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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핼리혜성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8. 5. 07:18
76.3년 주기의 핼리 혜성이 근자에 출현했던 건 지난 1986년 4월로, 나는 운 좋게 그것을 볼 수 있었지만 기대와 달리 김이 팍 샜다. 평생 한번 보는 것이니 만큼 적어도 아래의 광경을 상상했으나 소문과는 달리 밝기가 떨어졌고(2.1 등급) 지구에서(특히 북반구에서) 멀리 날아 아쉬웠다. 역사상 최악의 관측 조건이었다고 한다. 우~ C;;
다음은 출현은 2061년인데, 한국에서 가장 확실히 관찰될 수 있는 날짜는 2061년 7일 28일로, 0.3등급의 매우 밝은 밝기를 자랑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을 볼 수 없는 나로서는 괜히 억울한 기분이다. I'm pissed off!
핼리 혜성이 유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역동적이며 가장 밝은 유일한 천체이기 때문이다. 더러 더 밝은 혜성도 존재하지만 수천 년 주기의 장주기 혜성이라 아주 운 좋은 세대를 제외하고는 실제적인 관측은 불가능하다. 또 76.3년 주기 핼리 혜성의 76이라는 숫자도 매우 오묘해, 한 사람의 생애에서 어쩌면 두 번 볼 수가 있고 어쩌면 한 번도 볼 수 없다.
지난달 니오와이즈 혜성의 경우는 그야말로 뜻밖의 방문이었는데 초장주기 혜성으로 여겨지기에 다시 볼 기약은 없을 듯하다.(다음은 6,800년 후에 온다고) 그래서 이번에 인증샷을 기대한 것이었으나 결국 좋은 사진을 얻지 못했다.
(☜ '니오와이즈 혜성 인증샷을 기대하며')
앞서 장보고의 이야기를 잇자면 원성왕의 증손 김명(金明)이 난을 일으켰을 때 떴던 837년의 핼리 혜성은 지구와 매우 가깝게 접근했던 듯하니 서영교는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에서 이때의 혜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37년 3월, 핼리 혜성의 모습은 그 어떤 회귀 때보다 이목을 끌었다. 이때 그것은 겨우 600만 킬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지구에 '대담'하게 접근했는데, 천문학에서 볼 때 이 정도면 거의 '스치는 만남'이었다. 당시 관찰자들에게 밝게 빛나며 창공의 절반에 걸쳐 펼쳐진 혜성의 꼬리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혜성의 꼬리가 거대한 부채꼴 모양으로 빛나고 이 모습은 점점 커졌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뭔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보다 더 크고 밝은 혜성은 9세기 내내 볼 수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873년에 출현한 핼리 혜성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당대의 중국 사서(史書)인 <신당서> 천문지에는 혜성 출현에서부터 소멸까지의 한 달가량의 기록이 상세하다. 하지만 그 당시 신라 땅에도 핼리 혜성이 나타났을 것임은 분명할 터, 비슷한 시기 중국 땅과 일본 땅에서 목격된 혜성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것을 아우르는 기록이 앞서도 언급한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이다.
"작년(837) 3월에도 이 별(핼리혜성)이 나타났는데, 빛이 지극히 밝고 꼬리가 아주 길었습니다. 황제(당 문종, 재위 826-840)께서 괴이하게 생각하여 대전에 머무르지 않고 비좌(卑座, 낮은 자리)에 머물며 삼베옷을 입고 오랫동안 재개육식을 하지 않음을 지키면서 죄수를 풀어주었는데 생각컨대 올해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작년 일본에 있을 때 본 것과 주지스님이 말하던 것이 꼭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입당구법순례행기> 838년 10월 23일 조)
일본인 당나라 유학승 엔닌(圓仁)은 자신의 일기에서 양주 개원사(開元寺) 주지승이 목격한 것과 자신이 본 것이 동일한 혜성임을 말하고 있는 바, 837년 핼리 혜성은 한·중·일 3국에서 모두 관찰될 수 있는 천체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또 838년 중국 양주에서 목격한 크기가 좀 작은 혜성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적었다.(이 혜성은 837년 핼리 혜성에 이어 연속적으로 출현했으며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도 등장한다. ☞ '장보고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
개성(開成) 3년(838년) 10월 22일 이른 아침에 혜성을 보았다. 그 길이는 1심(尋, 약 2.5m) 남짓했는데 동남쪽에서는 구름에 가려 오래 보지는 못했다..... 10월 23일 심변(沈弁)이 와서 "혜성이 나타나면 국가가 크게 쇠퇴하거나 병란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승려들이나 살고 있는 절간에서야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뒷날을 위하여 적어둔다. 밤이 되고 동이 틀 때까지 방을 나와 동남쪽에 있는 그 별(혜성)을 바라보니 꼬리는 서쪽을 향하였고 빛은 몹시 밝아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빛의 길이는 모두 10장(3.3m)이 넘었다.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병란이 일어날 조짐이다"라고 말했다.
