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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무왕릉을 찾아서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8. 7. 20:37
     

     
    장보고와 신무왕에 대해 쓴 김에 신무왕의 무덤을 한번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신무왕릉이라고 전승되는 무덤이 없는 것은 아니니 경주시 동남쪽 동방동에 있는 조금 작은 능묘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신무왕릉이라 불려질 이유는 박약한 바, 근거라고는 <삼국사기>에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고 언급된 것뿐이다. 현재 경주에서 제형산이라 불려지는 뫼는 없으므로 형제봉 서쪽의 옛 무덤이 그곳인가 하여 누군가가 비정한 것이다.  
     
     

    신무왕릉이라 전해지는 곳

     
     
     
    그래서 이 무덤의 안내문에는 아래과 같은 내용을 써 놓았다. 이곳이 신문왕의 무덤일 가능성을 문화재 당국에서도 믿지 않는다는 소리다.(지금 경주에 있는 26개 왕릉 중에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능묘는 선덕여왕릉, 태종무열왕릉, 흥덕왕릉뿐이고, 좀 더 넓히자면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이 주인을 찾았다 할 수 있는 정도이다)   
     
    신무왕은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돌아가시자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이 무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신 사람들이 위 신무왕의 무덤의 대안으로 입을 모으는 곳이 있다. 다름아닌 진덕여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경주 동북쪽 현곡면 오류리의 왕릉이다. 무덤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진덕여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
    위 무덤 의 12지신상

     
    선제적으로 말하자면 이 무덤은 신라 28대 왕 진덕여왕의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왕릉의 외관을 볼 때 봉분 주위에 둘레 돌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기는 수법은 33대 성덕왕 때부터 나타나는 무덤 양식이고
     
    둘째, 12지신상의 조각수법인 저부조(低浮彫) 또한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늦은 기법이며
     
    셋째,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사량부는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므로(현재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 이 무덤은 시기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진덕여왕의 능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래 27대 선덕여왕의 무덤과 비교해보면 두 무덤의 형식이 달라도 너무 달라 둘 중 하나는 전해지는 무덤의 주인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가짜인 쪽은 역시 진덕여왕의 무덤이다. 선덕여왕의 무덤은 '낭산(狼山) 남쪽의 도리천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및 '낭산에 장례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써 그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릉 / 무덤 하단의 잡석 기단 역시 7세기 무덤 양식이라는 고고학적 편년을 만족시킨다.(여왕은 647년 죽었다)
    선덕여왕릉 안내문 / 사천왕사 위의 도리천에 장사 지냈다는 &lt;삼국유사&gt;의 기록을 적어넣었다. 태종무열왕릉, 흥덕왕릉과 함께 주인이 확실한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 여러가지로 볼 때 진덕여왕릉의 주인이 다르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 주장을 하는 그룹의 대표주자는 경주대 문화재학과의 이근직 교수로 그는 살아생전 경주 왕릉 제자리 찾기에 천착하였으며 이로 인해 경주김씨 종친회로부터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아무튼 그가 주장하는 위 무덤의 주인은 신무왕이었다.(선생은 2011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신라 왕릉연구'가 유저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그 주인이 신무왕이라는 데 동의하기 힘들다.
     
    이근직 교수 주장에서의 가장 큰 근거는 역시 12지신상이었다. 그는 무덤의 12지신상이 고고학적 편년으로 신무왕이 죽은 9세기 중반의 양식과 가장 어울린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얕은 부조(low relief)에 난간석이 생략된 이 무덤 양식은 12지신상 장식 무덤 양식이 퇴화된 형태로써 실은 마지막 단계의 것이다. 이는 12지신상 호석을 가진 아래의 대표적 무덤들을 보더라도 어렵잖게 이해가 되는 바, 37대 성덕왕의 것으로 보는 데 학자 간의 이견이 없는 성덕왕릉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37대 성덕왕릉(聖德王陵 )
     

    성덕왕릉 / 성덕왕의 재위는 702년 ~ 737년, 이름은 김흥광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으로 효소왕이 죽자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lt;삼국사기&gt;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 절터가 있어 성덕왕릉으로 비정되었다.
    성덕왕릉 세부 / 12지신상과 난간석이 둘러진 최초의 무덤으로서 그 완성미가 빼어나 최초의 것으로 보기 의심스럽기도 하나, 아니라고도 말하기 힘들다.
    성덕왕릉의 12지신상 / 독립된 석상으로 만든 까닭에 거의가 목이 달아났으나 통일신라 초기의 뛰어난 사실성을 보여준다.
    이거사지 / 참고로 이거사지의 사진을 실었다.
    청와대 부처 / 최근 갑자기 화제가 된 청와대 내 부처는 이거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다.

