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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패(不敗)의 가등청정을 박살 낸 정문부 장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4. 19. 02:04

     

    가등청정(加藤 清正, 가토 기요마사)은 일본 전국시대의 장수로 그의 영지(領地)였던 구마모토성(熊本城)은 한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장소이다. 그 위치가 규슈 구마모토인 만큼 지리적으로 가까운 까닭일 게다. 실제적으로 김해공항에서 규슈 후쿠오카까지는 빠르면 35분에도 도착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최단거리 국제항로이며, (그야말로 뜨자마자 내리는 수준이니, 안전벨트 매고 어쩌고 하다 보면 도착이다. 부산에서 대구 가는 것보다 가깝다)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 역시 지척인 바, 여러모로 한국인이 가장 만만한 해외여행지가 됐다. 

     

    그런데 구마모토성은 일본인 역시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입시철에는 더욱 붐비니, 인접한 태재부 천만궁(太宰府 天滿宮, 다자이후 텐만구)에 모셔진 '학문의 신' 스기와라 미치자네(官源道眞, 845~903, 왕인박사의 직계제자로 시인이자 철학자로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다)와 함께 '불패의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의 대구 팔공산 갓바위 기도처와 비슷하다 보면 될 것 같다. 

     

     

    팔공산 부처님이 ₩이 되는 까닭에 한 평 갓바위는 이제 광장이 됐다. 이 어처구니 없는 현상을 조만간 다룰까 한다.  
    일본 3대성으로 불리는 구마모토성과 가토의 동상

     

    그곳의 영주였던 가등청정은 실은 우리에게는 매우 불편한 존재다.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장수이기 때문이니,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조선 침략에 그 두 장수를 앞장 세웠는데 마지못해 따라나선 소서행장보다 불패(不敗)의 장수 가등청정을 신뢰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등청정은 전투에서 거의 진 적이 없으니, 전후(戰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에는 덕천가강(徳川家康)의 편에 서 승자가 되었고, 그래서 구마모토에 영지를 하사 받는다.

     

    그런데  정말로 불패의 장수일까? 이에 대한 논란이 일본에서도 있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 내막까지는 모르지만 그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쓰라린 패전을 경험했다. 특히 정유재란 때는 울산 서생포(西生浦) 왜성에 고립되어 자살을 결심한 적도 있으며 오줌과 말(馬)의 피로 물을 대신하며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까닭에 그는 식수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달았던 바, 구마모토성을 건설할 때 우물을 120곳이나 팠으며 그중 11곳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가등청정이 건설한 울산 서생포 왜성의 흔적

     

    가등청정은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에 앞서 가장 먼저 한양에 입성하였고, 궁궐을 불태웠다.(☞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 이후 함경도 쪽으로 진출한 가등은 그쪽으로 피신한 선조의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사로잡고 함경도를 손에 넣었으며 내친김에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잖아 그가 이끌던 2만 명 왜군은 처음으로 패전의 쓴맛을 보게 된다. 글을 쓰던 선비 정문부(鄭文孚)가 이끄는 지역 의병들에 의해서였는데, 그것이 무려 6전 6패였다. 반대로 정문부와 의병들은 6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니 그 싸움을 통틀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 부른다. 

     

     

    의정부시 용현동 정문부 장군 묘소의 북관대첩비 복제비. 정문부 장군이 이끄는 의병이 가등청정의 왜군에게 승리한 기록을 새긴 전승비로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의 비석에 1500자를 새겼다. 
    북관대첩비는 1707년(숙종 34)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현 김책시 임명동)에 세웠으나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가 일본으로 가져 간 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다가 2005년 우리 정부의 요구로 반환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북한에 인도돼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는데 이 안내문에는 북관대첩비의 그 길고 긴 유랑의 과정이 적혀 있다.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는 재빨리 평안도 의주로 내뺐다. 압록강이 코 앞이었으니 여차하면 요동 땅으로 튈 심산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왕자들에게 떠맡겼다. 광해군이 분조(分朝)를 맡아 평안도와 강원도, 영·호남을 돌며 인심도 위무하고 군사도 모았다. 광해군의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같은 임무를 띠고 함경도로 갔다. 그런데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회령부의 아전 국경인이란 자가 난을 일으켜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그들을 호종했던 신하 김귀영, 황정욱, 황혁(황정욱의 아들)을 붙잡아 함경도로 진군한 가등청정에게 넘기고 항복했던 것이다.

