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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마지막 충신 충정공 민영환과 러일전쟁 뒷얘기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1. 2. 01:17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 1905)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과 함께 시호가 가장 친숙한 사람일지 모른다. 대한제국 신하로서의 충정이 그 정도로 깊다는 얘기다. 그들의 죽음은 삶만큼 강렬했으니 전쟁 후 상황이 어찌 흐를지 경험으로 체득했던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의 뱃전에서 스스로 몸을 노출해 왜적의 탄환을 맞았다.

     

    이순신이 걱정한 예는 충의공(忠毅公) 정문부에게 나타났다. 함경도에 진군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과 여섯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한 정문부였으나 전후 그는 역모죄의 누명을 쓰고 참살당했다.(☞ '불패(不敗)의 가등청정을 박살 낸 정문부 장군')

     

    충정공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일본과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칼로 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그와 같은 죽음은 많지 않다.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의 유교사상은 죽음에까지 적용되었으니 할복과 같은 결기를 보여주는 죽음은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민영환은 차고 있던 긴 칼을 빼 유혈낭자한 죽음을 길을 택했다. 망국의 신하로서 처절한 죄값음을 하겠다는,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굴복이 아니라 강한 저항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또한 이후 상황이 어찌 흐를지 알았기에 비굴한 삶 대신 선비로서의 대쪽 같은 죽음을 택한 것이기도 했는데, 그가 자결한 방의 문틀 아래서는 정말로 대나무가 자라났다. 

     

     

    종각 면세점 건물 앞의 민영환 자결터 모뉴먼트
    그가 죽을 때 착용한 정복(正服)과 모자, 자결에 쓰인 칼과 문짝 아래서 피어난 대나무를 조영했다.
    민영환의 사진과 자결지에서 솟아 자라난 대나무. 사람들이 '혈죽(血竹)'이라 부른 이 대나무는 일본경찰에 의해 뽑혀졌는데 죽은 나무를 유족이 보관하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도화서 화원인 석연 양기훈이 당시에 그린 혈죽도. 고려대 박물관 소장

     

    민영환은 1861년 민씨 척족(戚族)의 중심인물이자 탐관오리였던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났다.(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된다) 친부인 민겸호는 1882년 6월 임오군란을 일으킨 훈련도감의 군인들에게  창덕궁 중희당 계단 아래서 주살되었다.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되면서 구식 군대인 훈련도감 군사들은 찬밥이 되었는데 그나마 찬밥조차 주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군인들이 궁궐로 쳐들어오니, 주적(主敵) 1호로 지목된 선혜청 당상(조달청장) 민겸호의 목이 가장 먼저 달아난 것이었다.

     

    1878년(고종 15) 정시 문과에 합격한 이후 관료로 있던 민영환 역시 구식 군대의 타깃이었으나 요행히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사직서를 내었다. 하지만 인재 부족이라는 시대적 요청과 명성황후의 척족이라는 배경 등으로써 다시 기용되어 난세의 관료로 복직한 민영환은 1886년 이조참의로 시작으로 고속승진하여 이조참판(행정안전부 차관), 형조판서(법무부 장관), 한성부윤(서울시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됐다.

     

     

    인천 각국조계지 내에 위치한 조미수호통상체결지 표석. 조선은 제물포조약 이후 서구제국과는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했다.(1882년)
    워싱턴 D.C.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수교조약 이후 조선정부는 1889년 2월 주미공관을 개설했다.

     

    이때는 미국과 일본은 일말의 제국주의적 거래도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그가 미국공사로 부임했다면 필시 큰 역할을 했을 것이요, 그리하여 향후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세력 약화 내지는 축출을 기대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한반도의 시운(時運)은 불운하게 흘렀으니 그해 10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면서 부임을 못한 채 사직하고 말았다. 이후 친러파가 축출되고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민영환은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민영환은 친러파였다. 당시 미국은 수교는 했으되 조선에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던 바, 조선에서의 일제 축출을 바랐던 민영환은 자연 러시아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새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자 '아라사 황제폐하 즉위 축하사절단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돼 영어통역인 학부협판 윤치호와 함께 1896년 5월 거행되는 대관식에 참가하기 위해 장도에 올랐다.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한 특사단은 상하이, 요코하마를 경유해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육로로 뉴욕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런던, 베를린, 바르샤바 등을 경유해 5월 20일 모스크바에 당도했다. 민영환은 5월 23일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대관식에 참석한 뒤 3개월 동안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러시아 관리들과 군사교관 파견, 차관(借款), 고문관 파견 등에 관해 논의했다.

     

     

    가운데 갓 쓴 사람이 정사(正使)인 민영환. 왼쪽이 수석수행원이자 영어 통역인 윤치호, 그 옆이 중국어 통역인 김득련, 위쪽이 러시아어 통역 김도일, 오른쪽 위가 개인비서 손희영이다.
    민영환이 니콜라이 2세를 처음 알현한 크렘린 궁. 왼쪽은 성 바실리 성당이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 서구문물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됐고 조선이 중국과 일본의 압박과 간섭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개화와 함께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이라 일컫는 나라들을 모두 방문했는데 그중 개화의 파트너로 가장 선호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우선은 어찌 됐든 조선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였고, 또 국경이 맞닿은 나라로서는 중국 외에 유일한 나라이기도했다. 

