이상 내륙으로 진출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리우스는 이때 평원 전투를 피하고 잇수스 만(Issus Gulf)과 타우루스 산지로 둘러쌓인 협로를 택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군으로서는 평원 전투를 택하는 것이 백 번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그럴 경우 알렉산드로스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곳 잇수스를 선택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시리아에서 북상하고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이곳 협로에 몰아넣어 몰살시킬 의도였던 바, 그만큼 이번 전투에 자신감을 보였던 것이었다. 


    다리우스의 생각대로 됐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을 미리 읽은 알렉산드로스는 진군을 서둘러 잇수스를 지나쳤다. 그리고 피나루스 강을 건너가 대기를 하며 다리우스가 잇수스에 오기를 기다리다 그가 도착하기 무섭게 그 대군의 후방을 몰아쳤다. 적의 작전을 역이용한 것이었으니, 다리우스가 묘수라고 생각했던 잇수스 협로는 오히려 크게 불리해졌다. 상황의 불리함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보다 다리우스 자신일 터, 그는 부리나케 잇수스를 빠져나갔다. 사실 전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왕이 도망가는 것을 본 페르시아 군사들은 정신없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아래 그림의 상황은 이를 잘 말해준다)




    잇수스 전투를 그린 대형 모자이크화. 폼페이 로마 귀족 별장에서 발견된 벽화로, 지금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미술관에 전시돼 있다.(582X313cm) 


    자신감을 얻은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노려 공격하고,


    놀란 표정의 다리우스는 도망가기 급급해, 전차 모는 사람의 채찍이 바삐 휘둘러진다. 


    잇수스 전투 도해

    알렉산드로스(검은 실선)가 우회해 다리우스(붉은 실선)를 공격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대승을 거두었던 바, 플루타르쿠스는 이때 페르시아 군의 전사자가 11만 명이라 하였고,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전기를 쓴 로마의 아케메네스(AD 2세기)는 마케도니아 연합군의 전사자는 450명이며 알렉산드로스는 약간의 부상만 입었다고 적었다. 물론 과장은 있었겠지만 그리 지나침은 없어 보이는 전황이었다. 


    전투가 끝난 후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본영을 접수했는데,(소코이로 짐작됨) 그곳에는 다리우스의 모친과 아내, 그리고 아직 출가 전인 두 딸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에게 생필품을 충분히 지급하고 군사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던 바, 이는 훗날 다리우스 왕을 배신한 벳수스 총독 일당을 붙잡아 공개 처형한 일과 더불어 페르시아인의 칭송을 받았다. 이날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물건을 기꺼이 취한 것은 화려한 금장식의 욕조에 몸을 담근 일 뿐이었다. 


    잇수스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왕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고 내륙으로 진출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남쪽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지중해 일대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레와 가자를 점령하고 페니키아와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를 차례로 접수하였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동방 원정을 위한 후방 정리인 셈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으니, 페니키아의 티레 공성전은 200여 척의 함선이 동원된 해전과 육전이 함께 벌어진 장장 7개월 간의 전투였다. 


    그 전투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듯, 알렉산드로스는 티레를 점령한 후 도시를 철저히 파괴시켰다. 역사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티레 공성전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일반 병사와 똑같이 적진에 뛰어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그 전사자의 수는 마케도니아 군이 400여 명, 티레 군은 학살된 사람들까지 포함해 8천여 명, 그리고 시민 3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고 한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 무혈입성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때의 대대적인 응징에 대한 소문이 전해진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티레 사람들이 대부분 배를 타는 사람이었기에 소문이 쉽고 빠르게 전달되었으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티레의 위치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7개월 간의 전투가 벌어진 티레 시와 부속 도서의 규모이다. 위 지도에서 보다시피 티레는 레바논 남쪽의 작은 도시에 불과한데, 전투가 있었던 그 시절에도 이와 같은 작은 도시국가였다. 그 면적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레바논 전체 면적이 약 1만 km²(우리나라 경기도보다 작다)인 걸로 보면 아무리 넓었다 해도 우리나라의 시·군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 규모의 도시국가가 막강한 알렉산드로스 군과 장장 7개월 간의 전투를 벌인 것인데, 게다가 육지의 올드 티레(Old Tyre)가 함락된 후 옮겨 가 항전했던 티레 섬은 아래 지도에서 보다시피 그 최대 길이가 500m 남짓한 작은 섬이다. 





