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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2차 침입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11. 01:16

     

    1866년 9월 30일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물러나자 조정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이양선이 침입했을 때 싸울 생각은 않고 오히려 먹을 것을 전달해준 수령방백들을 처벌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강화도에서부터 김포 부평 행주 양천을 거쳐 서강에 이를 때까지 정신 나간 지방관들로부터 소, 닭, 돼지, 계란, 청태, 백채 등을 전달받아 잘 처먹으며 진군하였던 바, 함선이 진입했을 때 강력 항의한 영종도 첨사 심영규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벌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며칠 후 이상의 처벌론은 모두 없던 소리가 되었으니, 물러간 줄 알았던 이양선이 10월14일 다시 강화도 해상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다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마당인지라 수령방백들을 처벌하고 어쩌고 할 짬이 없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지난 달보다 수가 불어난 7척이었고 배에 실린 병력도 빵빵해 보였던 바, 본격적인 전쟁을 위해 출현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다시 나타난 프랑스 함선

     

    * 앞서 말했듯 중국으로 돌아갔던 로즈 제독은 본국 정부에 통보하여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군함과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승인받았고, 이에 나가사키에 정박 중이던 기함(旗艦) 게리에르호를 비롯한 군함 7척 및 나가사키와 요코하마에 주둔 중인 해병대 1천 명의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로즈는 원래 포병을 포함한 육전대가 2,000명 정도는 돼야 전쟁이 가능하다 보았는데, 아시아에 파견된 프랑스 병력이 때마침 일어난 코친차이나(남 베트남) 반란 진압에 투입되는 바람에 병력 동원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럭저럭 1천 명은 긁어모았으므로 자신의 직할군 600명과 함께 조선 침공을 감행한 것이었다. (1858년 베트남을 침공할 때는 3,000명이었다)   

     

    로즈는 강화 점령을 기정사실화하여 출격 전 중국 정부 및 각국 공사관에 강화해협 봉쇄령(The Blockade of the Salée River)을 발송하고, 10월 10일 쯔푸항(芝罘港) 공동관리자인 영국 해군 사령관 킹 제독과 영국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쿵둥다오(崆峒島) 일대에서 해상 기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로즈는 14일 아침, 기함과 순양함 2척을 작약도에 남기고 나머지 4척의 군함에 병력을 나눠 실은 후 강화도 입구의 섬 영종도부터 공격했다. 앞서 1차 침입 때부터 영종도 첨사 심영규가 눈에 거슬렸기도 했지만 전략상 영종도는 반드시 탈취해야 할 섬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2시간 여의 공격 끝에 영종진을 함락시켰는데, 이 영종도 전투를 훗날(1876년) 강화도를 침공한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가 그대로 답습한다.(☞ '강화도 조약의 수수께끼 I')

     

     

    이 그림은 앞에서도 게재한 영종도에 상륙하는 일본 해군 육전대의 모습이다. 이때 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군민을 학살, 약탈하고 관청을 불지르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미 프랑스 군에게 한번 크게 혼났음에도 조선에서는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강화해협을 타고 북상한 프랑스군은 광성보에서 2차 전투를 치렀지만 상륙을 시도하지 않았다. 해안에 인접해 나란히 서 있는 높은 성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보았던 것이니, 로즈는 다시 함선을 북상시켜 정오 무렵 갑곶진 앞 해상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냅다 함포 사격을 개시하였던 바, 갑곶을 자신들의 상륙 지점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 엄청난 화력에 갑곶진을 방어하던 강화부의 군인들은 놀라 도망하고 프랑스 군 600명은 어렵지 않게 갑곶진에 상륙했다. 

     

     

    광성보의 상륙을 포기하는 프랑스군 / 프랑스 신문 르일루스트레이션의 삽화
    안해루 쪽에서 본 광성보. 이곳에서는 신미양요 때도 미군과의 큰 전투가 벌어졌다./인천관광공사 사진
    프랑스군은 염하(강화해협)를 거슬러 이곳 갑곶진에 도달한다.
    갑곶돈 안내문
    갑곶돈의 옛날 사진 /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러 온 구로다와 동행했던 사진사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사진이다. 이곳에는 훗날 아래의 강화대교가 건설돼 옛 모습이 복원되지 못했다.
    갑곶돈에서 바라본 강화대교 / 멀리 문수산성 희우루가 보인다. 강화부 성에 이어 문수산성도 프랑스군에 함락된다.
    갑곶돈에 전시된 대포
    갑곶 전투를 그린 그림

     

    갑곶진을 돌파한 프랑스군은 곧 강화부 성의 동문과 남문으로 척후병을 보내 수비 상황을 탐지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5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니 여기서도 성문을 향한 함포 사격에 이어 우수한 화기로 무장한 프랑스 군대가 성문을 넘었다. 이에 동문을 지키던 초관 김재현은 프랑스군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남문을 지키던 이시원 이지원 형제는 병사들과 함께 쫓기다 결국 동반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에 강화부는 단 하루 만에 함락되었고, 백성들은 너도나도 강화나루로 몰려들어 뭍으로의 무작정 탈출을 감행했다.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 강화부 성을 관찰하는 로즈 제독 / 오른쪽은 부관 올리비에 대령이며, 왼쪽은 중국으로 도망갔다 프랑스군의 길 안내인으로 나선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김학이, 심순여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왼쪽은 역시 중국으로 도망갔다 통역관으로 참전한 리델 신부다.
    함포를 쏘는 프랑스 함선
    포격당하는 강화부 성
    공격하는 프랑스군
    도망가는 조선군
    프랑스군에 돌파된 동문

