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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로 보는 쌍권총 김상옥 의사의 활약 루트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2. 2. 16. 04:48
지난 1월 22일은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순국한 지 99년이 되는 날이다. 그래서 그날에 맞춰 그의 일생에 관한 글을 포스팅하고 싶었으나, 1923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숨었던 행당동 사찰 및 일본 경찰과 1 : 1000의 총격전을 벌였던 효제동 현장을 찾는 일이 늦어져 날짜를 맞추지 못했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그곳들을 찾게 되었던 바, 그간 찍은 사진, 수집한 자료들과 함께 글을 올린다. 김상옥 의사의 일생에 대해서는 그간 <밀정>, <꼬꼬무> 등에서도 다뤄 많이 알려져 있으나 약술(略述)하자면 다음과 같다.
1890년 서울 종로의 한 가정에서 4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난 김상옥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며 가계를 도와야 했다. 그는 14세 때, 당시 나이로서는 힘들 법한 철공소에 들어갔으나 빠른 적응으로 스무 살 무렵에는 50여 명의 직원을 둔 사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그해 3.1운동이 일어나며 인생이 바뀌게 되니, 만세현장에서 일제의 총칼에 희생된 동포들을 목격한 그는 나머지 생을 조선의 독립에 쓰기로 마음먹는다.
이에 청년 지성들(박로영, 윤익중, 신화수, 서대순, 정설교, 전우진, 이혜수 등)을 규합한 그는 '혁신단'이라는 독립결사단체를 만들었다. 이후 사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하니, 사업에서 번 돈으로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고, 동지들과 함께 등사판 지하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조선민족의 해외 독립운동 상황 등을 세상에 알렸다. 아울러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이며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나 결국 체포돼 종로경찰서에서 40여 일간 갖은 고문을 당한다. 그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되지만 온몸이 곪아 터져 피고름이 흐를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이후 그는 지금과 같은 미온적 방법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투쟁을 결심하니, 1920년 4월 북로군정서 독립군 출신의 김동순 및 윤익중, 한훈, 서대순 등과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의 살해와 주요 기관 파괴를 모의했으나 미국 국회의원의 방한 시기에 맞춘 사이토 총독 암살 계획이 거사 하루 전날, 김동순과 한훈이 일경(日警) 밀정의 신고로 체포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김상옥도 이때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그 와중에도 홀로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그해 10월 한국을 벗어나 중국 상해로 탈출했다. 그는 그곳에서 김구, 이동휘, 조소앙 등을 만났고, 자신의 성격에 맞는 무력항일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다. 그리고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을 지원받아 서울에 잠입,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조선인 탄압으로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피신한다.
일경은 범인 색출에 당연히 혈안이 되어 설쳐댔지만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낸 게 없었는데, 그러던 중 어떤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근무하던 제 오빠에게 제보 하나를 했다. 자신의 세 살고 있는 주인집에 수상한 자가 숨어 있다는 것으로서, 매부 고봉근의 삼판통(三坂通, 후암동) 자택에 은신하며 사이토 총독 암살을 재시도하던 김상옥의 존재는 그렇게 드러났다. 그는 사이토가 일본 국회 참석을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를 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이토 암살을 위해 후암동에 머무르던 차였다.
이에 1월 17일 새벽, 일경 20명이 후암동 고봉근의 집을 포위하고 김상옥 체포를 기도했으나 포위를 좁혀가던 순간, 집안에서 김상옥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에 곧 고봉근의 집 앞에서는 일대 총격적이 벌어졌다. 결과는 일경 유도사범이자 순사부장인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즉사, 이마세 킨타로(今瀨金太郞) 경부(종로경찰서 사법계 주임)와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 경부보(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는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일본경찰들이 총상으로 우왕좌왕하는 사이 김상옥은 지붕으로 올라가 육혈포 발포와 함께 이리저리 건너뛰며 포위망을 뚫었다. 그 후 곧장 남산으로 올라가 장충단 솔숲을 경우해 왕십리 산비탈 쪽으로 넘어왔다. 그는 그 과정에서 눈밭에 미끄러지며 가지고 있던 권총 3정 중 1정을 분실하는데,(이 총은 그 후 이만길이라는 자가 우연히 습득해 종로경찰서로 들어간다) 이것을 보면 그는 남산을 넘으며 수없이 미끄러지고 자빠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여하히 남산을 넘은 그는 왕십리 무학봉(無學峰) 아래에 있는 작은 절 안정사(安定寺)를 발견하고 숨어들었다.
김상옥은 탈출 과정이 급박했던지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신발조차 신지 못했다. 다만 권총 3자루와 총알만은 챙겨 왔는데 그것을 우선 숲에 숨기고 주지스님에게는 노름을 하다 발각되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거짓말로써 하룻밤을 신세 졌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짚신 한 켤레와 털모자 하나를 얻어 쓰고 그곳을 나왔다. 그는 그러면서도 지독한 조심성을 보였으니 혹시라도 추적이 있을까, 짚신을 거꾸로 신어 눈밭에 찍히는 행선지를 어지럽혔다.
그는 다음날인 19일 저녁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보내고, 이튿날 아침 모친이 살고 있는 창신동 마을로 가 어머니를 잠깐 뵈었다. (아마도 마음속으로 하직 인사를 드렸을 것이다 / 수유리 이모 댁으로 가서 하루를 쉬었다는 말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 어의동(효제동)에 있는 이태성의 집으로 갔다.(지금의 효제동 73번지) 그곳은 그가 태어난 72번지 바로 옆집으로 어린 시절부터의 동무이자 혁신단 동지인 이혜수가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집에서 손발의 동상을 치료하며 이혜수 등과 함께 또 다른 거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그곳도 안전한 도피처는 못되었다. 김상옥 체포 작전의 일환으로써 피체된 옛 동지 전우진은 심한 고문 끝에 그가 숨을 만한 데를 몇 곳 일러주었는데, 그 가운데 이태성의 집이 있었다. 이에 1월 22일 새벽 3시, 경성 전역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300명에서 1000명까지 분석이 다양하다)이 어의동 일대를 완전 포위하고 김상옥 체포에 들어갔다. 잠결에 들이닥친 일경에 도망칠 새도 없었던 그는 다락 비슷한 조그만 벽장 속에 들어가 솜이불로 앞을 막고 숨었다. 일경 중의 첫 사망자는 벽장문을 열었던 구리다 경부였다. 그 첫 발을 시작으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는 두꺼운 솜이불을 보호막 삼아 보이는 적들을 향해 쌍권총을 갈겨댔는데, 과거 의열단 시절, 10발을 쏘면 8발 이상을 과녁에 명중시켰던 명사수였던 바, 그 사격 솜씨에 일경들이 하나 둘 쓰러져나갔다. 그러자 일경들이 잠시 주춤했고 그 사이 뒷담을 넘어 옆집으로 들어갔다.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다시 골목골목과 다섯 집(효제동 72,73,74,74,76-2번지)을 넘나들며 총을 쏘아댔는데, 압권은 골목에 숨어 사격하는 그를 저격하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갔던 경찰 2명이 김상옥의 총을 맞고 굴러 떨어진 일이었다. 그와 같은 총격전이 무려 3시간이나 지속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일경 16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렇게 수백 발의 총을 쏜 그는 마지막 총알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쏘았다.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눈을 뜬 채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경들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무서워 가까이 가지 못했으며 주검은 골목에 뉘어진 그대로 가족에게 인계되었다. 생가인 72번지와 옆집인 76-2번지 사이 골목길이었다. 그의 주검에서는 무려 11발의 총탄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1월 26일 아침 장례절차를 마치고 이문동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지는 지금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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