~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일본 교토 엔라쿠지(延曆寺)의 승려였던 엔닌이 당나라에서 9년간(838~847) 유학하며 쓴 4권의 일기문으로 9세기 경 당나라 각지의 신라방(코리아타운) 사람들의 생활상이 실려 있다. 엔닌은 장보고가 산동반도 적산지방에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도 머무르며 그 절에 관한 일과, 근방의 신라방인 적산촌(赤山村)에 관해서도 소상히 언급했는데, 신라방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푼 배려가 아니었다면 결코 일본으로 돌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엔닌은 그 책에서 우리가 몰랐던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하니, 그가 당나라에 유학을 올 때 지쿠젠(筑前) 태수 오노 스에쯔구(小野末嗣)가 장보고에게 보낸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던 바, 중국 내에서의 장보고의 위상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그는 (장보고 귀국 후) 적산촌 신라인으로부터 신라 땅에서 일어난 정변, 즉 장보고의 도움으로 김우징(신무왕)이 등극하였다는 놀랄만한 정보도 듣게 되고, 신라 왕의 즉위를 하례하기 위해 청주병마사(靑州兵馬使) 오자진(吳子陳), 최부사(崔副使), 왕판관(王判官) 등이 축하사절단 대표로서 수행원 30여 명과 함께 법화원을 방문한 후 적산포(赤山浦)에서 신라로 출발하였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엔닌은 우리나라의 명절인 추석(8월 한가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일기에 적산촌 사람들의 추석 행사에 대해 소상히 기술하였다. ".....많은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사흘 만에야 끝이 난다. 지금 이 사원(법화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가절의 축하행사를 마련하였다. 3일 밤낮으로 계속된 행사에는 적산촌 신라인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참가해 즐겼는데 내가 이 행사의 연유를 물어보니 발해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전승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했다."(作八月十五日之節… 設百種飮食歌舞管絃以晝続夜 三個日便休 今此山院 追慕鄕國 今日作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김우징의 행로를 좇아가 보자. 김양을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삼은 청해진 5천 병사는 838년 음력 10월 다시 수도 금성을 향해 진격하는데 이번에는 앞서와 달리 지방 군벌이 합세하였던 바, 그 당시 출현한 혜성을 천명(天命)으로 여겼을 가능성을 증명한다. 이후 반란군은 3,000명의 기병을 앞세워 무주의 관군을 대파하고 달벌 큰 언덕(대구)에 이르러 이찬 대헌과 대아찬 윤린 · 억훈이 이끄는 10만 명의 신라군사와 건곤일척을 겨뤘는데 이 전투에서도 반란군은 20:1의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기적적인 승리에 대해서 후사의 역사가들이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이를테면 기병과 보병의 싸움에서의 기병의 승리) 그들의 싸움판 위를 내달리던 긴 꼬리의 혜성이 심리적 역할을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양쪽의 군사들은 결전 전야인 839년 윤 정월 18일 밤 이 혜성을 모두 보았을 것이고, 그 결과 한쪽은 크게 up되고 한쪽은 크게 down되었을 것이기에) 이 싸움이 벌어진 838년 12월의 혜성 관찰 기록이 <신당서> 권32 천문지에 전해지는 바, 838년 10월 을사 진괴(軫魁, 까마귀 자리)에 나타났던 혜성은 민애왕이 피살되고 모든 상황이 종료된 839년 2월 기묘에 이르러 사라진다.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일으킨 반란은 이렇듯 대성공을 거두고 김우징은 드디어 왕위에 오르지만(신무왕, 재위: 839년 4월∼7월) 채 넉 달도 옥좌에 있지 못하고 병사(病死)한다. 참 운도 없다. 다만 생전에 장보고에 대한 보은은 반쯤 이루어지니 청해진대사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 충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정한 군사령관)에 봉하고 2,000(戶)의 실봉(實封)을 내린다.