    국경인은 원래 전주 사람으로 회령으로 귀양을 갔다가 아전이 된 자이니 조정에 불만이 많았을 터이다. 그 이유야 어떻든 몹쓸 놈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일개 아전인 국경인 혼자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에 동조한 자가 500명이 넘었다. 그렇다면 그들도 몹쓸 놈일까? 잘잘못을 따지지면 그 전에 왕자들과 그 밑의 벼슬아치들이 먼저이리니, 그 왕자들은 살인이 취미인 자들로서(실제로 그들에게 타살된 백성들이 수십명이다) 형인 임해군도 죽인 자가 적지 않으나 오히려 어린 순화군이 한 수 위였다.

     

    황혁은 순화군의 장인으로(임금 선조와는 사돈지간) <선조실록>은 함경도에서의 행적을 이렇게 적었다. "황혁은 강원도에서 함경도로 들어갈 때 임금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또 부탁하신 무거운 임무를 잊어버리고 하는 짓거리가 모두 도리에 어긋나고 사나웠다. 고을에서 접대하고 바치는 것이 조금이라도 제 뜻에 차지 않으면 채찍질, 매질을 한도 없이 해댔다. 지나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나 마치 난리를 겪은 것 같았다. 원망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회령의 변고가 일어난 것이다."

     

     

    살인면허를 지닌 조선의 살인마들

     

    국경인과 그의 작은 아버지 국세필은 이에 항거해 일어난 것이고, 아무튼 그 덕에 가등청정으로부터 함경도 책임자라는 감투를 얻었다. 정문부가 존재를 드러낸 것은 이 즈음으로, 1588년(선조 21) 과거에 급제한 후 북평사로 와 있던 그는 경성(鏡城) 유생 이붕수·지달원 등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북관대첩비에는 그가 국세필 등의 반역자를 처단한 것을 첫 번째 업적으로 기록하였으니, 정문부는 때마침 침입한 여진족의 방어를 구실로 경성 성으로 들어 가 남쪽 성루로 국세필을 유인한 다음 참수하고, 이어 명천을 장악하고 있던 반란군 정말수를 공격해 목을 벴다. 

     

    이후 정문부는 각지에서 모인 의병들과 함께 게릴라 전술로 왜병을 격파하니, 1592년에 장평(長平), 비산(萆山), 단천(端川), 백탑(白塔), 쌍포진(雙浦津)에서 승리하였고 이듬해 정월에 다시 단천에서 싸워 이겼다. 정문부는 도망가는 왜군들을 추격해 백탑 남쪽에서 마지막 혈전을 벌였고 이때 의병장 이붕수, 허대성, 이희당 등이 전사했다. 하지만 그 최후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던 바, 가등청정은 이후 함경도 땅에 다시 발을 디디지 못했다. 왜란에 있어서는 당시도 이후로도 찾아보기 힘든 쾌거였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누각에 정문부가 앉아 국세필과 왜인들을 참수하고 있고 성 밑에서는 말을 탄 의병들이 왜구를 격퇴 중이다.(41.2 X 31㎝. 종이에 채색화) 

     

    정문부의 승리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풍부한 전투 경험을 쌓은 가등청정의 군대를 상대로 이긴 것이라서 더욱 의의가 크다. 게다가 가등청정은 불패의 장수라고 불리는 자였다. 정문부는 그런 가등청정의 직할군을 상대로, 지형과 상황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과, 700명의 기마대를 활용한 선제공격 등의 작전으로써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니 22,000명을 이끌고 함경도에 무혈입성한 가등청정은 불과 4개월여 만에 8,800명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밀려오는 추위와 배고픔 속에 허겁지겁 물러나야 했다.  

     

    게다가 당시 정문부는 여진족과의 전투도 병행했다. 앞서 가등청정이 두만강을 건너 여진 부락을 들쑤셔놓은 탓에 여진족들이 복수를 하겠다며 침입해왔던 것이니 정문부는 반란군과 왜적과 여진족이라는 3중고를 모두 해결해야 했다. 그리하여 왜군과 여진족이 물러간 이후로는 종래의 동북 6진을 개축하고 의병들을 주둔시켜 여진족 방어에까지 나섰다. 정문부의 이와 같은 업적은 니탕개의 난을 진압한 신립, 녹둔도의 야인을 정벌한 두 충무공(이순신과 정충신. ☞ '광주 금남로와 정충신 장군')에 견줄만한 일이었다.   

     

    북관대첩 상황도와 육진(●)

     

    이상을 보자면 북관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에 견주거나 혹은 그 이상의 평가를 내려도 무방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공을 보고해주는 사람이 없어 정문부는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고, 훗날 다행히도 영흥부사와 길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1599년 호조참의, 1600년 용양위 부호군을 시작으로 예조참판, 장단부사, 안주목사 등을 역임했으나 1624년 이괄의 난에 연관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압송되었다가 고문 중 옥사하였다. 사후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던 바, 1665년(현종 6년) 아래의 신도비가 세워졌다.