     

    강화부 성의 함락에 놀란 조정은 우선 사신과 공문을 보내 프랑스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로즈는 선교사를 처형하고 천주교 탄압하는 등 인의(仁義)를 저버린 행동을 한 조선은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천명하고, 자국의 선교사 9명이 죽었으니 이에 상응하여 조선인 9천을 죽이겠다는 이율배반적인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는 철수를 원한다면 신부를 사형시킨 책임자를 처벌하고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수호조약을 맺자고 응대했던 바, 화의는 곧바로 결렬돼버렸다. 

     

    길잡이 겸 통역관으로 나섰던 리델 신부는 프랑스군이 조선에 상륙하면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이 환영 인파를 이룰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인파는 없었고 대신 장치선, 송운오, 이성의, 이성집, 박복녀, 김계소 등의 천주교 신자가 나타나 프랑스군의 주거와 식사를 도왔다. (이후로도 그들은 도우미 역할에 충실했으니, 양헌수가 결사대를 이끌고 정족산성으로 잠입했을 때 그들의 이동 상황을 탐지해 프랑스군에 알리기도 했다)

     

    프랑스군은 텅 비다시피 한 강화부 성을 약 한 달간 휩쓸며 강화부 내아(內衙)에서 발견한 19 박스 분량의 은괴(銀塊) 등 쓸모 있는 물건들을 노획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일은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책 중 가치 있어 뵈는 책 345권을 골라 자신들의 함선으로 옮긴 일이었다. 당시 이 일을 수행했던 도세리(d’Osery) 중령은 본국의 해군성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과 보고를 올렸다.

     

    11월 16일 우리는 강화읍의 고문서 서고(외규장각)를 발견했는데 조선의 국왕이 소유하고 있는, 하지만 드물게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조선의 역사와 전설, 문학 등에 관한 신비를 설명해줄수 있는 대단히 미려하고 중요해 보이는 책들을 골라내 내용을 확인하고 규정에 따라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이 책들은 각하는 물론 국립도서관에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될 것으로 사료되는 바, 조만간 본국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 잘 알려진대로 프랑스 군인들이 가져갔던 그 책들 중 의궤(儀軌: 조선 왕실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가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1년 영구대여의 형식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올해 2월 아래와 같은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지난 2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를 담당하는 학예사 이메일로 약정서 한 통이 왔다. 발신자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외규장각 의궤 귀환 10년을 맞아 대여 합의를 갱신하는 내용인데, 이전에 없던 조항이 붙어 있었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닌 제3자가 상업적 목적으로 의궤 사진을 이용하려면 우리에게 돈을 내야 한다"는 것. 당황한 담당자는 "우리 박물관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데다 모든 소장품을 누구나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게 개방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답신을 보냈다. (2021.04.22. 다음뉴스 기사)

     

     

    프랑스군이 의궤를 탈취해간 강화부 외규장각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 전시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조선왕실 의궤들을 살펴보고 있다. / 조선일보 DB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중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어람용)의 한 장면 /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가 10년 전인 2011년 4월 국내로 돌아왔지만, (그래서 그 흥분감에 감춰졌지만) 완전한 반환이 아닌 5년마다 대여를 갱신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까닭에 소유권은 지금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 / 연합뉴스 사진

     

    또 조정에서는 이경하 이기조 이용희 이원희를 급히 김포 통진(通津), 광성진(廣城津), 부평, 제물포로 파견했는데, 그즈음 제주목사로 재직 중이던 조선의 스파이더맨 양헌수가 흥선대원군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스파이더맨 양헌수 장군의 생전에 세워진 비석들') 그리고 곧 순무영 천총(千總)으로 임명돼 김포 통진으로 파견되었으나 앞서 말한대로 이때는 이미 강화부가 프랑스군에 함락되었을 뿐 아니라 해협 건너 한성근이 지키는 문수산성(文殊山城)도 격전 끝에 함락된 상태였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프랑스군도 이때 큰 피해를 보았으니 공격하던 군사 50~60명이 사상했다)

     

     

    문수산성 희우루
    문수산성 안내문 / 병인양요 때 벌어진 치열한 격전으로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파괴됐고 총 길이 6,123m의 성곽 중 4,640m만 남았다고 쓰여 있다.
    문수산성에서 바라본 강화해협 / 양헌수는 야밤에 이 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으로 잠입했다.

