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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1차 침입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10. 22:27

     

    병인양요는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서양 오랑캐의 소요라는 뜻이다. 글자가 말해주듯 병인년의 외침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모양새가 달랐으니 양코쟁이 오랑캐의 등장은 5천년 역사에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오랫동안 외침을 겪어 나름대로 내성을 지닌 민족임에도 병인년 프랑스의 침범에는 쉽게 무너졌다. 과정을 보자면 프랑스군의 화력도 화력이었지만, 사령관 로즈(Pierre Gustave Roze) 제독의 치밀한 계획도 한몫했다. 

     

     

    강도동문(江都東門)의 현판이 걸려 있는 강화부 성의 동문 망한루(望漢樓)
    강도남문(江都南門)의 현판이 걸려 있는 강화부 성의 남문 안파루(晏波樓).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동문과 남문으로 들어와 강화부를 함락시켰다.

     

    1866년(고종 3년) 병인년 프랑스의 침입은 그해 일어난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겉으로의 구실이었다. 흔히 병인박해로 불리는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조선인 신자 8,000명뿐 아니라 몰래 포교하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 9명도 붙잡혀 처형당했는데, 이때 펠릭스 클레르 리델이란 신부가 달아나 지금의 충남 예산 솔뫼성지에 숨어 있다 용당리 포구에서 극적으로 배를 구해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리하여 7월 7일 북경의 프랑스 대리공사(代理公使) 벨로네(Henri de Bellonet)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이를 기화 삼은 로즈가 극동함대를 출동시킨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은 8년 전의 베트남과 닮은꼴이었다.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 역시 공식적으로 가톨릭을 박해했으니 1848년 이후 20,000명 이상의 신도들이 처형되었는데 이 중에는 프랑스 선교사가 20명가량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베트남을 동양 진출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야욕(특히 나폴레옹 3세의 야욕)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던 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중국 주둔군 3,000명으로써 베트남을 침공해 점령하였다. 그 침략 전쟁의 당사자였던 로즈가 이번 기회를 놓치려 들 리 없었다.  

     

     

    취조받는 베르뇌 주교.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로 조선 제 4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던 시메옹 프랑수와 베르뇌 주교는 1883년 2월 23일 체포되어 광화문 우포도청으로 끌려가 국문을 당했고 3월 7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효수되었다.

     

    공명심에 불탄 로즈는 출병을 본국 정부에 통보하지도 않았다. 로즈는 황제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 조선 침략을 당연히 승인하리라 생각했기에 사후 조치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외상 무티에르의 질책을 받는다) 당시의 프랑스 황제 루이 나폴레옹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이후 수립된 제2공화국에서 삼촌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후광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부를 무너뜨리고 다시 황제 제도를 부활시킨 후 황제에 오른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권력욕 명예욕이 남다른 인물로서,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망상으로 똘똘 뭉친 그는 유럽에서도 좌충우돌하였고, 멀리 아시아까지 진출해 남 베트남을 점령하였다. 로즈와 벨로네는 그와 같은 루이 나폴레옹이 조선 침략을 마다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후 1870년 7월에 프로이센과 보불전쟁을 일으켰다가 스당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고 결국 폐위당한다. 그리고 영국 망명 후 사망하며 용두사미의 인생을 끝내지만 그가 질러놓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오랫동안 애물단지로 남았다) 

     

     

    루이 나폴레옹 황제
    영화 레미제라블의 포스터. 제2공화국의 정치가였던 빅톨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에 환멸을 느끼고 정계를 은퇴한 후 당시의 시대상을 그린 소설 '레미제라블(가장 비참한)'을 쓴다.
    베트남을 침입한 프랑스 함대. 1858년 루이 나폴레옹은 프랑스 선교사 살해사건을 구실로 베트남을 침공해 점령한다.
    다낭에 상륙하는 프랑스 해병대(1858년)
    쟈딘 성(사이공)을 점령한 프랑스 해병대(1859년)

     

    하지만 그 와중에도 로즈는 신중함을 보였으니, 병인박해에 앞서 행해진 프랑스 신부 3인의 순교(1839년 기해박해 때)에 항의해 출동한 함대가 보령 앞바다 모래톱에서 좌초당해 오도가도 못하다 겨우 빠져나온 일을 상기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사전 정찰 및 강화해협과 한강의 수심 측량을 선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866년 9월 18일 로즈 제독은 기함(旗艦) 프리모게호와 포함(砲艦) 타르디프호, 통보함 데루레드호를 직접 지휘해 산둥반도 쯔푸항(芝罘港)으로부터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로즈는 산둥반도에서 조선 서해안으로 곧장 나아가 아산만, 덕적도, 물치도를 정찰하고 9월 23일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랐다. 프랑스군은 영종도에서는 강한 항의를 받았으나 강화부와 김포, 양천 등지에서는 충돌을 피하려는 그곳의 지방관으로부터 고기를 포함한 식량까지 대접받으며 별 탈 없이 한양의 목전까지 진출하였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이양선에 도성이 혼란으로 요동쳤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생각해보라. 어느 날 아침 한강에 외국 군함 3척이 떠 있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피에르 귀스타브 로즈 제독
    로즈가 출항한 산동반도 옌타이(煙臺)의 어제와 오늘. 쯔푸항이 있는 옌타이는 청나라가 2차 아편전쟁에서 영불연합군에 패배한 후 1857년 영˙불의 조차지가 되었다.
    옌타이의 위치
    프랑스 함대의 칩입로 / 빨간 선이 1차 침입로이다.