     

    특히 민영환은 1850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주목했다. 자신은 모스크바에 가기 위해 지구의 2/3를 돌았으나 현재 시베리아 구간까지 개통된 철도가 전면 개통되면 모스크바까지 단 며칠이면 갈 수 있었다. 그는 1897년 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합 특명 전권대사 로 발령받아 1897년 3월 1일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다. 그는 이때 더욱 개화의 필여성을 절감하게 되니 귀국 후 탁지부대신(기획재정부 장관)에 올라 개화를 서둘렀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유럽 열강의 제도를 모델로 한 정치·군사 개혁안을 개진했는데, 정치 개혁에 있어서의 주된 요지는 입헌군주제였다. 하지만 고종이 전제군주제를 폐지할 리 만무하였던 바, 정치 개혁은 없던 일이 되고 군사 개혁만이 수용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와 광무개혁 후 새로이 만든 군제인 원수부(元帥府)의 수장(首長)으로 육군을 총괄했고, 민영환은 국무대신(국방부장관)으로 표훈원 총재(국가보훈처장)와 헌병 사령관을 겸임했다. 계급은 육군 부장(지금의 중장급)이었다.

     

     

    대한제국 표훈원의 인장

     

    반면 일본은 이또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영국식 양원제(兩院制) 입헌군주제 개혁에 일찌감치 성공하였고 유럽의 신흥강국 프로이센을 모델로 한 군사개혁을 착수해 그야말로 '동양의 프로이센'(서구에서 당시의 일본을 부르던 말)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렇게 길러진 군사로서 1895년 아시아의 최강국 청나라를 쳐부수었다. 그리고 1904년 드디어 러시아와 판돈으로 만주·조선이 걸린 큰 도박을 벌였다.

     

    사실 일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도박이었으니,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1904년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이 예정된 해이기도 했다. 이에 조금 있으면 블라디보스토크로 러시아 군대와 보급품이 밀려들게 될 터, 이기든 지든 완공 전에 싸움을 벌여야 했다. 돈이 없었던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게 도박자금을 빌렸는데, 처음 예상했던 돈의 서너 배가 들어갔지만 중간에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계속 돈을 빌려 배팅했다.

     

    * 전비를 마련하러 영국에 간 일본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은 6.5%의 고금리로 간신히 돈을 변통했다. 당시 일본이 발행한 공채 증권은 영국 금융시장에서 가장 인기 없는 펀드였으나 공격적 투자자였던 유대인 은행가 제이콥 쉬프 덕에 겨우 매수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세계는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인데, 전황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금리가 조금씩 낮아졌다.   

     

     

    일본 승리의 숨은 공로자 제이콥 쉬프

     

    그 위험한 도박에서 뜻밖에도 일본이 위너가 되었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틱함대가 일본해군에 박살 나자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종전(終戰) 회담 알선을 요청했다. 무엇보다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일본은 러시아와의 1년 여의 전쟁 기간 동안 예상했던 돈의 4배나 되는 15억8,400만엔의 전비를 지출했다. 당시 일본의 1년 예산은 2억 3천만엔이었다) 이에 꿔준 돈을 빨리 회수하고 싶었던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알선으로 뉴햄프셔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 러일 양국의 대표가 마주 앉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이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일본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일본은 당연히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배상금을 왕창 뜯어내려 했고, 영국과 미국도 그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러시아 대표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버티며, 억울하면 다시 붙자고 을러댔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을 목전에 둔 패자의 패자답지 않은 여유였다. 일본은 뚜껑이 열려 스팀까지 솟을 지경이었지만 다시 싸울 입장은 못되었던 바, 러시아로부터 단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받아내지 못한 채 종전 서약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일본 정부는 전쟁비용을 조선에서 벌충하자 생각했을 것이나, 일본 내에서는 비굴한 종전 회담에 항의하는 집회와 폭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치안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러시아측 대표 세르게이 비테

    * 러시아측 대표로 나온 러시아 제국 각료평의회 의장 세르게이 비테는 "우리는 국내 사정 때문에 전쟁을 끝내는 것이지 결코 패전한 것이 아니다.(전쟁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으므로) 따라서 일본한테는 단 한 푼의 배상금도 줄 수 없으니 억울하면 다시 붙자!"며 큰소리를 쳤고, 일본 대표인 전권 외상 고무라 주타는 결국 꼬리를 내리고 사인을 했다. 어찌 보자면 일본은 이기고도 진 셈인데, (실제로 무승부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다만 아래의 권리만은 확실히 했다. 

     

    종전조약 제2조: 러시아제국은 일본제국이 한국에 대한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러시아 제국 신민은 다른 외국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러시아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동의한다.