     
     

    38대 원성왕릉
     

    원성왕릉 / 12지신상과 난간석, 동물상과 문무인물상이 갖춰진 신라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받는 무덤이다. 원성왕릉의 무덤 양식은 고려,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역인 무인상으로 유명한 바로 그 무덤이다.
    가까이 본 원성왕릉 /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이며 내물왕의 12세손, 성한왕의 22세 손이다. 장수한 까닭에 그의 손자 김준옹이 대를 이었다.(집권 과정에 대해서는 '장보고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 참조)
    원성왕릉의 12지신상
    고부조(高肉彫)로 된 12지신상은 헌덕왕릉 것과 비슷하다. &lt;삼국유사&gt;에는 '토함산 서쪽 숭복사에 원성왕릉이 있으며 그곳에 최치원이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숭복사지는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에서 그 실재가 확인되었고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이에 숭복사지 인근의 이 무덤이 원성왕릉으로 비정됐다.
    숭복사지 삼층석탑
    숭복사지 비편

     

     
    39대 소성왕릉(昭聖旺陵)
     

    소성왕릉 / 소성왕의 재위는 799~800년, 이름은 김준옹이다.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의 아들이다. 789년 12월 29일 원성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2년 만에 죽었다. 위치는 이제껏 신문왕릉이라고 여기고 있는 월지(月池) 가는 길에서 보이는 그 무덤이다. 성덕왕릉의 무덤 형식을 빌려와 봉분 하단에 호석을 쌓고 삼각형의 받침돌을 둘렀다. 소성왕은 재위 기간이 짧고 치적도 미미하였던 탓에 그 아들인 애장왕은 내물왕계의 왕통을 다시 세운 증조부 원성왕의 무덤에 훨씬 공을 들였고 아버지인 소성왕의 무덤은 성덕왕의 반쯤 정도로만 조성했다.

     
     
    40대 애장왕릉(哀莊王陵)
     

    애장왕릉 / 애장왕의 재위는 800~809년, 이름은 김중희다. 소성왕의 장자로 피비린내 나는 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 속에서의 몇 안 되는 적장자 출신의 왕이다. 13세에 즉위했으므로 숙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 의 섭정을 받았다. 805년 에 친정을 시작하여 공식(公式) 20여조를 반포하며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나 숙부 김언승에게 피살당했다. 헌덕왕(김언승)은 애장왕의 무덤을 소성왕의 반쯤 정도로 꾸몄다. 무덤은 내남면 망성리 찾기 힘든 곳에 위치한, 지금은 민애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그곳이다.
    원화 10년명(名) 골호(骨壺) /1948년 위 무덤을 수리할 때 '원화(元和) 10년'이라고 새겨진 골호(뼈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원화는 당 헌종 때의 연호로 815년에 해당되므로 839년에 죽은 민애왕과는 24년 차이가 난다. 따라서 위 무덤은 민애왕의 것이 될 수 없고, 5~6년 정도의 거상(居喪) 기간을 고려하면 애장왕의 무덤으로서 적합하다.

     
      
    41대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 /헌덕왕의 재위는 809~826년, 이름은 김언승이다. 소성왕의 동생이며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 김인겸이다. 조카인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자신도 822년 태종무열왕계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 825년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의 난을 겪어야 했다. 죽은 뒤 천린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42대 흥덕왕릉(興德王陵)
     

    흥덕왕릉 / 흥덕왕의 재위는 826~836년이고 이름은 김수종이다. 41대 헌덕왕의 아우로, 장보고에게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허락해 준 바로 그 왕이다. 흥덕왕릉의 무인석도 원성왕릉과 같은 서역인 모습으로 서역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시기였음을 말해준다.
    가까이 본 흥덕왕릉 / 흥덕왕의 무덤은 부부 합장묘이며 봉분은 지름 20.8m, 높이 6m로서 신라하대 능묘 가운데 가장 크다.
    성덕왕릉의 12지신상 / 차츰 저부조(low relief)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흥덕왕릉비 파편 / 입구 거북돌에 세워졌을 흥덕왕릉비의 파편이다. '흥덕대왕'의 명문을 읽을 수 있다. 이 무덤은 &lt;삼국유사&gt;에 전하는 위치와 대체로 일치하고, 왕릉 주위에서 위 파편이 발견되어 흥덕왕 무덤임이 증명되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원성왕릉을 본떴다.

     

     
    43대 희강왕릉(僖康王陵)
     

    희강왕릉 / 희강왕의 재위는 836~838년, 이름은 김제륭이다. 흥덕왕의 사촌동생 김헌정의 아들이다.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아비 헌정을 도와 서열상 가장 높은 왕족인 김균정(원성왕의 손자)을 밀어내기 위한 내란을 일으켰고, 이 싸움에서 김제륭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희강왕이다. 하지만 희강왕은 같은 편이었던 상대등 김명에게 배신당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다. 무덤은 내남면 망성리 애장왕릉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신라왕릉 중에서 가장 작고 초라해 민간인의 무덤과도 진배없다.(☞ ' 장보고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 ')

     
     
    44대 민애왕릉(閔哀王陵)
     

    민애왕릉 / 민애왕의 재위는 838~839년, 이름은 김명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 김충공으로, 흥덕왕 사후의 왕위 계승전쟁에서 김제륭을 옹립해 희강왕에 등극시켰지만, 자신 역시 시중 이홍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자살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곧 장보고 군대의 지원을 받은 김우징(김균정의 아들)에게 패해 피살된다.(☞ ' 장보고와 핼리혜성') 그의 무덤은 신무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시 동남쪽 동방동 능묘가 유력하다.

