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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룡사 장육존상은 어떻게 생겼었을까?
    수수께끼의 나라 신라 2020. 5. 23. 19:58

     

    『신라 최대 사찰 황룡사의 장육존상은 어떻게 생겼었을까?』

     

    우리 글 문법에서 대과거가 있느냐 없느냐, 쓰는 게 맞느냐 틀리느냐의 문제가 채 정리되지 않은 줄 안다. 하지만 '쓰지 말자'는 쪽으로 기운 것 같고, 또 쓰면 '문장이 졸렬해진다'는 쪽으로 몰아붙이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대과거를 쓰지 않을 수 없겠으니 황룡사 장육존상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마치 현재 있는 것처럼 '황룡사 장육존상은 어떻게 생겼을까?'로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불상이기에 '생겼었을까'가 시제에 더 어울린다는 얘기다.

     

    그런데 반전이라면 반전이랄까, 황룡사 9층탑과 더불어 황룡사와 신라를 대표했던 그 불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존속했던 것 같다. 황룡사 9층탑이 몽고의 칩입 때 소실된 건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니 만큼 장육(1장 6척, 약 5m)의 개금(蓋金) 불상도 그때 불타 녹아버렸을 것 같음에도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7년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주(周, 측천무후 때의 당나라 이름)가 큰 불상(佛像)을 만들자 적인걸(狄仁傑)이 상소하여 그 역사를 파하였으니, 인걸의 상소가 옳은 것이었다. 지금도 역시 요망한 말로 대중을 현혹하는 자가 반드시 많이 있을 것인데, 관찰사(觀察使)나 수령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단(異端)이 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 듣건대, 경주(慶州)에 동상(銅像)이 있는데, 길 가운데 서 있다고 하니 부수어 군기(軍器)를 만듦이 가할 것이다.”

     

     

    황량한 황룡사 터
    황룡사 터의 분황사 당간지주
    장육삼존불상이 서 있던 대좌 / 석가모니 본존불과 문수·보현보살의 협시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당시 경주 길가에 서 있을 수 있는 불상은, 아울러 부수어 군수장비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큰 동상은 황룡사 장육존상밖에 없다. 《삼국유사》에서 일연 스님이 사라졌다 언급한 것은 아마도 예전의 장중미를 말했던 것일 터, 삼존불의 일부나 주변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십대제자상의 일부는 조선 중종 때까지도 남아 버티다 결국 억불책(抑佛策)에 희생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황룡사 장육존상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황룡사 터에 세워진 역사문화관 속 가상의 삼존불을 참고하거나 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삼존불을 찾아가 봐야 한다.(1627년 건립된 이 미륵불은 황룡사 삼존불상을 모방해 세운 신라 혜공왕 시절의 불상대로 만들어졌다고 전래되고 있으나 1935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를 1939년 김복진이 옛 모습을 더듬어 소조불(塑造佛)로 다시 세웠다. ☞ '사라진 미륵불상과 김복진의 예술세계')

     

     

    황룡사 역사문화관 시뮬레이션 그림
    금산사 미륵삼존불 입상 / 본존불 높이 11.8m이며 좌우 협시불은 8.8m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을 그 대강의 형상일 뿐 당시의 장육존상을 재현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그 부처님의 얼굴을 떠올리기는 힘든데, 그와 같은 노고를 덜어주려는 생각인지 오래전 이 폐사지에서 문득 불두 하나가 출현했다. 장육존상과 같은 시기(57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3cm의 작은 불두였다.

     

    황룡사지 출토 금동사유상 불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 불두는 그 넓은 황룡사 터가 무색하게 유일하게 발견된 1점의 불상이다. 게다가 장육존상과는 무관한 금동사유상의 불두였는데, 그것이 사유상의 것이라 추정됨은 오른쪽 뺨에 손가락을 댄 자국이 남아 있어서이다. 아울러 그 손가락 자국은 우리 불교 미술의 최고 걸작인 2점의 금동사유상(국보 78호와 83호)을 모두 신라시대 것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위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으며 더불어 일본 국보 1호 고류지(광륭사) 목조사유상도 신라의 것일 확률을 높였다.(☞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

     

     

    국보 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
    한국의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의 목조 반가사유상 / 한국 것은 높이 93.5cm, 일본 것은 123.5cm이다.