    알렉산드로스 군은 이와 같은 작은 섬의 공략에 오랫동안 애를 먹었던 바, 결국은 아래처럼 육지에서 섬에 이르는 700~800m의 제방을 쌓아 공격로를 만들고 그곳에 공성기를 설치하여 섬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섬을 포위한 함선 위에서도 집중 공격을 해댄 끝에 겨우 섬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군이 티레 섬 공략이 이처럼 애를 먹은 이유는 섬이 요새화된 까닭도 있었겠으나, 그보다는 티레 사람들의 강한 항전 의지 때문이었다. 





    아래의 그림과 설명은 모두 티레 사람들의 저항 의지가 대단했음을 말해주는 증언들인데, 그들의 저항에 얼마나 애를 먹었든지 알렉산드로스는 종국에는 헤라클레스가 나타나 자신을 도와주는 꿈까지 꾼다. 한편 이때 티레 군의 지휘자 바티스도 꿈을 꾸는데, 아폴론 신이 자신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알렉산드로스 쪽으로 가는 꿈이었다. 그러자 꿈 이야기를 들은 티레 사람들은 섬 안의 아폴론 신상을 꽁꽁 묶어 붙들어매고 알렉산드로스의 부역자라고 욕을 했다고 하는 바, 그들의 저항에의 의지를 기록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티레를 '바위'에 비유한 이 공격 도해(圖解)는 티레 공략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증언한다. 


    제방에서의 공성기 공격 및 포위한 함선에서 섬을 공격하는 그림.



    공성기에 대항하는 티레 사람들을 그린 그림. 


    치열했던 티레 공방전을 묘사한 중세의 그림.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곳 티레는 어떤 나라였는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티레(옛 이름은 티루스)는 옛 페니키아의 중심 도시국가로 일찌기 시돈, 아레크 등과 함께 도시 연맹체를 형성하였다. 토산물로는 희귀하고 값비싼 보라색 염료를 생산하였는데, 이것은 일대에서만 서식하는 뿔고동에서 재취한 것이었다. 티레 사람들은 이 염료와 무역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바, 기원전 12~10세기에는 지중해 전역으로 진출, 지중해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티레 사람들이 건너가 세운 나라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페니키아는 티레의 보랏빛 염료인 '포에니'에서 비롯된 비롯된 말로서, 훗날 로마와 3번이나 맞짱을 뜬 카르타고는 이곳 티레 사람들이 건너가 세운 국가였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말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으로, 여기서 도시는 티레를 이름이었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그 싸움을 포에니 전쟁이라 명명했는데, 바로 이 페니키아인과의 싸움이라는 뜻이었다. 


    아울러 문화의 수준 또한 매우 높아 일찌기 문자를 발명하였던 바, 오늘날의 영어 알파벳은 이들이 창조해낸 문자였다. 그것이 이들의 무역활동과 더불어 지중해 국가의 공용어로 쓰이게 된 것이었으니, 오늘날의 모든 유럽어는 이 테레의 문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까닭에 자신들의 문화적 자긍심 또한 높았던 바, 알렉산드로스의 침공 당시 '알렉산드로스가 미적 인식이 없다는 걸 인정하면 싸움 없이 항복할 것이다'라는 말로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티레 사람들은 마케도니아를 한낱 그리스 변방의 바바리안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으니, 저들과 비견할 수 없는 문화적 자존심과 자부심이야말로 자신들이 저항할 수 있는 힘의 베이스였던 것이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도시 북쪽에 그발이라는 도시도 건설하였다. 그발은 그리스어로 비블로스라 불렸는데, 성서를 의미하는 바이블의 어원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이곳 에서 발견된 아히림(Ahirim) 왕의 석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알파벳 문자가 바로 여기에 기록돼 있다. 아래 관 뚜껑의 22자 알파벳이 그것인데, 말하자면 티레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골치 아파하는 영어 공부의 원인 제공자인 셈이다.(약소국인 우리로서는 어느 나라 말이든 배워야겠지만) 





    베이루트 박물관의 아히림 왕 석관과 레바논 기념우표.



