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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발 인물열전(관운장 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10. 23:58


    단언커니와 관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무장이다. 관우는 그것만으로도 글을 쓸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삼국지의 관우 이야기는 사실 좀 지겹다. 그건 쓰는 본인 뿐 아니라 읽는 분께서도 그러하리라 여겨지니, 이제는 소설(연의)을 넘어 드라마, 영화, 만화, 게임 등 온갖 장르를 섭렵하며 종횡부진의 활약을 보여주는 무적의 긴 수염 장수의 영웅담에 대한 피로감도 살짝 있을 듯싶다. 


    또 관우가 이 챕터의 주제인 백발 인물열전에 타당한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정확히 '그렇다' 하기 어렵다. 그가 하룻밤만에 백발로 변한 일은 다른 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최근에 절찬 방영되어진, 그리고 지금도 재방송이 이어지는 중국 드라마에서만 특출나게 부각되어진 장면이기 때문이다.(보신 분들께서는 공감하시겠지만 그의 마지막 분노의 폭발, 그리고 이어지는 체념 속에 일순 변해버린 백발은 보는 이를 크게 애잔하게 만든다) 



    219년, 오나라의 여몽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떠도는 백발의 관우.

    아래 천하무적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말한 바대로 조금 쇠락한 바는 있지만, 관우는 지금도 여전히 중국인에게 추앙받는 인물로 공자와 더불어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까지 불리기도 한다. 어느덧 성인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인데 실제로 그의 '무묘(武廟)'는 공자의 문묘와 거의 같은 대접을 받는다. 그의 살아생전 최고작위는 '한 수정후(漢水亭侯)'라는 제후급의 작위로 그가 조조군에 투항한 후 그를 총애하던 조조가 황제인 헌제에게 품신해 내린 작위이며, 그가 형주를 다스릴 때의 직위는 도독형주사무로 형주 목사쯤에 해당하는 직위 정도였다. 말하자면 그 흔한 제후급의 무장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관우는 훗날, 북방 이민족에게 시달리던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왕의 칭호가 붙기 시작하였으니 이후 그의 사당은 관왕묘(關王廟)가 되었으며,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최고지존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 청나라에 들어서도 관우 숭배는 지속되었으니 1644년 청 세조 때의 관우는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라는 존귀한 이름으로 추존되었다.(정식이름은 너무 길어 생략했다) 이것은 조선 땅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양에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구한말까지 동서남북 사방에 관우의 사당이 세워졌으니 동대문 밖 동묘(정식 명칭은 동관왕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말하자면, 삼국시대의 관우는 어찌됐든 출중한 무장이었다. 연의에 등장하는 그의 빛나는 활약, 즉 사수관 전투에서 통탁군의 맹장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아직 채 식지 않은 술을 덤덤히 들이키는 광경이라든가,(이때 조조가 뿅간다) 백마성 전투에서 조조의 맹장들이 쩔쩔매던 원소군의 대표 장수 안량과 문추의 목을 가볍게 따 온 일이라든가, 조조의 국경 수비대장인 5관 장수들의 목을 차례로 턴 일이라든가,(이른바 관우의 오관참장) 우금의 대군을 수장(水葬)시키고 방덕을 참수하는 장면 등은 더운 날 땀 구멍을 서늘하게 해준다.(그리고 그보다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는 것은 충의, 의리, 곧은 성정, 그리고 형주에서의 안타까운 최후이다) 


    하지만 유비가 이른바 삼고초려로써 제갈량을 얻은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그와 2인자 다툼을 벌어야 했는데,(그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와 보이지 않는 알력은 삼국지 연의 곳곳에 등장한다) 이는 연의의 대표적 두 역본(譯本)인 이탁오 본이나 모종강 본을 가리지 않고 앞다퉈 부각시키고 있으며, 일본의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는 화용도란 곳에서의 제갈량의 승리로서 그 정점을 찍는다.(어차피 연의는 나관중의 책을 베낀 것들이니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지만, 요시카와 에이지의 경우는 그 대목을 특히 잘 표현했다는 뜻이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저 유명한 적벽대전의 직전, 오나라에서 급히 돌아온 제갈량은 위나라 군의 퇴로를 막아 조조에게 치명상을 안기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유비 군의 여러 장수들을 요소 요소로 내보낸다. 곧 벌어질 적벽대전의 승패는 천지신명께 동남풍을 빌어온 제갈량의 활약으로 인해 이미 결정난 일,(사실은 훗날 무역풍이라 불린 일시적인 계절적 역풍을 이용한 것이지만) 오나라의 화공(火攻)에 대패해 패주할 위나라 군대에 대한 이삭줍기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유비 군의 대표 장수 관우를 내보내지 않았던 바,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관우가 열이 받아 그 연유를 묻는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제갈량의 대답인즉 그저 천연덕스럽다. 당신은 예전 조조에게 신세진 적이 있으므로 그를 죽이지 못할 터인즉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관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조조에 대한 신세는 저 백마벌 전투에서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는 것으로 갚았소. 반드시 조조의 목을 가져올 터인즉 나를 보내주시오."


