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와 신무왕에 대해 쓴 김에 신무왕의 무덤을 한번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신무왕릉이라고 전승되는 무덤이 없는 것은 아니니 경주시 동남쪽 동방동에 있는 조금 작은 능묘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신무왕릉이라 불려질 이유는 박약한 바, 근거라고는 <삼국사기>에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고 언급된 것뿐이다. 현재 경주에서 제형산이라 불려지는 뫼는 없으므로 형제봉 서쪽의 옛 무덤이 그곳인가 하여 누군가가 비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무덤의 안내문에는 아래과 같은 내용을 써 놓았다. 이곳이 신문왕의 무덤일 가능성을 문화재 당국에서도 믿지 않는다는 소리다.(지금 경주에 있는 26개 왕릉 중에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능묘는 선덕여왕릉, 태종무열왕릉, 흥덕왕릉뿐이고, 좀 더 넓히자면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이 주인을 찾았다 할 수 있는 정도이다)
신무왕은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돌아가시자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이 무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신 사람들이 위 신무왕의 무덤의 대안으로 입을 모으는 곳이 있다. 다름아닌 진덕여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경주 동북쪽 현곡면 오류리의 왕릉이다. 무덤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선제적으로 말하자면 이 무덤은 신라 28대 왕 진덕여왕의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왕릉의 외관을 볼 때 봉분 주위에 둘레 돌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기는 수법은 33대 성덕왕 때부터 나타나는 무덤 양식이고
둘째, 12지신상의 조각수법인 저부조(低浮彫) 또한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늦은 기법이며
셋째,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사량부는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므로(현재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 이 무덤은 시기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진덕여왕의 능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래 27대 선덕여왕의 무덤과 비교해보면 두 무덤의 형식이 달라도 너무 달라 둘 중 하나는 전해지는 무덤의 주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가짜인 쪽은 역시 진덕여왕의 무덤이다. 선덕여왕의 무덤은 '낭산(狼山) 남쪽의 도리천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및 '낭산에 장례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써 그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여러가지로 볼 때 진덕여왕릉의 주인이 다르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 주장을 하는 그룹의 대표주자는 경주대 문화재학과의 이근직 교수로 그는 살아생전 경주 왕릉 제자리 찾기에 천착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주김씨 종친회로부터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아무튼 그가 주장하는 위 무덤의 주인은 신무왕이었다.(선생은 2011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신라 왕릉연구'가 유저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그 주인이 신무왕이라는 데 동의하기 힘들다.
이근직 교수 주장에서의 가장 큰 근거는 역시 12지신상이었다. 그는 무덤의 12지신상이 고고학적 편년으로 신무왕이 죽은 9세기 중반의 양식과 가장 어울린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얕은 부조(low relief)에 난간석이 생략된 이 무덤 양식은 12지신상 장식 무덤 양식이 퇴화된 형태로써 실은 마지막 단계의 것이다. 이는 12지신상 호석을 가진 아래의 대표적 무덤들을 보더라도 어렵잖게 이해가 되는 바, 37대 성덕왕의 것으로 보는 데 학자 간의 이견이 없는 성덕왕릉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37대 성덕왕릉(聖德王陵 )
38대 원성왕릉
39대 소성왕릉(昭聖旺陵)
40대 애장왕릉(哀莊王陵)
41대 헌덕왕릉(憲德王陵)
42대 흥덕왕릉(興德王陵)
43대 희강왕릉(僖康王陵)
44대 민애왕릉(閔哀王陵)
45대 신무왕릉(神武王陵)
무엇이 잘못인가?
우선은 당시에(7세기) 존재하지도 않은 12지신상 둘레 돌의 무덤에 김유신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 잘못이고,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지 않은 후대의 학자들 역시 잘못됐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니, 아니라고 할만한 명확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편년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위에서 말한 진덕여왕릉의 경우는 통일신라 이전에는 절대 나타날 수 없는 무덤 양식임에도 학자들은 침묵했으며, 1997년 이제껏 발굴된 바 없는 그 무덤이 도굴된 후 (어른 앉은키 정도의 높이에 폭 1미터, 길이 3.8미터 정도로 굴착되어 일부 부장품이 도난당했다) 재조사의 기회와 더불어 수정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관계자들은 무관심했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역사학의 태두라 불리는 고(故) 두계 이병도 선생은 위의 김유신 묘를 신무왕릉으로 비정한 유일한 학자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비록 식민사학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덕지덕지 묻히고 간 자라는 오명을, 특히 강역적(疆域的)인 측면에서는 깊이 뒤집어쓰고 있는 분이지만, 김유신 묘를 신무왕릉으로 비정한 점은 나름 혜안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학교 선생님인지 문화재해설사인지 알 수 없으나, 작년 8월 이곳을 찾았을 때 "김유신의 무덤은 실제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룬 왕(흥무대왕)의 무덤이라 태종무열왕보다 더 화려하다"는 설명을 학생들에게 하는 사람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정녕 신하의 무덤이 왕의 무덤보다 화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것은 사후 150년이 지난 흥덕왕 때라는 것을 그는 정녕 몰랐을까....? (김유신의 묘는 아마도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옆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46대 문성왕릉(文聖王陵)
마지막으로 46대 문성왕의 무덤을 소개하고 글을 끝내려 한다. 고고학적 편년으로 보자면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의 무덤 역시 적어도 12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만큼은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문성왕의 무덤이라 전하는 곳은 서악동의 작은 봉분이다. 서악동 고분군의 주인 모를 무덤 중의 하나를 갖다 붙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모양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가볍게 취급될 왕이 아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장보고의 난을 맞이해야 했으며 그것을 평정하고는 다시 일길찬 홍필(弘弼)의 반란 모의에 이어(841년) 이찬 김양순(金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의 반란을 겪어야 했고(847년) 다시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의 반란을 겪어야 했다.(849년) 그는 이 모든 반란을 토벌하고 역괴들을 주살하며 20년가량을 재위하다 천수를 다한 왕이다. 그 같은 왕의 능묘가 이렇듯 허술할 리 없을 터, 시기적으로나 명분으로나 아래의 무덤이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