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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서국(伊西國)의 침입을 물리친 신라의 수수께끼 군대 죽엽군(竹葉軍)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1. 10. 9. 23:58

     

    용성국 출신 석탈해 세력이 왜(倭) 출신의 호공 세력과 주도권 싸움을 벌여 승리한 사실에 대해 앞서 다룬 바 있다. 그리고 호공이 건너온 바다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당시 울주 내륙까지 이른 바다의 내만(內灣)이며, 당시의 '왜'는 울산을 포함하는 일대의 땅이라는 사실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왕 38년조의 기사를 빌려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한일 고대사의 재건축>의 저자 장한식의 탁견임을 밝혔다.(☞ '왜인' 호공에 대한 놀라운 해석)

     

    야철족(冶鐵族, 철기세력) 석탈해가 귀화인 세력인 왜(倭)의 호공 집단에 승리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어 칠일 동안 머무르며 성 안에 살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그 지세가 오래 머물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고 다음날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네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동자가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관청에서 그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其童子曳杖率二奴登吐含山上作石塚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峯如三日月勢可久之地. 乃下尋之即瓠公宅也. 乃設詭計潛埋砺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 "否", 爭訟不决. 乃告于官, 官曰 "以何験是汝家." 童曰 "我夲冶匠乍岀隣郷而人取居之, 請堀地檢看." 從之, 果得砺炭乃取而居.

     

    그런데 석씨 세력에 밀려 완전 몰락했을 것으로 여겨지던 호공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에 다시 나타난다. 이때는 보다시피 탈해가 3대(혁거세거서간-남해차차웅-유리이사금)를 이어온 박씨 세력까지 밀어내고 새로운 이사금, 즉 왕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인데, 우선 그 기록을 한번 보고 넘어가자.

     

    서기 65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九年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竒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聦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鷄 因以爲國號)

     

     

    멀리 금성이 보이는 시림의 숲
    김알지 신화가 기록된 계림비각

     

    위 기사를 보면 계림 숲에서 금궤를 처음 발견하는 사람이 바로 호공이다.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 때의 호공이 1세기의 차를 두고 석탈해왕 때 다시 등장한 것이다.(정확히는 85년) 그렇다면 호공은 100년 이상을 산 셈인데 당대로서는 불가능한 일일 터, 호공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왜 출신 인사 중에서의 고급공무원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왜인 집단은 몰락한 것이 아니라 석씨 세력 밑으로 들어가 고급 관료집단으로서의 삶을 이어나갔음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탈해가 즉위 2년(AD 58)에 호공을 대보(大輔)로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여기서 호공이 금궤를 발견하고 알렸다는 것은 왜인 세력이 새로 출현한 신라김씨를 후원했다는 사실을 암시할 수도 있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보면 호공은 박씨왕조(청동기 세력)가 3대만에 철기 세력인 석씨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주저앉는 무상함을 지켜보았고, 자신들 역시 석씨 세력에게 밀려나 그들의 신하가 되어야 했던 바, 석씨를 밀어낼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갈망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 외로 석씨 세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탈해왕릉

     

    탈해는 왕위에 올라 국호를 서라벌에서 사로(斯盧)로 바꾼다. 하지만 탈해의 왕위는 단대(單代)로 끝나고 제 5대왕부터는 다시 박씨가 다시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유리이사금의 둘째 아들인 파사이사금(AD 80-112)이다. 유리이사금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동안 와신상담하였음을 의미하며, 아울러 석씨가 서라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그렇지 않고는 박씨가 다시 왕이 될 리가 없다. 석탈해가 "나는 할 만큼 했으니 너희 박씨가 다시 왕위를 이어라"했을 리 없다는 얘기다)

     

     

    박혁거세를 비롯한 초기 신라왕이 묻혀 있는 '오릉'. 경주 시내에 있어 걸어갈 수도 있는 고즈넉한 장소이나 입장료를 받는다. 이 정도는 국민에게 사색 공간쯤으로 제공함이....

     

    신(新) 박씨왕조는 파사이사금부터 아달라이사금까지 4대가 이어진다.(파사-지마-일성-아달라) 그러다 9대 벌휴이사금(184-196)부터는 다시 석씨가 왕위에 올라 16대 흘해이사금(310-356)까지 이어진다. 석탈해의 후예들이 힘을 길러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 물고 물리는 박씨와 석씨의 싸움 속에서 그 중간쯤인 13대에 느닷없이 김씨 왕이 출현하니 그가 곧 미추이사금이다.

     

    경주 대릉원 내의 구전되는 미추왕릉이 정말로 미추이사금의 무덤이라면 그 규모로 볼 때 강력한 왕권을 견지했던 왕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고대 왕과 왕족의 무덤인 대릉원지구 내에서 이름이 전해지는 유일한 왕릉이라는 사실로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미추이사금의 시대는 단대로 끝나고 위의 석씨 왕조가 계속 왕위를 계승한다. 미추이사금이 대단한 왕이었기는 해도 김씨들이 왕위를 세습할 정도의 힘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미추왕릉

     

