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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미륵불상과 김복진의 예술세계
    미학(美學) 2018. 2. 20. 06:10


    정관(井觀) 김복진(金復鎭)은 아는 사람을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그런 정도의 지명도를 가진 미술가다. 하지만 김복진을 빼고는 한국 조각을 말할 수 없다. 그를 한마디로 소개하자면 한국의 조각에 처음으로 서양 기법을 도입한 사람으로, 그림으로 말하자면 우리 국사 책에 나오는 표암 강세황(1713-1791)쯤 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김복진이 그처럼 옛날 인물은 아니니, 1901년에 태어나 1940년에 죽었다. 보다시피 딱 40년을 살았는데, 그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데는 이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간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우울한 시대상의 산물일 것이다. 


    쉽게 말해 좌익 쪽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가 활동하고 죽었을 때까지가 모두 일제시대인 바, 그것이 무슨 문제일까 했더니 알고 보니 그의 와이프가 문제였던 것 같다. 부인인 허하백은 김복진 사망 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고,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실종 또는 타살된 것으로 알려져 김복진의 이름이 금기시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부인도 미술을 했나 해서 알아보니 화백은 아니었고, 다만 이름이 비슷한 하백이란 인물로서 한국전쟁 전까지는 사회주의 단체인 전국부녀회동맹 제2부총재라는 어마무시(?)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김복진은 그저 미술만 한 게 아니어서, 잘 알려진 '토월회'라는 최초의 연극단체를 결성해 신극 운동을 주도하며 연극과 평론활동에도 종사하였을 뿐 아니라 1930년 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서 언론 활동도 하였으며 만화와 광고에도 최초로 눈을 뜬 언론인이었다. 또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즉 '카프(KAPE)'와 '조선미술원(朝鮮美術院)’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이에 그의 동생인 소설가 팔봉 김기진은 그를 평하여 "망형(亡兄) 김복진의 이름은 조선문화사의 첫 페이지에 기록돼도 좋으리라 생각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절대 과장된 말은 아닐 듯싶다. 



    김복진(1901-1940)과 그의 동생인 소설가 김팔봉(1903-1985)



    그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해 조각을 공부했다. 이후 1924년 데이코쿠미전(帝國美展)에 작품 '나상(裸像)'이 입선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조각가로서의 길을 걸었는데, 1925년 제4회 선전(鮮展)에 작품 '3년 전'이 3등상을 수상하였고, 제5회 및 제16회 선전에서는 특선, 제15회 선전에서는 입선하였다. 그는 이 명성을 바탕으로 1939년 법주사 대불(大佛) 제작에 들어갔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40년 서울에서 사망했다.(이상의 글은 '위키백과 ' 참조) 


    그는 사상성이 문제가 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인생이 순탄치 않았음에도 언제나 선구자적인 삶을 지향했는데, 특히 그가 한국 조각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각작품이 낯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직업을 인식시키기는 쉽지 않았을 터,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추사(김정희)의 글씨를 알고 위창(오세창)의 전각을 알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 '석고 조각' '모델 조각' '나체 조각' '동상 조각'에 왜들 흥미를 아니 가지며,왜들 많이 지망을 아니하는지요. 서도는 조각의 '어머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더구나 추사의 글씨는 그대로 조각의 원리입니다. 추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추사를 아는 사람이면 그대로 조각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조각하는 사람은 글쓰는 사람 보다도, 노래하는 사람 보다도, 그림 그리는 사람 보다도 휠씬 수효가 적습니다. 이 이치는 알수 없는 일입니다."