     

     

    의정부시 용현동 정문부 장군 신도비. 1861년(철종 12년) 기록이 추가되며 다시 세워졌다.  
    신도비와 북관대첩비. 2007년 6월 25일 정문부 장군 묘소에 북관대첩비의 복제비가 세워졌다. 
    정문부 장군 묘 오르는 길
    정문부 장군의 묘. 부인 고령 신씨와 합장됐다.  
    사당인 충덕사(忠德祠)  
     사당과 재실  
    충의공 정문부 장군(1565-1624) 표준 영정
    시베리아에서 120마리 서식이 확인된 한국 범(아무르 표범). 일본 열도에는 범과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는 까닭에 풍신수길은 그것을 잡아오라 명했고 가등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다.(그래서 구마모토 성 박물관의 가등의 초상은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아 있다/범은 점박이 무늬, 호랑이는 줄무늬의 고양이과 동물이다) 해방 후 일본 수상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 "아직 한국에 호랑이가 있느냐"는 물음에 "가등청정이 다 잡아 가 없다"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실제로 가등청정이 잡아 보낸 호랑이를 풍신수길이 약으로 썼다는 메이지 시대의 문서가 전한다)
    평성 28년(2016년) 지진으로 파괴된 구마모토성
    복구 중인 구마모토성
    위 천수각 내에 있는 가등청정의 초상

     

    ■ 咸鏡道 壬辰義兵 大捷碑文 (북관대첩비문)

     

    在者壬辰之亂其力戰破敵雄嗚一世 水戰則有 李忠武之 閑山島焉 陸戰則有 權元師之 幸州焉 有 李月川之 延安焉 史氏記之 遊談者稱之 不倦 踓然此猶有位地 資於乘賦什伍之出也 若起卑微 奮逃竄徒 以忠義相感激 卒能用鳥合取全勝 克復一方者 關北之兵爲最 始萬歷中倭酋 秀吉 怙强驁逆 規犯 中國 怒我不與假道 遂大入寇 長驅之都 宣廟旣西幸而列都瓦解 賊已陷 京畿 其驍將二人 分兵首兩路 行長行朝西 淸正主北攻其秋 淸正入北道兵銳甚 鐵嶺以北無城守焉 於是 鞠敬仁等叛應賊 敬仁者 會寧府吏也 素惡不率 及賊到富寧 隙危煽亂 執王子及宰臣奔播者 竝縛諸長吏與賊效款 鏡城吏 鞠世必其叔父也 及 明川民 末守 木男 連謀相黨 幷受賊所署官 各據州城聲張勢立 殺脅惟所指 數州崩駭 人莫自保 鏡城 李鵬壽學氣士也 奮曰縱國家創攘至此兇徒敢爾耶 乃潛與 崔配天 지達源 姜文祐 等謀起義兵 諸人地相夷 莫適爲將 評事 鄭文孚 有文武才 無兵可戰 脫身匿山谷間 聞義兵起 欣然從之 遂推鄭公爲主將 鐘城府吏 鄭見龍 慶源府吏 吳應台 爲次將 歃血誓義 募兵得百餘人 時北虜又侵北邊 諸公使人誘 世必 幷力禦北虜 世必許之 內義兵州城 明朝 鄭公建旗鼓上南城樓 誘 世必上알 時其入目文佑禽之 斬以徇 赦其脅從 郎引兵南趣 明川 又捕 末守等斬之 會寧人亦討 敬仁誅之 以應義兵 軍勢稍壯 來附者益衆 吉州人 許珍 金國信 許大成 亦聚兵爲聲援 當是時 淸正令褊將領精兵數千據 吉州 身率大軍屯南關以頀之 十一月遇于加披將戰鄭公副署諸將見龍爲中衛將 屯白塔 應台及 元忠恕爲伏兵將 分屯 石城 ○會韓人濟爲左右衛將 屯木棚 柳敬天爲右衛將○○河 金國信 許珍爲左右斥候將 ○○○○○分屯 臨溟方峙 賊狃勝不甚備 諸軍幷起揜擊乘銳蹙之 土無不疾呼先豋者 賊敗走 縱兵追之殺其將五人 斬獲無數 盡奪其馬畜兵械 ○○○遠近響震 ○○應之 衆至七千餘人 賊遂入 吉州城 窘不敢動 列伏于旁陿邀其出輒剿之 已而城津賊大拔于 臨溟 率輕騎○○○倦其還 決擊大破之 又斬數百餘人 遂剖其腹腹暴之大路 於是兵聲大桭 賊益畏之 十二月又戰于 雙浦 戰方合令褊將 引數騎橫衝迅如風雨 賊失勢不及交鋒 皆散走 乘勝又破之 明年正月 又戰干 端川 三戰三勝 還屯 吉州休士 旣而 淸正知軍不利 遣大兵迎還 吉州賊 我軍尾擊至白塔大戰又敗之 是役也 李鵬壽 許大成 李希唐 戰死 然賊遂退不敢復北 當是時○○明將 李如松 亦破 行長於 平壤 鄭公乃使 崔配天間行奏捷于行在 上引見流涕贈鵬壽司憲府監察 賜 配天秩朝散 觀察使怒 文孚不稟節度而疾義兵功聲出已 聞奏率以誣揜 以故○○○○○ 顯宗時 觀察使 閔鼎重 北評事 李端夏 聽於父老以實聞 於是贈 文孚贊成 鵬壽持平 餘人贈官有差 又建祠 鏡城 ○○賜額曰彰烈 今上庚辰昌大爲北評事 旣與義施之子孫 訪聞前故 得事蹟爲詳 然慨想諸公風 又常餘所謂○○觀其營辟戰陣之所 徘徊持顧不能去 語于長者曰 島夷之禍烈矣 三島復而八路壞 諸公出萬死一生 提孤軍摧勁구 使我國家興主舊地 卒免於在衽而邊塞之人 興於聽聞 效於忠義者 又誰之力也 幸州 延安俱有碑碣 載事華烈 東西膽式 以 關北之功之盛 而獨闕焉庸非諸君之恥歟 咸應曰然 惟鄙人志矧公之命 遂伐石鳩財以人來請文 辭非其人 又來曰斯役也公實首議 不得命 將綴 余乃敍其事繼之銘曰
    有盜自南 我王于藩 屹屹北原 有蠢者氓
    譽我大邦 以國受鋒 狼籍穴墉 不抗以從 
    血口胥呑 士也걸걸 兵義莫利 旣纖叛徒
    湯毒以凶 峻群攸同 不屑戈了 구莫我衝
    武夫聲呼 師征孔赫 協底帝罰 北土旣平
    山摧海涵 厥酋崩惱 非私我忠 爾蠶我農
    大君曰咨 贈官命祠 士風其烈 臨溟之厓
    孰尙女功 光惠始終 民可卽戒 有石○○
    刻之誦詞
    用眠無窮


