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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덕사종과 황룡사종(I)
    미학(美學) 2018. 3. 3. 02:29


    훌륭한 예술품은 사실 이러저러한 설명이 필요 없다. 개개인의 느낌은 다르더라도 그저 보이는 대로 보고 느끼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아방가르드 작품이라 할지라도 훌륭한 예술품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개 느낌이 공통적이다. 그 느낌이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이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이 아름다움에서 좀 더 나아간 ‘뛰어난 아름다움'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뛰어난 아름다움을 ’고결하다‘고 표현하는데, 내가 고결하다고 여긴 우리나라 예술품 중의 으뜸은 단연 봉덕사종이다. 그 '고결미'에 대한 찬사는 이미 여러 사람들의 입과 펜을 거쳐 갔던 바, 내가 따로 개인적 시각으로 그 찬사에 한 줄을 더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봉덕사종(국보 29호)

    771년 신라 혜공왕 때 만들어져 국가 최고벼슬아치가 직접 관리하는 1급 국찰 봉덕사에 걸렸다. 정식명칭은 성덕대왕 신종이며, 조선시대에는 영묘사와 봉황대 옆 종각에 보관되다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무게 18.9톤으로 전통 종 가운데 가장 크다. 



    봉황대 고분 옆 종각에 보관될 때의 모습. 일제 시대 촬영된 사진이다.



    지금의 봉황대 고분과 그 앞에 설치된 성덕대왕 신종 종각터 안내문



    다만 이왕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 종의 세계사적 가치만 몇 자 적고자 한다. 이 봉덕사종은 흔히 뛰어난 예술품의 자격으로서 요구되는 3가지 가치, 즉 미학적 · 역사적 · 자본적 가치를 오롯히 충족시키는 정말이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예술품이다. 한마디로 종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걸작이다. 종은 불교 미술에서 탄생하였지만 동양은 물론 서양에도 존재하며, 우리나라 종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위 봉덕사종은 가히 공전절후의 작품인 바, 그로부터 13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모든 종들이 이 종을 답습하는 것을 보아도 그 절대적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771년 이 종이 만들어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보다 더 훌륭한 종이 탄생되지 않았다. 의미적으로 부여하자면 그저 미국 독립운동과 연관돼 유명해진 '자유의 종(Liberty Bell)' 정도가 비견될까? 1976년  미국의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도 바로 이 봉덕사 종의 복제품으로서, 영국이 보낸 '대헌장(The Magna Charta)'의 원본, 1876년 프랑스가 보낸 '자유의 여신상'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우리로서는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다 여겨진다.  




    자유의 종(Liberty Bell)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 있으며 "모든 땅 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공표하라"는 레위기(25:10)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이 종은 한 늙은 타종자가 1776년 7월 4일 독립 찬성의 제 2차 대륙회의 소식을 듣고 종을 울렸다는 소설로써 유명해져 이후 미국 독립의 상징물이 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 페드로에 있는 우정의 종(Korea bell of Friendship). 미 독립 200주년의 선물로 보내진 것이다. 


    최고의 반전 영화로 꼽히는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의 한 장면이 여기서 촬영됐다.



    우리나라 역시 그 이후로도 많은 종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봉덕사종 이후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보다 더 뛰어난 종은 탄생되지 않았으니, 여러가지 형태로서 조형미술이 발전된 지금에 있어서도 만들어지는 모든 종들은 그 아류작에 불과하다. 누가 더 충실히 원 종을 모방했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니, 세계에서 그렇게 가치가 결정되는 예는 오직 이 하나 뿐이리라 여겨진다.



     

      경주 불국사종  


     

      진천 보탑사종


     

      충북 영동 반야사종 


     

      경주 토함산 통일대종

     

     

      경주 분황사종

     

     

      원주 구룡사종


     

      화천 평화의 댐 위에 세워진 '세계 평화의 종'


     

     서울 보신각종(제야의 종 타종 장면)

     

    박물관의 보신각종(보물 2호)

    세조 14년(1468년) 신덕왕후(태조 이성계의 계비)의 원찰인 정릉사에서 주조됐으나 정릉사 폐사 후 원각사(파고다 공원)에 걸렸고 임진왜란 후 종로의 종각에 걸렸는데, 1985년 위의 종을 만들어 대체한 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총높이 3.18m, 입지름 2.28m, 무게 19.66톤으로 규모는 얼추 봉덕사종과 흡사하나 그에 비해 여러모로 뒤떨어짐을 한눈으로 알 수 있다. 


    재현된 성덕대왕 신종


    위 종의 안내문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 아래 같은 식이라면 아주 많이 곤란하다. 경기도 파주 광탄면에 있는 보광사의 경우이다. 




    보광사 범종각 안내문 

    안내문에 조선후기 범종'이라는 오류가 보인다. 1634년 병자호란 무렵은 보통 조선 중기로 분류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범종은 보존을 위해 대웅보전 안에 잘 보관되긴 했는데, 



    원 종이 있던 자리에는 봉덕사종의 모사품이 내걸렸다. 대웅보전 안의 종을 본떠 만들었다는 안내문의 내용과 다르다.



    그리고 위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어떤 분께서는 이 절의 대웅보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지 않음을 누차에 걸쳐 지적했던 것 같은데,(안내문 맨 아래 내용을) 여전히 바로잡혀 지지 않고 있다. 