    러자 제갈량은 마지막 결정적 장소인 화용도(華容道)로 관우를 보내는데,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조조의 목을 따오지 못할 경우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군령장에 싸인을 받고 보낸다. 그런데 관우는 여기서도 힘겨루기를 한다.(이것이 결국은 관우의 마지막 힘겨루기가 된다) 

      "여기 다 썼소. 헌데 만일 조조가 화용도로 오지 않는다면 군사(軍師) 당신은 어쩔 것이오?"

      "그렇다면 나도 책임을 지겠다는 군령장을 쓰지요."

      제갈량도 흔쾌히 각서를 쓴다


    예상대로 조조는 적벽에서 오나라에 참패를 당한다. 그리고 제갈량이 생각한 코스 그대로 오림, 호로곡으로 후퇴하는데, 그곳에서 각각 조운과 장비에게 혼이 난 후 결국 화용도 길목에서 관우를 만나게 된다. 관우의 위력은 누구보다도 위나라 군사들이 잘 알고 있었던 바, 조조군은 그대로 절망한다. 



    자포자기 상태의 조조와 위나라 군사.


    조조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관우에게 목숨을 애걸한다. 

    "오. 관장군, 오랜만이구려. 우리의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나를 좀 보내주시구려." 

    조조와 관우가 해우한 호북성 감리현의 화용도


    화용도 옛 길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



    그러나 제갈량의 예상대로 관우는 인정에 이끌려 패잔병만 남은 조조와 그 군사들의 퇴로를 끊지 못하고 모두 보내준 후 빈 손으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능청스레 관우를 맞는다. 

      "오오, 드디어 고대하던 관장군이 돌아왔군.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소. 어서 조조의 목을 봅시다."

      ".....없소."

      "뭐라고욧? 허면 조조가 화용도로 오지 않았단 말이오?"

      "오긴 왔소."

      "그래요? 허-. 조조의 패잔병들이 생각보다 강했던 모양이구려. 허면 조조의 목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장수들과 군사들의 목은 얼마나 벴소?"

      ".....그것도 없소."

      "그래요? 그럼 전리품은 얼마나 되오?"

      " ...... "


    그러자 이쯤에서 제갈량의 계산된 분노가 폭발한다.

      "이, 이런! 장군은 고의로 조조를 놓아준 것이 틀림없소. 옛 정에 이끌려서 말이오. 여봐라! 이 관우를 끌고 가 목을 쳐라! 군령의 준엄함을 보여주리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매달리고 유비 또한 나서서 '예전 도원결의 때 같이 죽고 같이 살자 맹세했다'는 둥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통사정을 하자 제갈량은 마지못한 척,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아 명령을 철회한다. 

      "주군의 부탁이니, 주군께서 책임지고 그 죄를 맡아주신다면 영을 거두어들이겠습니다."


    이후로 관우는 깨갱하고, 제갈량에게 죽을 때까지 꼬리를 말게 되는 이 극적인 이야기는 정사(正史)에는 물론 없는 내용이다. 정사에는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군이 그저 힘겹게 남군성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연의라 해도 이 부분에서는 좀 치밀하지 못하다. 내용대로 화용도로 조조군이 올 것을 예상했다면 다른 장수를 보내 조조의 목을 베게 하면 게임 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커버하는 것은 화용도로 관우를 보내고 난 후 제갈량과 유비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먼저 유비가 화용도로 관우를 보낸 일을 못마땅히, 그리고 적절치 않은 일로 여겨 묻는다. 


      "왜 화용도로 관우를 보내셨소? 그는 본시 인정에 약한지라 어쩌면 조조를 죽이지 못할지도 모르오."

      그런데 이에 대한 제갈량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래서 보낸 것이지요. 이번 기회에 조조에게 진 빚을 다 갚으라고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제가 어제 천문(天文)을 보니 조조의 목숨이 아직 다 안 됐더이다. 그래서 관장군을 보낸 겁니다. 제가 아무리 묘수를 쓴다 해도 인간의 목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어찌됐건 하늘의 뜻을 기다려볼 밖에요.(修人事待天命)"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의 어원인 수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여기서 등장하는데, 그러자 유비가 다시 한번 감탄한다.