     
     
    45대 신무왕릉(神武王陵)
     

    신무왕릉 / 839년 장보고의 도움으로 김우징이 새 임금이 되니 곧 신무왕이다. 하지만 그간 애쓴 보람도 없게 재위 4개월만에 병사(病死)한다. 신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자 김경응(문성왕, 재위 839~857년)은 아비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과 애달픔으로 당대 최대 왕묘이자 가장 화려한 무덤인 흥덕왕릉을 모방한 무덤을 조성한다. 이것이 바로 위 무덤으로 그간 우리가 김유신 묘로 잘못 알고 있던 바로 그 무덤이다.
    잘못된 비문 / 잘못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됐으니 조선 숙종 36년 경주부윤 남지훈은 구전돼 오는 말에 아무런 확인도 없이 무덤 왼쪽에 '신라 대각간 김유신 묘'라는 비석을 세웠고, 현대에 들어서는 다시 오른쪽에 '개국공순충장렬 흥무대왕릉(開國公純忠壯烈 興武大王之陵)'이라는 비석을 세웠다.(1970년) 그리고 이 가짜 김유신 무덤은&nbsp;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과 함께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신무왕릉의 12지신상
    옅은 부조로 식별이 힘들 정도
    저부조 양식이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잘못인가?
     
    우선은 당시에(7세기) 존재하지도 않은 12지신상 둘레 돌의 무덤에 김유신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 잘못이고,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지 않은 후대의 학자들 역시 잘못됐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니, 아니라고 할만한 명확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편년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위에서 말한 진덕여왕릉의 경우는 통일신라 이전에는 절대 나타날 수 없는 무덤 양식임에도 학자들은 침묵했으며, 1997년 이제껏 발굴된 바 없는 그 무덤이 도굴된 후 (어른 앉은키 정도의 높이에 폭 1미터, 길이 3.8미터 정도로 굴착되어 일부 부장품이 도난당했다) 재조사의 기회와 더불어 수정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관계자들은 무관심했다. 
     
     

    1997년 8월 25일 KBS 뉴스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역사학의 태두라 불리는 고(故) 두계 이병도 선생은 위의 김유신 묘를 신무왕릉으로 비정한 유일한 학자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비록 식민사학의 잔재를 털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덕지덕지 묻히고 간 자라는 오명을, 특히 강역적(疆域的)인 측면에서는 깊이 뒤집어쓰고 있는 분이지만, 김유신 묘를 신무왕릉으로 비정한 점은 나름 혜안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학교 선생님인지 문화재해설사인지 알 수 없으나, 작년 8월 이곳을 찾았을 때 "김유신의 무덤은 실제적으로 삼국통일을 이룬 왕(흥무대왕)의 무덤이라 태종무열왕보다 더 화려하다"는 설명을 학생들에게 하는 사람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정녕 신하의 무덤이 왕의 무덤보다 화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김유신이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것은 사후 150년이 지난 흥덕왕 때라는 것을 그는 정녕 몰랐을까....? (김유신의 묘는 아마도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옆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46대 문성왕릉(文聖王陵)
     
    마지막으로 46대 문성왕의 무덤을 소개하고 글을 끝내려 한다. 고고학적 편년으로 보자면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의 무덤 역시 적어도 12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만큼은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 문성왕의 무덤이라 전하는 곳은 서악동의 작은 봉분이다. 서악동 고분군의 주인 모를 무덤 중의 하나를 갖다 붙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모양새다.
     
     

    문성 왕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서악동 고분

     
    그러나 그는 그렇게 가볍게 취급될 왕이 아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장보고의 난을 맞이해야 했으며 그것을 평정하고는 다시 일길찬 홍필(弘弼)의 반란 모의에 이어(841년) 이찬 김양순(金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의  반란을 겪어야 했고(847년) 다시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의  반란을 겪어야 했다.(849년) 그는 이 모든 반란을 토벌하고 역괴들을 주살하며 20년가량을 재위하다 천수를 다한 왕이다. 그 같은 왕의 능묘가 이렇듯 허술할 리 없을 터, 시기적으로나 명분으로나 아래의 무덤이 제격이다.
     

      

    문성 왕릉 / 문성왕의 재위는 839~857년, 이름은 김경응이다. 이 문성왕릉을 정점으로 12지신상 양식의 왕릉은 차츰 쇠퇴해져 뒤로 갈수록 처음의 원형분으로 회귀된다. 150여 년 동안에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위와 같은 형식을 지켜 나가기는 사실 어려웠을 것이다. 이 무덤은 현재 경덕왕릉으로 불려지고 있다.
    문성 왕릉의 12지신상
    문성왕릉 12지신상 탁본
    저부조이면서도 섬세해 신라 12지신 조각상 중 최고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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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