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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8. 1. 18. 09:08

     

    우리의 사대주의의 인해 고등학교 시절부터 쩐 기억이 있다. 필시 우리 조상님들이 신봉한 사대사상과 그로부터 비롯된 저들의 고약한 중화 우월주의가 만든 기억이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을 서울 성동구에서 마포까지 통학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으며 통학시간도 1시간 반이나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당시 이른바 공동학군이라 불리던 고등학교 배정 범위의 동쪽 끝에 살던 내가 서쪽 끝의 학교에 배정됐기 때문인데, 까닭에 꼼짝없이 그 먼 거리를 3년 내내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인근에 한성 화교 학교가 있었다. 재한 중국인 학생들, 즉 화교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였는데, 그 학생들과 3년 동안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니 막판에는 친해져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몇 번 술자리도 가지게 되었다. 그때 그 녀석들이 술이 취해 물어보던 말이 있다.

     

     

    “야. 너희 나라에 황제 있었냐?”

    “있었지. 고종도 있고, 순종도 있고..... 고려 시대 광종도 있고.....”

    우리 동창 친구들은 즉각 학교에서 배운 대로 몇 마디 답했다. 그러자 녀석들이 곧바로 이렇게 되물었다.

    “그리고, 또 누구 있었는데?”

    “고구려 광개토왕도 사실은 황제였어. 태왕이란 곧 황제를 의미하는 것이거든. 영락이라는 연호도 썼고.....”

    제법 공부를 잘 했던 동창생 한 명이 다시 몇 마디 답했지만, 아무래도 끝은 좀 우물거렸던 듯싶다. 녀석들이 다시 되물었다.

    “그리고 또....? 없어? 시간 줄 테니 천천히 생각해봐.”

     

    이쯤 되면 묻는 이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자기들 나라 중국은 대대로 황제국이었고, 너희 나라 한국은 대대로 우리의 속국이자 제후국인 왕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또 친절하게 그러한 설명을 단 녀석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술자리는 그쯤에서 어영부영 끝이 났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도 그쯤에서 끝난 것 같은 바, 사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관계는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들 터였다. 사실을 말했지만 실제 의도는 모욕을 주자는 것이었기에.

     

     

    이와 같은 그들의 중화 우월감과는 이후 사회에서도 몇 번 부딪쳐야 했는데, 그 다음의 모욕감은 중국무역대표부에서 겪은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대만과 단교를 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하기 직전, 저들은 종로 관철동에 있는 현대빌딩에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중국 비자 발급 같은 것을 해주었는데, 관광 목적 등의 비자를 받으러 오는 여행사 직원이나 나처럼 무역 회사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자주 출입을 해야 했다. 그때 창구의 중국인 직원들은 그렇게 고압적일 수가 없어서,(당시 목격한 상황들은 차마 쪽팔려 필설로 옮기기조차 싫다) 나는 갈 때마다 매번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감내해야만 했다.(그래도 당시는 우리가 그들보다 훨씬 잘살 때여서 중국에 가서는 오히려 칙사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때 나는 염려했다. 이제 머잖아 중국은 한국을 따라잡게 될 터, 지금도 그러한데 저들의 부흥이 시작되면 우리 한국은 정말이지 발뒤꿈치의 때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되겠구나.....

     

     

    그리고 불과 몇 십 년이 되지 않아(정말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저들 중국은 1980년대 등소평이 개혁개방 정책을 주도할 때 표방한 ‘도광양회(韜光養晦: 칼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를 넘어, 2000년대에 들어서기 무섭게 ‘화평굴기(和平屈起: 평화스럽게 우뚝 솟아 일어난다)’를 표방했다. 그리고 다시 얼마 되지 않아 ‘유소작위(有所作爲: 필요할 때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를 내세웠다. 이제 힘을 키웠으니 주변에 간섭하고 나서겠다는 뜻이다. 그 유소작위의 시범 케이스로 2017년 한반도 사드(THAAD) 배치가 걸려들었다. ‘너희 한국이 감히 대국인 우리 중국을 겨냥해? 건방진 놈들! 어디 맛 좀 봐라!’

     

     

    이것이 더도 덜도 아닌 중국 당국의 생각이었다. 우리의 사드가 중국을 겨냥함이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자위책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괜한 몽니를 부리고 나선 것이다. 그 보복의 방법은 무분별하고 치졸한 통상, 관광 보복으로,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는 그 사실을 굳이 여기에 옮길 필요는 없어 보인다.