    최고 권력이라는 게 그 속성상 쉽게 주고받을 성질이 것이 못되니, 선양(禪讓)이란 말은 삼황오제의 전설이거나 찬탈의 순화된 이름에 불과하다. 신라시대라고 그것이 다를 리 없었을 터, 사서에서는 그 피비린내 나는 행간을 읽을 수 있는데, 특히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4년조의 기사는 수수께끼라고 하기보다는 다시 왕권을 잡으려는 신라김씨의 노력이 역사에 기록된 예로 보면 적당할 것 같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우리나라가 많은 병력을 동원해 방어했으나, 물리치지 못하였다. 문득 신비한 병사들이 도와주러 왔는데,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모두 대나무 잎(竹葉)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해 물리쳤는데, 그 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다만 사람들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음병(陰兵)을 보내 싸움을 도와주었다"라고 하였다.(伊西古國來攻金城. 我大舉兵防禦 不能攘. 忽有異兵來 其數不可勝紀 人皆珥竹葉. 與我軍同擊賊破之 後不知其所歸 人或見竹葉數萬積於竹長陵. 由是國人謂 "先王以隂兵助戰也")

     

    여기서 '이서고국'은 무척 생소하나 다행히도 <삼국유사> 기이(紀異)편 첫머리에 해석을 도와줄 내용이 실려 있다.('기이'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적었다는 뜻이다)  

     

    서기 18년에 이서국(伊西國)을 정벌해 멸하였다.(十八年伐伊西國滅之)

     

    서기 297년에 이서국(伊西國)사람들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다. 우리가 크게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병사가 있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대나무 잎(竹葉)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병사와 힘을 합쳐 적병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이상한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음을 보고 그때서야 선왕에 의한 음덕의 공이 있었음을 알았는데, 이로 인하여 죽현능(竹現陵)이라 하였다.(第十四儒理王代伊西國人來攻金城. 我大舉防禦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皆珥竹葉. 與我軍并力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陵前乃知先王隂隲有㓛, 因呼竹現陵)

     

    <삼국유사>에 이서국에 관한 이야기는 이 두 편이 나온다. 학자들은 이서국을 경북 청도군에 있었던 나라, 혹은 가야연맹 중의 하나였던 나라로 짐작한다. 문제는 서기 18년에 정벌해서 멸망시켰다는 나라가 14대 유례왕 때 다시 등장한다는 것인데, <삼국사기>의 이서고국(伊西古國)이라는 국명이 역으로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예전 망했던 나라가 다시 일어나 쳐들어왔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니 말하자면 후이서국(後伊西國)이 되겠다.

     

    아무튼 이서국의 군대는 막강해서 신라군이 막아내기에 힘에 부쳤다. 그래서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어디선가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죽엽(竹葉軍)이 나타났다. 그래서 신라군은 그 정체 모를 군사들과 힘을 합쳐 이서국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바, 죽엽군 덕에 나라를 지키고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등장하는 이 기이한 군사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수수께끼 군사의 정체는 아마도 전(前) 임금인 미추왕의 가문에서 키우던 사병(私兵)이었을 것이다. 미추왕의 김씨 가문은 재집권을 위한 병사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우선은 나라부터 구하고 볼 일이라 전장에 투입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청사에 있어 갑자기 나타난 소수의 병력이 대군을 물리친 예는 너무도 흔하니, 과병(寡兵)이었을 이 수수께끼의 군사는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신라군에 지대한 힘이 되었을 것이요, 이서국의 군대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을 것임은 굳이 보지 않았어도 짐작이 가능하다. 

     

    사서의 기록들은 그들이 신라김씨의 사병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돌아간 곳이 미추왕릉이었고 그곳에 대나무 잎이 가득 쌓여 있었다'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더불어 선왕(미추이사금)의 음덕으로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아 예찬하고 있는 바, 머잖아 성취된 김씨 세력의 재집권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그 60년 뒤에는 내물이사금이 즉위해(356년 4월) 마립간(麻立干), 즉 대칸(大干)의 호칭으로써 강력한 전제왕권을 확립하니 드디어 김씨의 세습왕조가 성립된다. 반대로 석씨의 세력은 이때부터 한없이 쪼그라드니 이후로는 아예 청사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 

    췌언: 문무대왕의 비문과 그의 동생 김인문의 비문에서는 그들 신라김씨의 직계조상이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이고, 그는 흉노족 투후(秺侯) 김일제의 후손으로 나온다. 또한 흥덕왕릉비의 파편에도 성한왕이 등장하니 흥덕왕은 자신이 성한왕의 24대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에선 알지 - 세한(勢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味鄒)라고 했고, 삼국유사에선 알지 – 열한(熱漢) - 아도(阿都) - 수류(首留) - 욱부(郁部) - 구도(俱道, 혹은 仇刀) - 미추(未鄒)라고 했는데, 이는 판각(板刻) 과정에서의 오류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지만 <삼국사기>와 경주김씨 족보에 나오는 신라김씨의 시조 김세한이 곧 성한왕이다. 김알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신화를 통해 탄생한 인물로 보면 된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작금의 반론(反論)과 다르게 나는 여전히 신라김씨가 흉노족 후손이며 전한·신(新)나라 교체기에 신라 땅으로 이주한 보트피플이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다.(☞ '경주 월성에서 나온 흉노족의 인골'/'기마민족국가 신라의 유물 3점' 외)

     

     

    국립경주박물관의 김인문 비문
    내물왕릉
    복원된 월정교
    월정교 건너의 옛 집들. 실제로 신라 왕경은 아래와 같은 금입택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실제 사진
    신라 왕경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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