     

    물론 조선 측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았으니, 어영청 소속의 양화진(楊花鎭) 군사가 출동하여 구경 나온 주민들과 강창(江倉: 세곡·稅穀을 저장한 광흥창과 풍저창) 부근 마을의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한편으로는 함대가 출진하여 진영을 갖추며 프랑스 군대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이때 양화진에는 총 10대의 전함이 배치돼 있었으나 몇 대가 출동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9월 26일 아침, 도성을 향하는 프랑스 함선과 충돌했다. (쪽수는 많았지만 덩치로는 비교가 안 되는 형국임)

     

    발포는 프랑스의 타르디프호가 먼저 했다. 포함 타르디프호의 포가 일제히 불을 뿜자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서도 바로 함포로 응사하였다. 이에 마포 서강은 삽시간에 난리통이 되었지만 승부는 곧 결정 났다. 조선군이 쏜 포탄은 중간에 강물 속으로 처박힌 반면 저들의 포탄은 조선군의 판옥선을 정확히 가격해 부숴버렸다. 이렇게 배 한 척이 박살 나자 조선군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쳤고, 프랑스 군도 상륙을 위해 서강 기슭에 배를 댔다.

     

    드라마 '찬란한 여명' 속의 프랑스군 포격 장면

     

    그러나 상륙은 하지 못했다. 이양선이 김포에 이를 즈음, 급히 순무영(巡撫營) 중군으로 임명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출신의 이용희가 훈련도감 군병(기병 200명과 보병 700명)을 이끌고 서강 나루에 나타나 배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적들은 좀 놀란 듯 배를 사거리 밖으로 후퇴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퇴각을 하지도 않았으니, 급히 배를 움직이다 모래톱에 좌초된 것이었다. 

     

    훈련도감 군사들도 영문을 몰라 (혹은 겁을 먹고)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하루 나절을 대치한 함선은 다음날인 27일 아침, 요행히 모래톱을 빠져나와 선수를 돌려 강화해협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러고도 또 며칠을 마물렀으니 아직 정탐의 임무를 마치지 못한 듯하였다. 로즈는 9월 30일, 마침내 작성을 마친 지도 3장 및 작약도에 남겨진 데루레드호와 함께 쯔푸로 돌아갔다.(프랑스의 1차 침공)

     

    중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비로서 이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즉각 루이 나폴레옹에게 자신감 만땅의 조선 침공 계획을 피력하였고, 예상대로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함과 병력의 동원을 승인받았다. 그는 곧  게리에르호를 포함한 군함들 및 나가사키와 요코하마의 프랑스군을 쯔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한 차례의 기동 훈련을 가진 후 게리에르호를 기함(旗艦)으로 하는 7척의 함대에 1천6백 명의 병력을 싣고 10월 11일 중국을 떠났다. 바야흐로 제2차 침공이 시작된 것이었다. 

     

     

    신문로 금호 아트홀 앞의 훈련도감 터 표석
    나가사키 항에 정박 중인 게리에르호 (가운데)

     

    한편 서강 나루에서의 패전에 놀란 흥선대원군은 제주목사 양헌수를 순무영 천총(千總)으로 임명해 급히 불러올리는 등 프랑스군의 재침에 대비했고,(☞ '스파이더맨 양헌수 장군의 생전에 세워진 비석들') 고종은 내탕금 3만 냥을 급히 풀어 수군의 전력을 보완하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대책이 효과를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으니, 양헌수가 김포에 도착했을 때는 프랑스군이 이미 강화부로 진군한 후였다.

     

     

    절두산과 절두산순교박물관
    사진작가 조성봉이 1971년에 촬영한 절두산과 한강 풍경/ 위쪽 흰 모래톱이 보이는 곳, 지금의 서강대교 밤섬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절두산 중턱의 양화진(楊花鎭) 터
    양화진 표석 / 1754년(영조 30) 한강 수로와 도성 방어의 요충지로 인식돼 어영청 관할의 양화진이 설치되면서 어영청 장수와 군사 100명이 주둔했다.
    병인양요 때 사용된 조선군 화포

     

    * 프랑스의 침입이 있은 후 그간 천주교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던 용산 새남터 백사장과 서소문 밖 언덕(☞ '천주교도 정난주 마리아의 삶과 프랑스의 침략')은 더 이상 형장으로 쓰이지 않았다. 프랑스의 침입에 격노한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혔던 땅은 서학인의 피로 씻어야 한다"는 비이성적인 지시를 내리고 서강 변의 봉우리인 잠두봉(蠶頭峯)에 형장을 마련해 천주교인들의 처형 장소로 쓰게 했다. 이후 수천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목이 잘렸던 바, 잠두봉 대신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2차 침입'으로 이어짐.

     

    겸제 정선이 그린 그림 속의 봉우리는
    이후 절두산이 되었고 이곳에서 잘린 천주교인의 목과 시신은 절벽 아래 한강으로 던져졌다. 절두산순교기념관은 1966년 천주교회에서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성당 겸용의 건축물로 건축가 이희태의 작품이다. 2000년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2000년 세워진 '무명 순교자 탑'
    2000년 조각가 이춘만이 제작한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 형구인' 칼'과 16명의 순교자를 형상화한 주탑, 잘려진 머리와 순교자를 형상화한 우측탑,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수많은 무명 순교자를 형상화한 좌측의 '무명 순교자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두산의 척화비 / 국내의 척화비 가운데 이수(螭首) 장식이 있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흥선대원군이 절두산의 것에 격을 높여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진무중군 이용희 영세불망비 / 강화부성 탈환전투를 총지휘한 진무중군 이용희의 기념비가 이용의(李容儀)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위에서 서강나루에 출현했던 바로 그 장수로, 정족산성 내에 위치한 전등사 경내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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