     

     

    ~ 괜히 써 봐야 분통만 터질 터인즉. 다만 원인이 된 사드, 즉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에 대한 설명은 필요할 듯싶을 터, 중국이 문제를 삼는 것은 미사일 자체보다 그 방어체계에 딸려 있는 이동식 레이더였다. 그 레이더는 탐지거리가 2000km에 달하는 고성능이어서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자국군의 작전이 제한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자국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발상인즉 저들의 레이더망은 이미 좁은 한반도의 지형을 훤히 꿰뚫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를 보더라도 저들의 대국 의식, 즉 대국은 소국을 무시해도 괜찮다는 대국 이기주의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의 통상 보복보다 그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였다. 우리는 중국의 통상 보복에 시종 저자세로 일관함으로써 저들의 비위를 한껏 맞춰주었지만(이른바 실리외교라는 것으로써) 그래서 얻게 된 것은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한 멸시였고,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지난 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경험한 대한민국 기자에 대한 중국 경호원의 무차별한 집단폭행이었다

     

    ~ 이때 우리나라의 한 기자가 엎어진 상태에서 얼굴을 발로 강타당하는 등, 지독한 폭력의 장면이 노출되었으나 이후 우리나라 정부의 대응은 언제나 그렇듯 미온적이었던 바, 앞으로의 또 다른 만행의 예고편을 보는 듯 끔찍했다. 정부 당국의 대응도 대응이었지만, 나는 그때 우리나라 국민들의 반응이 너무나 조용해서 놀랐다. 아. 그 기자 분의 처참한 얼굴 모습을 차마 옮기지는 못하겠다.

     

     

    한편 베트남은 우리보다 앞서 같은 경우를 당했다. 지난 2014년 베트남은 자국의 배타적경제구역(EEZ)인 파라셀 군도(群島)에서 행해진 중국의 석유 시추에 극력 반대했던 바, 중국의 대대적인 경제 보복을 받게 되었다. 공산품이 대부분인 우리와 달리 베트남은 농산물이 주력 수출 상품이었던 바, 공항과 국경에서 통관을 저지당한 컨테이너 안의 농산물(생과일 야채 카사바 고무라텍스 등)은 모두 썩어나가야 했고 이후 판로를 찾지 못한 농산물들은 헐값에 떠넘겨지거나 폐기돼야만 했다.

     

    아울러 저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의 관광 보복을 당했으니, 예정된 관광객의 대규모 취소사태를 필두로 하롱베이(우리나라의 제주도와 같은)를 비롯한 베트남 곳곳의 관광객은 급감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자국 내에서의 베트남 기업의 입찰 참여 또한 제한시켰던 바, 저들 기업의 피해 또한 우리 못지않았다.(베트남의 대중국 경제의존도는 오히려 한국보다 높다)

     

     

    파르셀 군도의 위치

    베트남은 황사군도(Huong sa Quan dao), 중국은 시사군도(四沙群島) 부르는 이 섬들은 현재 중국이 실효지배 중이다.  

     

     

     

    그런데 이때 보여준 저들 베트남인들의 대응은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2016년 중국의 경제보복 이후 시종일관 저자세로 대응했던 우리 대한민국과 달리 베트남 국민들은 결기를 표출하며 거국적으로 중국에 저항했다. 그리하여 수도 호치민 시를 비롯한 곳곳에서 반중시위가 일어 100여 명이 부상당한 것을 필두로 모든 국민이 합심하여 중국과 맞서 싸웠던 바, 흡사 전쟁도 불사할 분위기로 치달았다. 중국상품 불매 차원쯤을 훨씬 넘어선, 보다 적극적인 국민 저항운동이었다.

     

     

    ~저들은 15세기 초 자국을 침입한 명나라 영락제의 대군을 10년 동안 싸워 패퇴시킨 바 있고 제국주의 프랑스와 미국을 격퇴한 화려한 전력도 있어서인지 중국과의 전쟁에 있어 우리만큼 겁을 안 먹는다.(알다시피 베트남은 미국과 싸워 이긴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다) 언제든 한번 해보려면 해보라는 식이다. 실제적으로 1979년, 베트남은 통일 전쟁 직후 자국을 쳐들어온 중국의 20만 대군을 주력군을 투입하지 않고도 보기 좋게 물리쳤고, 당시 중공군은 불과 29일 만에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국제적 망신 속에 허겁지겁 물러가야만 했다.

