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제주 산지천 석인상의 정체는?
    탐라의 재발견 2021. 10. 29. 00:16

     

    우리나라가 지방색이 강한 나라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것이 문화적 특질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조형물로서는 장승과 돌하르방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 그중 제주도 돌하르방은 다시 또 지역 나름대로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제주도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3곳으로 행정 분할되었던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의 돌하르방이 각각 다르다.  

     

     

    제주목 관덕정 돌하르방
    대정현 동문 앞 돌하르방
    정의현 서문 앞 뚱뚱이 돌하르방

     

    육지에서는 이와 같은 지역적 특질이 두르러 지지 않으나 남원 실상사 인근의 석장승 3기는 다른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는 통일성을 보인다. 이중 실상사 바로 앞에 위치한 석장승 2기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 육지는 제주사람들이 한반도 본토를 이르는 말인데 나도 한번 써봤다)

     

    중요민속자료 제15호. 한 쌍의 돌장승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두 장승 모두 높이 2.5m로 벙거지를 쓴 모습이며 주먹코가 특징적이다. 윗송곳니가 아랫입술 위까지 길게 나와 있으며 수염은 한 가닥만 새겨져 있다. 몸체에는 각각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글자와 '옹정삼년을사삼월입(雍正三年乙巳三月立)'이라는 명문이 있어 조선 영조 때인 1725년(영조 1)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또 사찰 입구에 있다는 점에서 도강의 안전과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실상사 석장승의 조금 오래된 사진 
    실상사 석장승 얼굴 비교 

     

    석장승 외 목장승도 많이 전해지나 보전상태가 나빠 지역적 특질까지 살피기는 어렵다. 목장승은 노천에서 비바람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때로는 간 큰 놈들의 땔감으로도 쓰였을 것이다. 판소리 가루지기 타령(변강쇠 타령) 속의 가루지기도 장승을 뽑아 연료로 사용했다가 동티가 되어 죽는 걸로 나오는데, 필시 마을의 목장승을 보호하려는 민간의 희망이 삽입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목장승의 경우는 숫자는 많되  옛것은 드무니 목장승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경남 함양 벽송사 목장승도 안내문에 따르면 일제시대 초기 것에 불과하다. 다만 제주도의 경우는 돌이 흔한 까닭인지 석인상(石人像)의 형태가 다양하게 출현하며 돌의 내구성으로 인해 보전상태 또한 좋다. 아래 사진 속 동자석 같이 생긴 석인상은 내가 제주도 숲길에서 발견해 나란히 세워놓고 지나간 것이다.(길이 약 1m 정도로 정체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그리 오래된 석물은 아닌 듯하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우도에서 발견한 정체 모를 석인상

     

    말한 대로 제주도의 석인상은 그 형태가 다양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데, 돌하르방의 경우는 마을 수호신 정도로 정리된 듯하다.(☞ '제주도 돌하르방의 미스터리') 하지만 제주시 동·서쪽에 자리한 동자복과 서자복은 미륵불인 것이 확실하니, 보존 환경에 비해 의외로(?) 깔끔히 설명되어진 서자복 안내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다음 사진은 제주시의 가장 오랜 포구인 옛 산지항(지금의 건입포구) 인근에 위치한 동자복 미륵과 안내문이다. (동자복 안내문의 내용은 평이하다)

     

     

    서자복 미륵 안내문
    273m 서자복 미륵의 상반신. 필시 바다 일에 관련된 기복(祈福) 대상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서자복 인근의 용연과  입구의 바다 
     286m의 동자복 미륵 
    동자복 미륵 안내문과 근방의 건입포구

     

    하지만 건입포구에서 이어지는 산지천 바위 위에 자리한 석인상은 정말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언뜻 옛 무덤 앞에 세워져 있던 동자석이 제 자리를 잃고 헤매다 산지천변에 정착한 듯 여겨지지만 국립제주박물관 야외전시장의 동자석들과 비교해보면 그 격이 훨씬 높다. 산지천 석인상이 경이롭고 흥미롭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그 '격'에서 유래하니 이와 같은 격조 있는 석인상은 육지에서도 귀하다. (게다가 이 석인상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제주도의 동자석과 장명등

     

    산지천 석인상

     

    산지천 석인상에 대한 설명은 이제껏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까닭에 그 몸통에 쓰여 있는 '朝禾(조화)'라는 글자도 아직 마땅한 뜻풀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격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는 서귀포시 표선면사무소 앞에 방화(防火)의 상징으로 서 있었다는 목선대장군(木仙大將軍)이라는 비슷한 크기의 석상이 있어 산지천 석인상 역시 (서울 광화문 해태상처럼) 방화의 역할을 기대하며 세워진 석인상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아니라 원래부터 이곳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표선면 석장승과 안내문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