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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안시성 전투'라고 불린 이정암의 연성대첩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4. 21. 06:44
강화도에 가면 강화역사박물관과 그 앞의 부근리 고인돌은 주마간산 식이나마 의무적으로 들르게 된다. 그 부근리 고인돌은 거대하기도 하거니와 모양도 예뻐 안내문에 쓰여 있는 대로 고인돌 왕국인 우리나라에서도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는데, 지척에는 그와 거의 같은 규모와(어쩌면 더 컸을 지도.....) 모양을 했을 고인돌이 한 기 더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늘 가슴이 아프다. 한쪽 다리만 남은 불구의 몸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것이 세우다 만 것일 수도 있다지만 그럴 리는 없을 테고 그 망신(亡身)의 원인은 필시 후세인의 노작(勞作)이리라.
그러면서 그것이 온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며 차를 타는데, 언젠가 동행했던 이가 불쑥 이렇게 물었다.
"연개소문 유적은 봤어?"
"예? 연개소문 유적이요? 여기 그런 게 있어요?"
"여기 있잖아?"
내가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본 고인돌 지척의 도로변 비석에는 아닌 게 아니라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라고 쓰여 있었고(한글로) 뒤에는 '연개소문은 강화군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馳馬)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닦았으며..... 지금도 이곳에는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터와 자취가 남이 있다'는 근거 없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상대방은 빙그레 웃었지만 나는 놀랐다는 사실이 멋쩍지도 않을 만큼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카메라도 들이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문득 아쉽다.
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경험을 강화도 꼭대기 평화전망대에서도 했다. 그곳에 서 있는 마찬가지의 요즘 비석에서였는데 거기에는 한문으로 '연성 대첩비(延城大捷碑)'라고 쓰여 있었다. 연성대첩이라....? 비도 최근에 세워진 것이고, 이름도 생소하여 뒤에 새겨진 비문을 읽어보니 이번에는 아닌 게 아니라 돌에 새겨 길이 남겨야 할 역사의 기록이었던 바, 임진왜란 당시 황해도 연성(延城)에서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이 이끄는 의병이 왜장 흑전장정(黒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의 부대와 싸워 크게 이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원래의 연성대첩비는 1608년(선조 41) 연성이 있던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용봉면(龍鳳面) 횡정리(橫井里)에 세워졌다. 그러나 그곳이 미수복 땅인 관계로 황해도 연백군에서 건너온 실향민들이(이곳 강화에서 임진강만 건너면 바로 연백군이다) 망향과 통일 기원의 마음을 담아 지난 1983년 강화도 양사면 인화리에 부지를 마련해 망배단과 함께 건립한 것을 인천광역시와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1997년 고향 땅이 보이는 이곳 철산리 평화전망대에 옮겨 세우게 된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지금 현지에 있는 연성대첩비는 마모가 심해 비문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하나 다행히도 중앙박물관 등에 비의 탁본이 남아 있어 그 전문을 파악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임진왜란 중 초토사(招討使) 이정암이 황해도 연안부(延安府)에서 승전한 사실과 이를 1605년 임금이 포상한 일, 그리고 1608년 연안사람들이 의논하여 비를 세웠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문장을 짓고 당대의 명필인 충민공 정사호(鄭賜湖)가 글씨를 썼으며, 청음 김상용(金尙容)이 제목을 썼다.(음기는 없이 앞면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연성대첩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육상 3대첩의 하나로 일컬어질 정도의 격전이었으니 앞서 말한 북관대첩비의 서문에도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불패의 가등청정을 박살 낸 정문부 장군')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 원수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월천(李月川, 이정암)의 연안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在者壬辰之亂其力戰破敵雄嗚一世 水戰則有 李忠武之 閑山島焉 陸戰則有 權元師之 幸州焉 有 李月川之 延安焉 史氏記之 遊談者稱之)
즉 이정암이 왜군을 맞아 황해도 연안성에서 승리한 연안대첩을 당대 사람들은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에 비견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전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어쩌면 이것도 분단의 비극이다. 휴전선 저쪽에서 일어난 일이라 소홀이 여긴 탓으로 어느덧 반쪽의 역사만 배우고 있음이다. 해방 후의 북쪽 역사가 지워지고 월북자, 납북자의 작품이 논외(論外)되는 현상이야 어쩔 수 없다 하여도 조선시대의 역사까지 남북이 있으면 곤란한 것 아닐까?