     

     

    ~그러한 역사적 이유에서인지 베트남은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훨씬 낮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미국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2014년 베트남의 반중국 시위가 격화되어 베트남 주재 중국공장들과 대사관 차량이 방화되었을 때도 중국 외교부의 반응은 그저 유감이란 것이었고, 오히려 미국은 이를 기화로 적극적으로 베트남을 거들고 나섰다. 아무리 작은 체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싸움에서 한번 이기고나면 큰 덩치의 놈들도 감히 까불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랄까? 현재의 국력으로 베트남이 중국과 맞짱을 뜬다면 베트남은 필패겠지만, 그만큼의 피해를 주겠다는 그들의 깡다구를 중국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문구는 인터넷 어느 논객 분의 글을 빌려온 것인데, 만일 우리가 베트남 같은 시위를 벌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반면 중국이 우리를 두려운 상대로 보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그 단적인 예가 지난 2017년 4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이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정상회담(4월 6~7일)에의 후일담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진핑 주석이 중국과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한이 아니라 한국 전체의 이야기였다. 중국과 한국은 수천 년의 역사다. 많은 전쟁도 있었다.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는 내용 등이었다. 나는 10분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쉽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트럼프가 깨달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북핵 문제일 것임은 그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도 중국 시진핑 주석의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다. 나중에 이것(시진핑의 발언)이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해석상의 오류 어쩌고 하는 우리 당국의 해명 아닌 해명이 있었지만, 이 내용을 중국에 확인했는지에 대한 기사는 못 본 것 같다.(중국은 가만있는데 한국 정부가 오히려 중국 외교부 대변인 역할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미국에의 반응이 들을 만했으니, 미국 온라인 매체 쿼츠는 18일 이 발언을 ‘확연한 역사적 오류’라고 지적한 후 ‘한국을 격분할 수 있게 내용’이라 보도했다. 미국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잘못된 발언이라 여기고 나아가 한국민의 일그러졌을 자존심을 걱정했음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우려는 크게 빗나갔다. 한국에서는 여야 정치인들의 상투적인 일과성 비난 발언 외에 그 어떤 항의의 몸짓도 찾아볼 수 없었던 바, 국회의원의 소임은 무엇이며, 그 많은 좌익과 우익의 단체들은, 또 그 다양한 이름을 가진 소위 시민단체라 하는 모임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역할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근자의 민족주의적 방향타는 어처구니없게도 ‘국뽕’이라는 단어로 매도되기도 하는 바, 도대체 이건 어떤 놈이 만든 말인지 또한 궁금했다.

     

     

    나는 본 블로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편에 있어서 ‘성서와 UFO' 편에 비해 글을 많이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내용도 거의가 서양사에 치중되었는데, 최근 형평성 차원으로 동양사에 관한 글을 몇 편 싣게 됐다. 그러면서 이해를 돕기 위한 타국의 자료들을 옮겨 실으려 하면(저작권 운운의 것도 신경 쓰이지만 그보다는 먼저 자국의 자료가 부족해서) 기실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 삼국시대의 신명나는 삼국지 이야기를 실으려 해도 다음과 같은 지도가 늘 나의 시선을 괴롭힌다.

     

     

     

    '중국역사지도 대도감'의 삼국시대 강역도.(위나라의 영토가 지금의 북한 지역을 거의 다 점하고 있는데, 그래도 한쪽에 고구려를   써 놓은 것을 보면 그래도 고구려는 중국이 어려워 한 역사상의 유일한 나라였던 듯싶다) 

     

     

     

     