     '3년 전' 

     

    위 조각상은 그의 자작상으로 선전, 즉 조선미술대전 공모전에서 3등상을 받은 바로 그 작품인데, 제목이 '3년 전'이니 만큼 그의 나이 22살 때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개인적 평가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젊은 나이의 작품 답지않게 그때부터 묵직한 무언가가 풍긴다. 이후 그는 아래의 '피리 부는 소년'을 비롯해 '불상습작(佛像習作)', '백화(百花)', '위이암 선생', '소년' 등의 섬세한 작품을 제작했는데, 가장 아래 사진의 '소년'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피리 부는 소년

    경주조각연구원에 계신 분으로부터 이 작품을 만든 이는 김복진이 아니라 그의 제자인 윤승욱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작품의 성별도 남자가 아닌 여자로 작품의 이름은 '피리 부는 소녀'였다. 이에 사진을 삭제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도록에 '김복진의 피리 부는 소년'으로 돼 있어 그렇게 이해할 다른 분들을 위해 이 글을 덧달았다. 가르쳐 주신 분께 감사드리며, 차제에 본문을 번역해 중국 블로그에 올린 어느 분께서도 감사 말씀 드린다. 

     


    불상습작(1936)


    백화(1936)


    위이암(윌리엄) 선생(1937)


    소년(1940)



    특히 그는 1936년 위의 '불상습작'의 제작을 계기로 김제 금산사 미륵전에 안치될 미륵삼존불 제작의 대역사를 맡아 우리에게 새로운 미륵세계를 선사해주었다. 예전 어떤 유명인사의 글에서 이 작품을 폄하하는 내용을 본 적이 있으나, 아마도 그것이 문화재가 아닌 현대의 작품이기에 그리 여겼을 것이라고 좋게 이해하고 싶다. 그 글의 필자도 김복진 선생의 작품 수준에 대해 논한 것은 아니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듯 이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삼존 대불은 김복진의 손에 의해 완성된 완벽한 미륵하생(彌勒下生)의 구현이다. 만일 그것이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이라서 폄하하고 싶다면, 오히려 그같은 재료로 빚은 저 완벽미를 칭찬해줘야 마땅하다.(그는 제 1차 카프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두 번째 징역을 살고 나오면서 불상 조성을 의뢰받았는데, 이때 김복진은 주저없이 수락했다 하며 제작에 있어서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전한다)

     


    금산사 미륵삼존불 입상. 본존 높이 11.8m, 좌우 협시불은 8.8m이다. 



    이 미륵불은 1935년 화재로 소실된 신라시대의 장육미륵불상을 대신한 것으로,(1627년 재현됐던) 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이 계승되면서도 얼굴과 손가락의 표현에 있어서는 작가의 근대식 사실주의 기법이 도입됐다고 한다. 이 불상은 아래의 신라시대 청동대좌 위에 그대로 세워졌으며, 일설에 따르면 후백제 시대, 아들 신검에 의해 폐위된 견훤이 갇혀 있던 곳이 불상 밑의 청동솥이라 하는데, 진위를 떠나 불상의 대좌가 청동솥이라는 것 자체가 진귀하다.

     

    불상이 안치된 미륵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3층 불전으로 국보 62호로 지정돼 있으며, 밖은 3층이나 안은 통층이다. 김복진은 위 불상의 제작을 1936년에 개시하여 1939년 9월에 완성하였는데, 그 높이를 설정함에 있어 통층의 닷집과의 조화에 엄청난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사진과 그림은 '푸른하늘'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금산사  미륵전


     

    이 불상을 제작한 후 그는 다시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대불 입상을 의뢰받아 작업에 들어갔다.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해 징발된 용화보전 내의 금동불상(경복궁의 중건과 당백전의 제조를 위해)과 그 당시 헐린 2층 전각 용화보전 터에 그것들을 대신하여 지어지는 의미있는 미륵불이었다. 이 불상의 재질은 시멘트로서 그나마 충분한 양을 공급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자신이 말하던 '똑똑한 조각'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는데, 그 이듬해 그만 원인불명의 병에 걸리고 말았다.

     

    이후 그는 치료와 제작을 병행하며 불상의 완공을 위해 노력했으나 8월 18일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불상의 제작은 작가의 사망과 한국전쟁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종전 후에 그의 제자인 윤효중, 장기은, 임천의 손을 거쳐 1963년 완공을 보았다.