     

    손가락 자국과 더불어 황룡사 출토 불두가 쓰고 있는 삼산관(三山冠) 역시 증거가 됐다. 서산 마애삼존불에서도 보이듯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한쪽 다리를 괸 반가부좌 상태로써 생각에 잠긴 불상)은 백제에서도 많이 만들어졌다.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7세기 초 이전 고구려에서도 사유상이 성행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강우방 <한국 불교조각의 흐름>) 한국과 일본의 반가사유상이 신라의 것이라 치부되는 이유는 이 황룡사 출토 불두의 영향이 크다.

     

     

    메트로폴리턴 박물관의 신라 사유상 1957년 '한국 국보전'에 이어 '황금의 나라 신라' 전으로 지난 2013년 다시 뉴욕을 찾았다.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한국미술5천년'전의 대표 미술품으로 그 미소는 이미 세계인의 혼을 빼앗은 바 있다. (매경 DB사진)
    신라 반가사유상의 미소

     

    반가사유상들의 은근하고 고졸한 미소는 '한국미술 5천년'전 등을 통해 이미 세계인의 넋을 빼앗은 지 오래다. 하지만 그 불상들의 얼굴은 어쩐지 건조하다. 반면 황룡사 작은 불두의 얼굴은 매우 따뜻하다. 명상에 잠긴 도톰한 눈꺼풀은 한편으로는 어쩐지 졸린 듯한 모양새지만 친근하고, 둥근 콧방울 아래의 올라붙은 입꼬리는 세상만사 모든 번뇌에 자유로운 달관자의 그것과도 같다. 나는 황룡사의 장육존상도 그렇게 인간적이며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황룡사지 출토 금동사유상의 미소

     

    장육존상이 있던 황룡사의 금당은 현존 최대의 목조 문화재인 경복궁 근정전보다도 훨씬 컸던 건물이다. 이 거대한 당우 속에는 필시 백률사 청동여래입상과 같은 당당한 모양새의 부처님이 세 분 서 계셨을 터이지만 그들은 백률사의 청동불처럼, 혹은 훗날의 석굴암 여래처럼 경직한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신 집도 저리 큰 데 그 큰 집에서 5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찍어누르듯 내려 보고 있다면 그 얼마나 무섭고 질리겠는가?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국보 28호)

     

    신라는 그렇듯 거대한 절과 탑과 불상을 만들었으나 그것은 관(官)의 힘이지 아직은 민(民)의 힘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140년 이상 불교가 늦게 수용됐다. 토착 신앙에 눌린 탓이었는데, 이와 같은 사바세계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찍어 누르는 듯한 부처의 힘이 아니라 아픈 데를 보듬어주고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는 부처였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의 그와 같은 부처가 이후 1500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에 나와 그 시절을 증언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두와 아울러 장육삼존불 중 한 분의 머리 조각이었을 나발도 발견되었다. 이 또한 작은 조각에 불과했으나 역할은 지대했으니 막연히 장육이라 불리는 장육존상의 크기를 비로소 가늠케 해주었다. 그 나발 조각을 시뮬레이션해본 결과 두상의 크기는 거의 2m에 이르렀고 전체 크기는 기존의 장육을 훨씬 상회하는 10~12m에 달했던 것인데, 만일 이것이 본존불의 나발이 아니라 다른 협시불의 것이라 한다면 장육존상 본존불의 크기는 더욱 커지게 된다.

     

    1500년 전, 황룡사 금당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하지만 얼굴만큼은 한없이 따뜻했던 용화세계의 부처님이 사바세계를 내려보고 계셨던 것이다.

     

     

    1982년 발견된 높이 17 cm, 너비 4.5cm, 두께 2.5.cm의 청동 나발 조각과 손가락
    불두에 맞춰본 나발 조각 / 황룡사역사문화관
    극세 밀화로 표현한 황룡사 / 김영택이 펜으로 복원시킨 황룡사 9층 목탑과 금당이다. 탑의 높이는 81m였고, 금당은 정면 51.7m, 측면 26,7m였다. 이 금당 안에 장육존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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