    이런 그림들은 모두 근자에 행해진 이른바 '동북공정'에의 결과물일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런 것을 보면 사실 시진핑 주석의 말에 반박할 힘을 잃는다. 나아가, 앞서 말한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화교 학생들의 인식은 그야말로 사실 그 자체인 바, 달리 반박할 거리조차 없다.(이것은 그들만의 인식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을 보는 중국인 전체의 인식이기도 할 터, 앞서 말한 과거 무역대표부 직원의 지독히도 고압적이었던 태도 또한 딴은 이해가 간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그와 반면 당시 한남동 조그만 개인 빌딩에 입주했던 러시아 무역대표부 직원들의 태도는 한결 친절하였으니 어떨 때는 어리버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웠다. 사실 일본 대사관 직원들도 고압적이긴 했지만-그곳에 근무하는 한국인들까지-중국 대표부 사람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정도였다.(그래서 그 당시 회사가 극동 무역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때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한 고종의 ‘아관파천’을 떠올리며 실소를 지은 기억도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사실 이 아관파천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힘없는 나라의 국왕이기로서니 엄연히 제 나라의 황궁이 있었음에도 일본의 압력이 두려워 다른 나라의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해 그곳에서 1년 동안이나 국사를 보았음은 정말이지 제 정신을 가진 국왕이 할 짓은 아니었다.(필시 일본은 이때 고종을 더욱 만만히 보았으리라)

     

     

    시의 러시아 공사관 사진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공사관의 전망탑(서울 정동)

     

    과거 교과서에 아관(러시아 공사관)에서의 고종 사진으로 실렸고, 지금도 네이버 블로그 및 기타 백과사전 등에 그렇게 실려 있는 위 사진은 아관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덕수궁 돈덕전에서의 모습이다.

     

    돈덕전(惇德殿) 전경. 석조전 뒤에 위치했으며 순종 황제의 즉위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석조전(石造殿) 전경. 돈덕전은 이 뒤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뉴스를 보니 그때 고종의 행로가 복원된다는 것 같던데, 참으로 한심한 발상이다. 기존의 아픈 기억의 흔적들이야 역사의 교훈쯤으로 남겨둘 수는 있겠으나 이게 무슨 자랑스런 Royal Road라고 복원까지 한단 말인가.

     

     

    아무튼 고종은 이 길, 이 문으로 야반도주했다.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에 관해서는 3~4편 정도로 글을 나눠 실을 예정이다.(워낙에 할 말이 많은지라) 그리고 이 1편은 글이 길어진 관계로 이만 끊으려 하는데, 마지막으로 조선 중기의 협사(俠士)문인 백호 임제(1549-1587)의 유언을 실어 글의 전체적인 취지를 전할까 한다. 그가 죽기 앞서 울어대는 가족들에게 남긴 말로서, 더불어 그는 자신의 관도 쓰지 말고 그냥 아무데나 묻으라 했다 한다.

     

     

    “너희들 울지 마라. 육조오계(六朝五季: 역대의 모든 왕조)가 다 황(皇)을 칭하고 구이팔만(九夷八蠻: 세상의 모든 오랑캐)이 모두 제(帝)를 칭하였던바 그것이 얼마나 오래갔는지는 알 수 없으되, 홀로 우리나라만이 그렇지 못하고 타국의 피폐를 일삼을 뿐이요 한번 자립하여 중국에 입주해보지 못했으니 어찌 가련타 하지 않으리오. 이런 나라에 태어난 몸이 죽지 않으면 무엇하겠느냐?”

     

     

    ~임제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는데,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횡사하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해 주색잡기를 즐겼으며 23세에 어머니를 여읜 이후 잠시 술을 끊고 학업에 정진하였으나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다 28세에 겨우 생원 진사과에 합격했다. 그 이듬해의 알성시에 합격한 그는 관서도사, 예조정랑, 홍문관지제교 등의 관직을 지냈는데, 워낙에 성격이 자유롭고 호방한데다 주위의 관리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편가르기를 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한다.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세상을 떠돌던 그는 ‘수성지(愁城誌)’를 비롯한 3권의 한문소설, ‘임백호집(林白湖集)’이라는 문집 4권, 그리고 많은 기행의 일화를 남기고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이상 ‘다음 백과사전’ 참조) 그의 약전(略傳)을 쓴 구한말의 이규환은 임제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했다.

     

     

    ‘좁고 좁은 나라, 하잘 것 없는 시기에 태어나 서로 저 잘났다고 싸우는 붕당의 무리 속에 섞여, 스스로의 일신(一身)을 구속하여 일언일소(一言一笑)를 조심하고 사대(주의)를 법도로 알며 출세를 한들 무엇할 것이냐?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럭저럭 놀다가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 아니었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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