    법주사 팔상전과 당시의 불상 



    이 미륵대불은 비록 시멘트 불상이지만 그 아름다움과 수준높은 완성도로써 칭송을 받았다. 7~80년대 속리산 법주사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의 사진에는 누구에게나 이 불상이 배경 화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사심 없이 말하거니와 이 불상은 정말로 빼어나며, 비록 고인이 완성시키지는 못했더라도 위 '불상습작'과 비교해보면 제자들의 손에 고인의 의지가 반영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래, 조류 등의 피해로써 관모가 제거되어진 철거 직전의 사진을 보면 그 의지가 더욱 드러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난 후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으로, 과거 후삼국 시대의 궁예가 한, 혹은 요즘 사이비 불교에서 떠드는 현생 미륵 어쩌고 하는 소리는 한마디로 다 개소리다. 다시 말하자면 미륵부처는 오직 마음 속에서만 구현될 수 영겁의 부처님인데, 그 영겁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이곳 법주사의 미륵불상은 30년도 못 가 해체되고 말았다. 국립공원입장료 등으로서 재산을 불린 사(寺) 측에서 보다 근사한 부처님을 원했던 것인데, 겉으로의 구실은 이 시멘트 불상의 안전문제였다. 


    1990년 불상은 해체되고 청동 160톤이 들어간 높이 33m의,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높이를 목표로 한 새로운 대불이 착공되었다.(이 세계 최대불의 꿈은 1993년 홍콩 포린 사원에 의해 완공도 보기 전에 깨지고 만다) 이후 이 불상은 5년의 작업을 거쳐 완성되었고, 이후 2002년에 금 80kg으로 전체를 개금한 금동미륵입상이 재탄생하였다. 하지만 이 불상은 금새 도마 위에 올려졌던 바, 그 경박성으로 인해 여기 쓰인게 금이 맞냐는 논란도 있었고, 청동시절이 더 근엄해보여서 나았다는, 혹은 그 전의 시멘트 불상이 더 근사했는다는 논란도 있었다. 공통적인 것은 이 같은 불상의 조성이 과시적이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점이었다. 





    현재의 불상(아래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가져옴)



    나의 시각으로는, 그 재질이 시멘트였건 어쨌건(안전 문제야 보강하면 될 일이었고) 최고의 장인들이 빚은 훌륭한 근대문화재 하나가 사라졌다는 느낌이다. 지금의 개금한 청동불상은 한마디로, 아니어도 너무 아니다. 주위와 전혀 조화되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격조 높은 천년고찰의 그 격을 한없이 떨어뜨린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부처님 중에서 저렇게 생기없고 생각없어 뵈는 얼굴을 하고 있는 부처는 처음이다.(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듯하다)

     

    그리고 그 불상의 제작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을 터인데, 그것을 본 용화세계의 미륵부처님은 얼마나 답답해 하셨을까, 뭐 이런 생각이 들 뿐이다. 정말로 힘들고 헐벗은 많은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계실 부처님일 텐데 말이다. 아무튼 중생들이 하는 일이란 다 이렇다. 




    이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그나마 아래의 개금하지 않는 모습이 훨씬 나음을 알 수 있다. 금(金)은 석굴암 본존불과 같이 미간의 백호 정도로 족하다. 




    다시 김복진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그의 작품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의 유작은 모두 동생 김팔봉 작가가 보관했는데, 한국전쟁 중 전부 소실됐다고 하는 바, 실물로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은 금산사 미륵전의 삼존불상을 비롯한 불상 몇 구뿐이다. 다만 법주사 측에서 제공한 아래의 사진 설명은 그나마의 위안이다. 





    그리고 매우 엉뚱하게도 그의 작품은 이소룡 제작·주연의 영화 '사망유희'의 스케치로 남았다. 이 영화는 생전의 이소룡이 법주사의 팔상전을 보고 착안했다 하는데, 탑의 각 층을 올라가며 무술고수와 대결하는 내용으로, 미륵대불과 더불어 NBA 출신의 농수선수 카림 압둘자바(219cm)와 겨루는 이소룡의 발차기가 인상적이다. 물론 그의 명품 발차기도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림은 네이버 블로그 '시네마트 4'에서 퍼옴.






    * 기타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kr,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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