     

    ■ 북관대첩비 번역문

     

    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 원수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 월천(李月川)의 연안(延安) 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여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쪽을 수복함과 같은 이는 관북의 군사가 제일인 것이다.
    처음 만력 중에 왜의 추장 풍신수길이 강한 군사들을 믿고 거만하게 중국을 침범하고자 엿보다가 우리가 길을 빌려 주지 않음을 성내어, 드디어 크게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거동하였고, 모든 고을이 무너졌으며, 적은 이미 경기도를 함락시키고 그 무서운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행장(行長)은 행조(行朝)를 뒤밟아 서쪽으로 가고 청정(淸正)은 북방 침공하는 것을 맡았었다. 그 해 가을에 청정이 북도로 들어갔는데 적의 정예한 군대가 매우 거세었기 때문에 철령(鐵嶺) 이북은 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에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역하여 적에게 내응하였다.

     

    경인은 회령부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적이 부령(富寧)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와 대신을 잡고 그리고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주고 정성을 보였으며, 경성(鏡城) 아전 국세필(鞠世弼)은 그의 숙부요, 명천(明川) 사람 말수(末秀), 목남(木男)과 서로 무리를 지어 모두 어울려 적이 주는 관작을 받아 각각 고을을 점거하고 성세를 벌여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인민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했었다.

     

    경성(鏡城) 이붕수(李鵬壽)는 의기 있는 선비라, 분개하며 말하되 "비록 국가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나, 흉도가 감히 저렇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佑)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꾀했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평사 정문부(鄭文孚)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빼어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좇았던 바, 마침내 정공을 추대하여 주장을 삼고 종성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을 차장으로 삼아 피로써 맹서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백여명을 얻었다.

     

    그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 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세필이 허락하고 의병들을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정공이 기(旗)와 북을 세우고, 남문으로 올라오도록 꾀어 그가 현신할 때에 문우(文佑)가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놓아주었다. 그리고 곧 군사를 이끌고 명천(明川)으로 가서 말수(末秀) 등을 잡아 목베고 회령 사람이 또한 경인을 쳐서 목베어 의병에게 호응하니 군세가 점점 커지고 따라와 붙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길주 사람 허진(許珍) 김국신(金國信) 허대성(許大成)이 또한 군사를 모아 성원하였다.