    The Imperial Russian Government, acknowledging that Japan possesses in Korea paramount political, military and economical interests engages neither to obstruct nor interfere with measures for guidance, protection and control which the Imperial Government of Japan may find necessary to take in Korea. It is understood that Russian subjects in Korea shall be treated in exactly the same manner as the subjects and citizens of other foreign Powers; that is to say, they shall be placed on the same footing as the subjects and citizens of the most favored nation. It is also agreed that, in order to avoid causes of misunderstanding, the two high contracting parties will abstain on the Russian-Korean frontier from taking any military measure which may menace the security of Russian or Korean territory.

     

    히비야 방화 폭동 사건

    * 일본은 러일전쟁 중 여순 203고지 전투에서 6만5천 명(2만 사망, 4만5천 부상)의 사상자를 내는 등 상당한 댓가를 치렀던지라 배상금을 단단히 받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이에 도쿄대학 교수회의에서는 30억 엔의 배상금 및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를 할양받아야 한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던지라 1905년 9월 5일, 회담 결과에 항의하는 집회가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열렸고 흥분한 민중들이 폭도로 돌변해 내무대신 관저, 신문사, 경찰지서 등에 불을 질렀다. 나아가 러시아정교회 성당은 물론, 회담을 중재한 미국에 항의해 미국인교회, 미국대사관 등에도 테러가 번지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러일전쟁 발발 후 민영환은 내부대신과 학부대신으로써 이완용 등의 친일 각료들과 싸웠으나 친일파의 세력에 밀려 시종무관장(경호실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그즈음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감을 인지한 민영환은 마지막으로 미국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다. 그리하여 국사범으로 5년 7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이승만에게 고종의 밀지를 안겨 1904년 11월 미국으로 보냈다. 이승만은 워싱톤의 각국 대사관을 돌며 조선에의 지원을 호소했으나 이미 일본 편이 된 미국 땅에서 메아리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 총리 가쓰라와 밀약을 나눈 미국 육군성 장관 윌리엄 테프트

     

    *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미국 육군성 장관 윌리엄 테프트는 1905년 7월 27일 도쿄에서 일본 수상 카쓰라 다로와 필리핀과 한국에 대한 상호 배타적 권리를 묵인하자는 내용의 회담을 갖는다. 흔히 '가쓰라-테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이라 불리는 이 회담은 정식 조약이 아닌 밀담의 성격이었으므로 1924년 당시의 양해 의견을 담은 외교문서(memorandum)가 나올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회담을 양국간의 정식조약이라 부르기는 어려우나 (미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인정한 회담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게다가 윌리엄 테프트는 이후 루스벨트에 이어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된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 푼의 돈도 뜯어내지 못했지만 러시아는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로부터도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만큼은 확실히 인정받았던 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행하여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조선은 사실상 이때 멸망했다) 민영환은 의정대신(국무총리) 조병세와 함께 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조약 체결에 앞장선 다섯 명 매국노의 처단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다. 유명무실한 황제가 이것을 가납할 힘이 있을 턱이 없을 터, 난처해진 고종은 오히려 그를 평리원(고등 재판소) 감옥에 구금시켰다.

     

    이후 구금에서 풀려난 민영환은 더 이상 비분강개하지 않고 침잠하였다. 그리고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아침, 노모가 계신 집(지금의 조계사 경내)을 나와 그곳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청지기 이완식의 집(공평동 SM 면세점 건물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때는 11월 30일 오전 6시경으로 그때 나이 44살이었다. 그의 옷에서는 이천만동포와 각국 사절, 고종에게 보내는 유서가 나왔는데, 그중 동포에게 남긴 유서는 아래와 같았다.(그 뒤를 전 국무총리 조병세와 주영서리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 김봉학, 홍만식, 이상철 등이 따라 순절하였다) 

     

     

    자신의 명함 앞 뒤로 빽빽히 적은 유서

     

    嗚呼라.

    國恥民辱이 乃至於此하니

    我人民은 將且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리라.

    夫要生者는 必死하고 期死者는 得生이니,

    諸公은 豈不諒只아.

    泳煥은 徒以一死로 仰報皇恩하고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하노라.

     

    泳煥은 死而不死하고 期助諸君於九泉之下하리니,

    幸我同胞兄弟는 益加奮勵하고

    堅乃志氣하여 勉其學問하며,

    決心戮力하여 復我自主獨立이면

    則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리라.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하는 가운데에 모두 멸망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기를 더하고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민영환 장례식 사진 / 황현은 《매천야록》에 「위로는 진신(높은 벼슬아치)으로부터 밑으로는 방곡의 조예(관아의 하인), 부유(부녀자와 어린이), 걸인, 각 사찰의 승도들도 거리가 빽빽하게 모여 곡을 하면서 전송하였고, 그 곡성은 산야를 뒤덮었다」고 장례식 모습을 적었다.
    종로 조계사 앞 민영환 집터 표석. 길가에 있으나 표석에 써 있는 대로 집은 지금의 조계사 경내에 위치했었다.
    집터 근방에 세워진 민충정공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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