      "오오. 그랬구려. 역시 군사답소이다."


    말인즉, 어차피 살 목숨이니 여러가지 계산으로 관우를 보냈다는 것인데, 사실 이쯤되면 제갈량은 사람이 아니다. 그의 이같은 생각은 그야말로 신산묘계(神算妙計)인 바, 신의 경지에 올랐다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해는 어렵지만 만일 관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갔어도 칼이 부러지거나 어쩌고 해서 조조는 살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신산묘계의 제갈량도 형주의 관우를 살리지 못한다. 이미 위의 화용도 사건으로 인해 관우는 유비 군 내에서의 2인자 위치를 공식적으로 제갈량에게 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찌해서라도 관우의 살 길을 찾아 줘야 했을 터, 하지만 관우는 오나라의 애송이 장수 여몽에게 형주를 잃고 떠돌아야 했고, 결국은 맥성(麥城)에서 맥없이 목이 잘려야 했다. 



    형주의 위치(가운데 파란색 지역)

                 

     

    그런데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를 비롯해 후세의 많은 역사가들은 대부분 이 대목에서 제갈량의 편을 든다. 제갈량은 익주 정벌에 나선 유비를 돕기 위해 떠나면서 형주를 방비할 방법을 충분히 일러줬다는 것이다. 연의를 보면 제갈량은 형주를 떠나기전, 형주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며 이렇게묻는다.(사실 형주는 유비가 익주, 즉 서촉의 땅을 차지하면 오나라에게 내주기로 약속했던 곳이지만, 유비 측에서는 내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만일 위나라와 오나라가 힘을 합쳐 형주를 얻고자 쳐들어온다면 관장군은 어찌할 것이오?" 

      "병력을 둘로 나눠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오."

    이러한 관우의 대답에 제갈량은 단박에 이를 부정한다. 

      "아니오. 오나라는 위나라가 없어지면 자연히 소멸될 나라인즉, 먼저 오나라와 화친하길 바라오. 그리되면 위나라는 저절로 물러가게 될 것이오."


    즉 오나라와 화친하여 위나라를 막으라는 것으로, 떠날 때 이에 대한 다짐까지 받는다. 제갈량의 천하통일 방법은 시종일관 위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었으니, 북쪽의 위나라를 정복하면 남쪽의 오나라는 자연히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쳤던 관우는 위나라가 공격해오자 육구(陸口)의 병력을 쪼개 위나라의 번성(樊城)을 공격한다. 이리하여 위나라의 대군을 대패시키고 번성을 손에 넣지만 이로 인해 후방의 방비가 흐트러지게 되었던 바, 결국은 오나라에게 형주 전체를 잃게 되고 만다.  


    관우가 죽은 후 제갈량은 애통해 하는 유비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한다. 

      "관우가 형주를 잃고 제 목숨까지 잃은 것은 결국은 자신의 오만함 때문입니다. 오주(吳主) 손권이 관우와 사돈을 맺고자 사신을 보냈을 때, 관우는 호랑이의 딸을 어찌 개 자식에 줄 수 있는가 했다고 합니다. 결코 밑지지 않은 혼인인데도 이런 소리를 해댔으니,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참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강한 사람도 때로는 숙일 줄 알고 굽힐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관우는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제갈량의 책략은 애오라지 소의(少義)를 버리고 대의를 취하라는 것이었으니, 훗날 유비가 관우의 죽음을 복수하겠다고 오나라 원정을 나설 때 제갈량이 적극 만류하고 나선 것도 개인적 사감(私感)으로 대의를 망치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부득불 원정을 감행하였다가 이릉(夷陵) 전투에서 박살나고, 결국은 수도 성도(成都)로 돌아오지 못한 채 백제성(白帝城)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삼국지 3대 전투의 하나인 이릉 전투가 벌어진 계곡. 양자강 지류인 이곳에서 유비는 육손이 쓴 화공(火攻)에 대패한다. 


    싸움이 벌어졌던 선창시 이릉구 연화계에 지금은 채홍교라는 다리가 건설됐다. 


    유비가 숨을 거둔 양자강 구당협(瞿塘峽) 부근의 백제성. 지금은 적벽대전이 벌어진 무한 적벽(赤壁)과 함께 장강 크루즈의 대표 관광지가 됐다. 


    양자강 삼협 댐의 건설로 백제성은 맨 위의 사진처럼 섬에 위치하게 됐다. 


