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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파이더맨 양헌수 장군의 생전에 세워진 비석들
    탐라의 재발견 2021. 11. 1. 00:30

     

    대동법을 실시한 조선 최고의 경제관료 잠곡(潛谷) 김육에 대해 포스팅하며 전국에 있는 그의 공덕비를 열거한 적이 있다. 그것이 한두 개라면 부도덕한 위정자의 공치사 흔적쯤으로 치부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으나 이 정도면 고개가 수그려질 수밖에 없을 터, '잠곡 공 선정불망비(潛谷公善政不忘碑)'는 충남 아산과 예산, 전북 익산과 군산, 경남 함양, 개성직할시 등지에서 볼 수 있고, 평택에는 특히 대동법 시행을 치하해 세운 '김육 대동균역 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歲不忘碑)'가 있으며, 묘소가 있는 남양주 소쿠리 마을에는 따로 신도비가 세워졌다. 

     

     

    남양주시 삼패동 소쿠리 마을에 있는 김육 신도비

     

    그런데 올 가을 제주도를 답사하던 중 잠곡 김육비에 못지않은 비석이 우연찮게 연이어 눈에 띄었다. 고종 초에 제주목사를 지낸 하거(荷居) 양헌수(梁憲洙, 1816-1888년)의 공덕비, 혹은 선정비다. 그가 제주목사를 지냈던 만큼 한두 개쯤의 비석이야 세워질 수 있겠지만 가는 곳마다 발견되는 예는 유례없는 일이었으니, 하도 많아 어디서 봤는지 일일이 기억도 못할 정도이다. 찍어온 사진을 대강 보자면 다음과 같다. 

     

     

    제주목관아 내의 영세불망비 /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임
    제주목관아 내의 제패비(除獘卑) /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의 청덕휼민비(淸德恤民碑)
    제주 외도동 월대(月臺) 앞의 선정비

     

    뿐만 아니라 삼성혈 안에 모아놓은 비석군(群)에서도 보았으며, (확인은 못했으나) 제주시 삼양동, 애월읍 애월리와 구월읍, 김녕리와 조천읍 비석거리, 안덕면 창천리에도 목사 양헌수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마을사람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비석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지만, 불과 2년 반의 재임기간 동안(1864년 3월 ~ 1866년 8월) 뭔 좋은 일을 그리 많이 했기에 비석 또한 그리 많을까 궁금히 여겨질 만하다. 

     

    그래서 주목해봤더니 1865년 대홍수 기록이 눈에 띄었다. 1865년의 이른바 을축대홍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지 않는 것을 보면 전국적 피해를 낳은 재해는 아닌 듯하다. 하지만 중국 양자강 지역에서 제주도에 걸쳐 정체되었던 기압골이 불러온 대홍수는 중국과 제주도에 엄청난 피해를 불러온 듯했으니, 올해 6월 중국 9개 성(省)을 강타한 비의 양이 1865년 대홍수 이후 156년 만의 최고 수위(322mm)였다는 데서 당시의 강우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게다가 그해 7월에는 태풍까지 불어 큰 바람에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렸으며 모든 곡식이 절종 상태에 이르렀다 하는데, 2016년 태풍 '차바'가 왔을 때 제주항의 컨테이너 박스가 종이상자처럼 날리는 광경을 목격한 나로서는 당시의 피해가 조금은 상상이 미친다. 이때 양헌수는 성을 돌아보며 통곡했다 하며, 장마와 태풍으로 생겨난 이재민을 위해 고종에게 간절한 구호의 장계를 올려 내탕금(內帑金) 2천 냥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또한 각 도(道)에서 진휼미를 얻어와 제주 백성의 구호와 피해 복구에 힘썼는데, 그 외에도 재임기간 내내 선정을 베풀고, 전(前) 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에 연루된 자들을 징치해 민중의 칭송을 받았으며, 몽매한 제주도민을 위해 <훈민편(訓民篇)>이라는 도덕책을 저술해 도민을 순화 계도시켰다고 한다. 제주도는 역대로 수탈이 지속돼 온 탐학의 땅이었던 바, 그의 선정은 더욱 빛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 양헌수를 1년 유임시켜 도민 구휼에 힘쓰도록 하였으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1866년 제주도를 떠나야 했다. 그해 9월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동양함대가 조선정부의 천주교도 탄압과 프랑스 신부 처형을 이유로 조선 땅에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는데, 9월에는 한강 양화진 부근 전투에서 경기 수영(水營)의 군대가 박살났고, 이어 10월에는 강화부와 물길(강화해협) 너머의 문수산성마저 함락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흥선대원군이 유능한 무관인 양헌수를 순무천총(巡撫千總)으로 임명해 급히 불러올렸던 것이니, 이를 보면 그는 마치 위급한 상황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구해내는 조선의 스파이더맨처럼도 여겨진다. 

     

     

    서귀포시 안덕면 '제주 피규어 박물관' 외벽에 붙은 스파이더맨
    '제주 피규어 박물관' 안의 스파이더맨
    부산 광복동 롯데백화점의 스파이더맨은 흉물스럽다는 여론에 결국 철거되었다.
    특정 부위가 너무 강조되었다 하여.....

     

    그가 떠날 때에는 백성들이 길을 메워 서서 울며불며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하는 바, 이를 보면 이임 후 세워진 제주 각지의 비석들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로써 양헌수는 정들었던 제주도를 떠나 강화도에서 스파이더맨 급의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다음회에는 그가 이끄는 김포 통진부 군사 549명의 강화도 탈환 전투를 그려볼까 한다. 양헌수는 어떻게 열세인 군사와 무기로써 프랑스 침략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정족산성의 남문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동문과 양헌수 승전비각
    순무천총 양헌수 승전비
     갑곶진 입구의 강화비석군 / 모르긴 해도 이곳에도 양헌수 비가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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