    대웅보전의 석가모니불과 협시불

    대웅보전 안에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졌다는 사실도 어색하거니와 위 주불은 항마촉지인(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켜 대지의 여신을 불러내어 석가의 깨달음을 증명시키자 악마가 항복함)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석가여래의 형상이다. 주불은 소조불로 17세기 작품이며, 좌우의 목조보살 입상은 1633년 양주 회암사에서 만들어진 것을 옮겨왔다. 아무튼 대웅보전 안의 부처님은 비로자나불이 아니다. 



    대웅보전 전경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국보 63호)  

    인근 도피안사 대적광전 안의 불상은 신라 하대인 865년 제작된 대표적인 비로자나불로 지권인(왼손 검지를 오른손이 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비로자나라는 말은 진리를 태양빛에 비유한 것으로, 그것이 형상화된 비로자나불은 8세기 중엽 성립해 고려와 조선까지 이어졌는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형상이다. 위 사진 우측은 2007년 좌측 불상 몸체의 개금과 나발(머리칼)의 페인트 칠을 벗겨내 본래의 형상을 되찾고 보존 처리된 모습인데, 이는 매우 잘한 일이다. 이 비로자나불은 신라 하대 이곳 호족의 얼굴을 형상화했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릴 정도로 인간미가 풍기는 신라 공예의 수작이다.(사진 출처:연합뉴스)


      


    이 봉덕사종을 만든 이유는 당연히 소리를 듣기 위함으로, 위의 음통을 비롯한 여러가지 기능으로서 이 종의 소리는 단연 으뜸이다.(이것은 주관적 판단이 아닌 일본 NHK 방송에서 세계의 여러 종들을 비교해 내린 결론이다) 종의 주조도 주조거니와, 소리를 듣고 나면 이런 소리를 만들어낸 신라인들에게 정말이지 탄복을 아니할 수 없는데, 더불어 이와 같은 종을 만들기가 참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인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 종의 별칭인 에밀레로서, 누구나 다 아는 인신공희(人身供犧)의 내용이다. 


    하지만 이 종에 관해 '에밀레종의 비밀'이라는 무려 534쪽의 방대한 분량의 책을 쓴 성낙주 선생은 이 종을 만들 때 인신공희가 일어났을 확률은 단 1%도 없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것은 나 역시도 동의하는 바, 만일 그같은 희생을 바탕으로 완성된 종이라면, 종의 주조 이전에 종교의 존재 가치조차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저 샤먼과 같은 하등종교에서나 찾을 일이다. 여기서 분명히 말하거니와, 종의 울음소리가 종의 주조에 희생된 아이가 에미를 찾는 '에밀레'처럼 공명된다는 그 끔찍한 이야기는 사서에도 없고, 설화와 전설에도 없고, 민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그 이야기의 근거를 찾자면 일제시대인 1925년 8월 5일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렴수근이라는 동화작가 지망생이 '어밀네 종'이라는 동화를 기고한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 잔혹동화에 봉덕사종이 지칭되지도 않았건만 어쩐 일인지 이야기는 철커덕 봉적사종에 갔다 붙었다. 누군가의 악의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사실 붙은 데라곤 거기밖에 없다. 거대하고 완벽한 종, 그리고 그 심금을 울리는 종소리와 공명은 어쩌면 그 스스로 비극을 불러왔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과 궤를 같이 하는 바, 예를 들자면 의자왕의 3천 궁녀 이야기나 고려 시대 때 늙은 부모를 산에 갖다 버리는 고려장 같은 이야기들이다. 의자왕이 거느렸다는 3천 궁녀 이야기는 조선 시대 문인의 과장된 시 한 줄이 시작이요, 고려장의 이야기는 저 일본의 '나라야먀 부시코'에 나오는 악습이 아무런 이유없이 고려에 갖다 붙여진 경우이다. 에밀레종의 스토리도 그렇게 탄생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죄라면 오직 고결한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품이라는 것뿐이다. 


    이 아름다운 자태와 소리를 지닌 신라 종은 그 많은 신라의 절 수만큼 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신라 종은 모두 7점으로, 국내에는 위의 봉덕사종과 오대산 상원사종(725), 청주 출토종(청주박물관)의 3점이 전하고, 일본에는 복정현 연지사종(833), 구주 송산촌대사종(904), 도근현 운수사종(9세기?), 광명사종(9세기?) 등 4점이다. 한편 파손된 종으로는 남원 실상사종(동국대박물관), 양양 선림원종(국립중앙박물관)이 있고, 망실되어 탁본이 전하는 것으로는 일본 무진사종(탁본)의 1점이 있다.(성낙주 저 '에밀레종의 비밀')



    오대산 상원사종.(국보 36호) 높이 167cm, 입지름 91cm로 725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



    1970년 청주 운천동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동종(보물 1167호) 높이 78cm 



    일본 후쿠이현 조구신사에 있는 신라 연지사종. 높이 111.1cm . 왜구가 약탈한 우리 종을 자신들의 국보로 삼았다. 


    일본 오이타현 우사신궁에 있는 신라 송산촌 대찰의 종. 높이 85.3cm.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보이다. 


    일본 시네마현 운수사(운주지)의 신라 종. 높이 75.3cm (출처: 다음블로그)


    일본 시네마현 광명사(고묘지)의 신라 종. 높이 88.1cm (출처: 다음블로그)



    * '봉덕사종과 황룡사종 II'로 이어짐.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kr,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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