     

    이때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에 웅거케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南關)에 진을 쳐 호응하고 있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加坡里)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은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되 현룡은 중위장(中衛將)을 삼아 백탑(白塔)에 진을 치고, 오응태 원충서는 복병장을 삼아 석성(石城)과 모회(毛會)로 나누어 진을 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삼아 목책(木柵)에 진을 치고,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右衛將)을 삼아 날하(捏河)에 진을 치고, 김국신 허진은 좌우 척후장을 삼아 임명과 방치(方峙)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는데, 적들은 여러 번 이긴 끝이라 방비를 허술하게 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여 기운을 얻어 밀고 나갔는데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으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그 군사를 추격하여 장수 5명을 죽이고 목을 수 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래서 원근이 진동하여 장수 관리들로 도망치고 숨어 엎드렸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호응하니, 무리들이 7천 명에 이르렀으며, 적은 마침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발동하지 못했는데 길 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만 하면 무찔러 버렸다.

     

    이윽고 성진의 적이 임명(臨溟)을 크게 침략하므로 정예한 기병들을 이끌고 습격했으며, 산에 기대어 복병했다가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협공하여 크게 깨뜨리고, 또 수백 명을 목베니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행길가에 늘어 놓자 군사의 형세가 크게 떨치고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2월에 또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어울리자 편장(偏將)이 철기(鐵騎)를 끌고 가로 찌르기를 풍우같이 빨리 하니 적이 세력을 잃어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이긴 기세를 타고 또 깨뜨렸다.

     

    이듬해 정월에 단천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자, 청정이 불리함을 알고 큰 군대를 보내어 길주의 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뒤를 쳐서 백탑에 이르러 크게 싸워 또 깨드렸으며, 이 전쟁에서 이붕수(李鵬壽) 허대성(許大成) 이희당(李希唐)은 전사했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또한 소서행장을 평양에서 깨뜨렸는데, 정공이 최 배천을 시켜 샛길로 행재(行在)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붕수에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贈職)하고, 배천에게는 조산대부(朝散大夫)의 계급을 내렸다. 그 때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았음을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오랜 뒤 현종 때에 관찰사 민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단하(李端夏)가 부로(父老)들에게 듣고 사실을 아뢰어 비로소 문부에게는 찬성(贊成), 붕수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관작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세워 당시 같이 일한 여러 사람들을 제사케 하고 창렬(彰烈)이라 사액했다. 지금 임금 경진년(庚辰年)에 창대(昌大)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자세히 얻어 개연히 제공의 기풍을 상상도 하고 또 이른바 임명(臨溟) 쌍포(雙浦)를 찾아 진치고 싸우던 자리를 거닐고 돌아보며 탄식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로에게 말하되 "섬 오랑캐의 전화가 몹시 심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분들은 죽음을 걸고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서 억센 도적을 무찔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발상한 옛 땅으로 하여금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을 면하게 했으며,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 연안에는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을 나타내었으므로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보고 몸을 굽히거니와 관북의 거룩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 하나가 없으니 어찌 제군의 수치가 아니겠는가?"하니 모두 대답하되 "그렇소. 그것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이겠소"하며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 사람을 시켜 글을 청하였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하되 "이 일은 공이 실로 발의한 사람이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을 철폐하겠소" 하므로, 나는 마침내 이 사적을 서술하고 새긴다.


    남쪽에서 도적이 와 명나라를 치려드니
    우리는 이웃이 되어 온 나라가 화 입었네.


    높고 높다 북방이여 오랑캐 소굴 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저항 없이 따르도다.


    피 머금은 입으로 흉한 독을 뿜을 적에
    씩씩하다 우리 군사 뭇호걸 헌헌하다.


    군사란 정의가 제일, 창과 활이 부질없어
    반역자 무찌르니 저 도적 못 덤비네.


    병정들 북을 치니 산이 무너지듯 바다가 끓듯
    우리 군사 빛난 전술 흉한 적을 무너지네.


    하늘이 천벌을 내림은 우리의 충정 때문이니
    북쪽 땅 평정되어 누에치고 농사짓네.


    임금은 감탄하며 누가 그대의 공보다 더하겠느냐?
    벼슬 주고 사액하고 한결같은 은혜 칭송하도다.


    선비 기풍 열렬하니 백성들도 용감하고
    임명 바닷가에 우뚝한 돌이 있어
    찬송을 거기 새겨 영원토록 보이노라.


    숭정 갑신 뒤 65년(1709년 ) 10월 (최창대)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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