    페니키아 알파벳의 해독.



    이 티레가 알렉산드로스 군에 끝까지 저항했던 것은 페르시아를 돕고자 함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힘이 약화된 기화로 독립을 도모해보고자 함이었다. 원래 고대 티레의 중심지는 이 섬이 아니라 맞은 편 육지 조금 남쪽에 있었는데, 그들이 이 섬에 들어온 것은 우리 역사의 고려가 몽골의 침입 때 강화도로 천도한 것처럼 이 섬에서 결사 항전을 하고자 함이었다. 그 이유 역시 우리와 흡사했던 바, 저들이 육전에만 강한 것을 이용하고자 함이었고, 앞서 말한대로 저 야만족에게는 절대 항복할 수 없다는 민족적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흔히들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 때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이유를 불력(佛力)으로 환란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설명하나, 사실 이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판각을 지시한 사람은 당시 고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인데, 그가 무슨 샤먼(Shaman)도 아니거늘 종교 따위에 의지해 기복(祈福)했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가 강화도에 선원사(禪源寺)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판만대장경의 최초 판각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에 민심 돌리기의 일환이라는 생각은 읽혀지는데, 그것은 단순한 기복 신앙에서라기보다 우리의 높은 문화적 수준을 인식시켜 오랑캐에 대한 우월감을 심어주고자 했던 면이 더 컸을 것이다. 최우는 그와 같은 국민적 자존심과 자부심으로써 환란을 이겨내고자 했음이다. 

      

    아무튼 티레는 그렇게 함락되었고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수 안티고노스는 공격로였던 제방길을 넓혀 섬이 다시 요새화되는 것을 막았는데, 이후 세월이 흘러 토사가 쌓이며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침략이 지형까지 변화시켰고, 또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매우 희귀한 장소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변화된 티레의 지형(아래는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


      



    이처럼 티레는 우리나라처럼 걸핏하면 침략당하기 일쑤였고,(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가 이겼다면 사정은 달라졌겠지만) 더구나 그 지형마저 변해버렸는데, 그전에도 이집트 왕국, 앗시리아 왕 샤말, 바빌로니아의 네부캇네자르 2세 등의 공격을 받았으며 헬레니즘 시대 이후로는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당했다. 하지만 그 로마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의 이곳에 대규모 위락 타운을 형성하였던 바, 같은 레바논의 바알벡(Baalbek), 요르단의 제라시(Jerash)와 더불어 중동 지역에 찬란한 로마 유산을 남겨주었다. 



    개선문 거리


    바닷가 사우나의 열주(列柱)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전차 경기장이었던 히포드롬의 유적


    바닷가 로만 로드의 열주(列柱)


    당대의 상점가 흔적


     

    당대의 사람들은 개선문 거리나 바닷가 길을 걷다가, 바다가 보이는 대욕탕과 대 전차 경기장 히포드롬에서 놀이를 즐겼으며, 인근 상점가에서 쇼핑과 식음을 하였다. 가히 유흥의 끝판왕이랄까...... 하지만 아래의 대욕탕 유적과 옥타곤 건물 유적 등은 1990년대 초, 헤즈볼라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감행된 이스라엘 군의 폭격으로 크게 파괴되었고, 이어진 2006년의 공습으로도 공동묘지 유적 등이 파괴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었음에도...... 하긴 그들 이스라엘 군의 공격으로 민간병원, 학교 등의 공공시설들도 피괴되고 민간인들조차 마구잡이로 죽어나가던 시절이었으니 그깟 인류 문화유산이 뭐 대수였으랴. 

     

     






     

    보라. 이 티레에 알렉산드로스는 지형의 변화라는 가공할 흔적을 남겼고, 로마는 찬란한 제국의 유산을 남겼으나, 이스라엘이 남긴 것은 문명의 파괴와 살아남은 자의 슬픔 뿐이다.(이로 인해 2007년 UN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파견된 한국군이 티레에 주둔하기도 했다)










     * '알렉산더 대왕과 신라 석굴암 (II)'로 연결됨.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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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