     

    양헌수는 통진부에서 문수산성을 바라보며 성의 함락을 아쉬워했으나 탈환을 포기하고 곧장 강화부의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화기와 병력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를 이기려면 어융방략(禦戎方略: 매복·기습·육박전과 같은 전술이 어우러진 일종의 게릴라 전법)과 같은 기병지계(奇兵之計)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1월 7일 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도하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그가 통진부의 군사가 총 549명이었다. 하지만 적진의 중앙으로 돌격하는 양헌수의 작전에 겁을 먹고 움츠리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양헌수는 이들을 독려하며 어렵게 구한 배 5척으로써 덕포진에서 강을 건넜는데 이때 도강(渡江)에 앞서 읊은 비장한 시 한 수가 그의 병인양요 전쟁일기인 <병인일기(丙寅日記)>에 전한다.  

     

    上馬忘有家     

    말에 오르면 집을 잊고

    出城忘有身

    성을 벗어나면 내 한몸 잊는다.

     

     병인일기 / 전쟁기념관
    양헌수 부대가 건넌 광성보 근방의 손돌목 해협

     

    강을 건넌 양헌수의 부대는 야간 행군으로 강화부의 남쪽에 위치한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숨어들었다.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三郞城)으로도 불리는 이 산성은 정족산을 의지한 험준함과 영조 15년(1739)에 고쳐지은 까닭에 허술한 곳이 없었던 바, 소수 병력인 양헌수 군의 전투지로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양헌수는 성을 점거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이 이끄는 포수 161명을, 동문에는 초관 이렴(李濂)이 이끄는 포수 150명을,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 이대흥(李大興)이 이끄는 포수 157명을 배치하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당시 프랑스군 병사 주베르가 그린 정족산성 / 남문과 동문으로 집결한 프랑스 군사들이 보인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었으니 앞서 말한 천주교 신자들이 조선군의 군사행동을 감지해 고변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11월 9일 아침,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160명가량의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의 남문과 동문으로 총을 쏘며 공격해 들어왔다. 그동안 엄폐를 하고 기다리던 조선군도 적들이 사정거리에 이르자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전쟁기념관에 재현된 남문 전투 모습
    정족산성 남문 종해루(宗海樓)
    마찬가지로 전투가 벌어졌던 정족산성 동문 / 문루는 그때도 없었다.
    동문에서 바라본 정족산성 남문
    동문 안에 세워진 순무천총 양헌수 승전비
    동문 근방에서 주운 명문 기와 조각 / 명문은 흐려 파악이 안 되지만 지금도 이런 기와가 발견된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발견일: 2011. 11. 06)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전투가 행해진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로 그리 길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한 60∼7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이었다. 프랑스군은 공격적 입장이었고 은폐나 엄폐가 마땅치 않았을 터, 사상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으나 다만 병력의 증파는 충분히 가능했다. 당시 조선에 출병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 동원된 병력의 10배에 이르는 1천 600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끝으로 강화도에서 완전 철수하여 돌아갔던 바, 알려진 내용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짐작된다.  

     

    양헌수는 다음날인 11월10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공격해올 것으로 여겨 단단히 준비를 하였으나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그 대신 강화부에서 화염과 연기가 치솟았던 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본 결과 프랑스군이 강화부 내의 주요 건물들을 소각하고 물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헌수가 <병인일기>에 '적들은 우리가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제 사격을 가했음에도 당황함이 없이 자세를 그대로 유지히며 사격을 지속했다 (그래서 놀랬다)' 기록한 것을 보면 이 같은 전투력을 지닌 프랑스군이 단 한 번의 패배로 철수한 것이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그들의 대미지가 생각보다 컸다는 것 외에 달리 상상할 무엇이 없다.

     

    이로써 정족산성 전투는 조선군이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첫 전투이자 마지막 전투가 되었으니 프랑스는 이때 물러간 이후 다시는 조선을 넘보지 않았다.* 그리고 양헌수는 지금껏 '서양과 싸워 이긴 유일한 조선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으니 '조선의 스파이더맨'이란 별명도 그리 엉뚱하지는 않다. 

     

    * 이로부터 26년이 지난 1900년, 제주민란 일으킨 이재수가 천주교인 309명을 죽였을 때, 프랑스 신부의 요청으로 제주도에 들어온 프랑스 함대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주도민 전부를 죽이겠다는 으름장을 놓았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 '제주성을 점령한 이재수와 난의 결말'

     

     

    전쟁기념관의 프랑스군 소총과 조선 화승총 비교 / 그런데 이때 프랑스군이 사용한 것은 위와 같은 후장식 샤스포 총이 아니라 전장식 미니에 탄을 쓰는 퍼거션 캡 소총이었다는 말이 있다.(샤스포 총은 1866년 개발되어 1867년부터 사용되었으므로) 만일 그렇다면 프랑스의 화기는 같은 전장식인 조선의 머스켓 화승총에 비해 크게 위력적이지 않았을 터, 무기의 비교 우위를 느끼지 못한 프랑스군이 전격적으로 철수를 결정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871년 신미양요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니 당시 미 해병대가 사용한 M1871 레밍턴 롤링블록 소총은 뒤에서 슬라이딩 식으로 탄환을 밀어넣는 후장식 총이었으므로 사거리는 둘째 치고서라도 장전속도에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머스켓 화승총을 들고 싸운 조선군이 전멸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에서 전멸당한 조선군 사진 
    신미양요 당시 덕진진을 점령한 미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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