     구당협의 절경과 역사성은 10위안 중국 화폐의 도안이 됐다. 



    백제성 원경과 유비 사당 입구



    유비가 죽은 백제성과 관우가 죽은 형주 부근의 땅


    촉나라 부근 지도

    관우가 죽은 맥성(麥城) 일대와 유비가 죽은 백제성, 그리고 제갈량이 죽은 오장원을 살필 수 있다.(★표 참조)  조자룡과 장비가 활약한 당양벌과 장판교도 오른쪽 ★표 인근에 있다.  



    형주 군의 본성인 형주 성(호북성 형주시)


    형주성 안내도. 지금은 공원화된 성의 남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와 마주한다.(★표 있는 곳) 


    관제묘 앞의 관우 동상



    관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맥성의 옛 터


    번성 전투 도해와 관우의 죽음

    관우는 위나라 우금의 대군을 섬멸시키고 번성을 빼앗지만 형주 함락 소식에 급히 돌아오다 오나라 여몽의 공격을 받는다. 이에 고성(古城)인 맥성으로 피신한 후 탈출을 꾀하지만 결국은 인근의 임저(臨沮, 현 호북성 원안시) 벌판에서 붙잡혀 참수된다. 가운데 빨간 점이 맥성, 그 옆 화살표가 관우가 참수된 임저 벌판이다.



    이때 몸이 묻힌 곳은 당양의 관릉(關陵)이 됐고,


    조조에게 보내진 목이 묻힌 곳은 이곳 낙양의 관림(關林)이 됐는데,


    관림의 관우상은 황제의 관인 면류관을 쓰고 있다. 앞서 말한대로 관림은 공자의 공림(孔林)과 동격의 대우를 받는다. 



    그런데 혹자는 이때 제갈량이 관우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2인자 다툼으로 인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2인자 싸움은 앞서 화용도에서 실질적으로 게임 아웃된 상태이고, 이후 제갈량이 저 유명한 출사표를 쓰고 위나라를 정벌에 나섰을 때 형주를 잃은 것을 내내 아쉬워 한 것을 보면 절대 그렇지는 않았을 듯싶다. 먼 원정로로 위나라의 수도 허창(許昌)을 공격하는 것보다 익주와 형주에서 양공(兩攻)을 하면 공격은 보다 수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렵게 진창(陳倉)성을 함락시킨 후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아래와 같은 원망 아닌 원망을 토로한 것을 보더라도 관우의 죽음과는 절대 무관해 보인다. 

      "아아. 관우가 형주를 잃지 않았다면, 그래서 형주에서의 보급만이라도 이루어졌다면 그 얼마나 좋았겠는가."


    제갈량은 말년에 오직 위나라와의 싸움에만 집중한다. 앞서 몇 번이나 언급한대로 그는 위나라를 먹으면 삼국통일은 자연히 이루어지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수 차례의 북벌을 거듭하면서도 허창에 도달하기는커녕 관문인 장안(長安)에 조차 이르지 못하고 결국은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고 마는데, 그의 죽음은 그동안의 신산묘계에 비해 조금은 허망하기까지 하다. 앞서 보았듯 그는 전략은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다시 커버하는 것이 사마의라는 인물의 출현이고,(그의 신산묘계 역시 제갈량에 뒤지지 않는다) 촉한(蜀漢) 정통론에 입각했던 연의의 저자들은 제갈량이 사마의를 호로곡(胡虜谷)에 몰아넣는 것으로써,(그러나 비가 내려 사마의는 불길 속에서 구사일생한다) 그리고 죽은 제갈량의 목상(木像)에 속은 사마의가 놀라 줄행랑을 놓는 것으로 마지막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사마의를 구한 폭우에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는 제갈량.


    "아. 이 비가 그를 구해줄 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그 유명한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란 말이 등장한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 그 일의 성공 유무는 하늘에 달렸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4차 북벌 당시 건설했다는 잔도.(棧道: 벼랑길) 그의 북벌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백의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로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이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천리 잔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잔도는 그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제갈량은 이 다리를 보수해 빠른 공격 루트로 삼았던 것 같다. 촉의 관문인 검문관과 연결된 이 잔도는 건너면 호로곡과 만난다는데, 호로곡이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다. 



    백발 관우의 이야기는 그저 이것으로 마치려 하는데, 주제 없이 중언부언한 느낌이다. 다만 지금도 2인자 싸움(무협지 식으로 말하자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싸움)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이 땅의 많은 엘리트 분들께 그 처세의 일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만족하려 한다. 



    * 그림과 사진의 출저: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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