신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자 김경응(문성왕, 재위 839∼857년)도 장보고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니 그에게 진해장군(鎭海將軍)이라는 직함과 장복(章服)을 하사한다. 하지만 장보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나머지 부채의 청산을 원하였으니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것을 요구한다.(문성왕과의 직접적인 약속은 아니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르자면 이는 장보고가 당연히 요구할 몫이었다)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도망간 민애왕을 찾아 없앤 청해진 군대의 세력은 하늘을 찔렀다. 이에 신라 내에서는 장보고를 당해낼 힘도 없었거니와 어찌 됐든 장보고의 덕에 왕위에 오르게 된 문성왕으로서는 감내해야 할 숙명이기도 했던 바, 장보고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차비했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해도인'(海島人, 섬사람)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임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으니 평민의 귀족층 진입을 허락치 않던 당시의 단단한 골품제도도 그랬거니와, 이리되면 차후 장보고가 왕실까지 좌지우지하게 될 터, 신라 귀족들의 반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결국 장보고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장보고는 841년(문성왕 2년) 반란을 일으키는데, <삼국사기>에는 반역에 대한 전말이 축약된 문장이 있다.
청해진대사 궁복(弓福, 장보고)은 왕이 자신의 딸을 비(妃)로 맞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진(鎭, 청해진)에 거하여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치자니 예측하지 못한 환(患)이 있을지 모르고(오히려 당할지 모르고) 또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그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라 전전긍긍하던 중, 용장으로서 소문이 자자하던 무주 사람 염장(閻長)이 와서 고하기를 "조정에서 나의 말을 들어준다면 나는 한 명의 군졸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다"고 하기에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삼국사기> 문성왕 조)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염장이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진에 투항하니 궁복은 원래 장사를 사랑하였으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맞아 상객을 삼고 술을 먹으며 즐거워했다. 궁복이 취하자 그의 칼을 빼어 목을 벤 후.....
산전수전을 겪어온 장보고였으나 이번에는 그 답지 않게 허술히 염장을 맞았고 그리하여 허망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진영에서 자신의 칼에 당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됐을까? 무엇이 장보고로 하여금 정신줄을 놓을 만큼 즐겁게 만들었고 또 취하게 만들었을까? 앞서 말한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의 저자 서영교는 그에 대한 이유로써 당시에 뜬 또 다른 혜성에 주목한다.
837년의 핼리 혜성에 고무된 김명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자살시키고 왕위에 올랐듯(민애왕), 또한 김우징이 838년의 혜성으로 권토중래하여 민애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이 됐듯(신무왕), 자신도 이번에 뜬 계시와도 같은 혜성에 힘입어 틀림없이 문성왕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언급됐듯 염장은 용맹이 소문난 자였던 바, 그의 투항도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핼리 혜성으로부터 시작된 3개의 혜성은 어찌 됐든 그의 일생을 좌우한 셈이었는데, 그 세 번째 혜성도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없다. 하지만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자세하며 위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언급되었던 바, 마지막 인용문으로써 이해를 도우려 한다.
841년 11월 1일 오늘은 동지(冬至)이다. 혜성이 나타나더니 며칠이 지나자 점점 더 커졌다. 관청에서는 여러 절로 하여금 불경을 외우도록 하였다..... 12월 8일 오늘은 나라의 제삿날이다. 이 절에도 관청이 재를 마련하였다. 성안의 여러 절에서 목욕을 했다. 혜성이 점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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