말하자면 역사의 위인을 한 명 잃어버린 셈이니, 우리는 진주성 싸움의 김시민 장군은 잘 알고 있지만 연안성 싸움의 이정암 장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왜란 이후에 작성된 아래의 선무교서에는 김시민과 이정암의 이름이 나란하다. 연안성 전투가 진주성 전투 못지않게 치열했다는 방증이니, 오죽하면 왜란 당시 분조(分朝)를 이끌던 광해군은 연안성 싸움을 '조선의 안시성 전투'라고까지 했으랴?
특히 이정암이 싸웠던 왜군은 소서행장, 가등청정과 더불어 조선침략의 3대 선봉장이었던 흑전장정으로 그들 중 가장 젊은 당 24세의 청년장수였다. 풍신수길이 그런 흑전장정에게 선봉을 맡긴 것은 그의 패기와 용맹을 높이 샀다는 말일 터이다.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그는 소서행장과 함께 도망간 임금을 추격해 평안도까지 치올라갔으며 군량미를 확보하러 다시 내려와 황해도 곡창 연백평야를 지키던 연안성 공격에 나섰던 것이었다.
이정암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조참의라는 중책에 있었으나 의주로 피난가는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어 관직이 없었다. 그럼에도 백의종군을 결심하였던 바, 개성유수인 아우 이정형과 함께 임진강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이미 뚫린 상태였다. 이에 그는 의병 500명을 모집해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과 함께 고성(古城)인 연안성으로 들어갔다.
평안도로 진격한 왜군의 일군(一軍)이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를 점령하러 내려오리라 예상했던 것인데, 그는 과거 황해도 연안부사와 장단부사를 지낼 때 선정을 베푼 경력으로써 의병들을 쉽게 규합할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그를 초토사(招討使)로 임명해 힘을 실어주었다. 황해감사와 연안부사는 이미 달아난 후였다.
<선조실록>에도 언급되어 있거니와 연안성은 형세가 좋지 않음으로 인해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성이었으나 이정암은 그 빈 성에 들어가 웅거했다. 사람들 또한 "성이 얕고 군사가 적으며, 식량 또한 없으니 많은 적과 맞서 오래도록 지킬 수 없다"며 반대했으나 정암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연백평야의 초입인 연안성을 지켜내지 못하면 연백평야를 지킬 수 없다 여겼던 것이니 그는 기어코 성으로 들어가 흩어진 사람들을 부르고, 군량과 병기를 모으고 수선하며 결전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8월 28일, 흑전장정이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 앞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왜군의 군세에 실색(失色)했고 그중의 일부는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정암은 단호했다.
"나는 경악(經幄, 임금을 가르치던 직책)에 있던 늙은 신하였으나 말고삐를 잡고 임금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짤렸으나) 왕세자로부터 초토하라는 명을 받았던 바, 성 하나의 수비라도 맡아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양민을 이끌어 성에 들어왔거늘 적이 왔다고 해서 버리는 짓을 어찌 차마 하겠는가. 붙잡지 않을 터인즉 함께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마음대로 성을 빠져나가라."
아울러 성이 보잘것없는 것을 보고 항복을 권하는 흑전장전에게도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義)로 싸운다. 불의로 의를 치려함이니 너희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이에 흑전장정은 조총부대를 선봉으로써 성을 삼중으로 에워싸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자신들의 막강한 화력을 과시해 기선을 제압할 요량이었다. 그러는 동안 흰 말을 탄 왜장 한 명이 성의 외각을 둘러보며 성채를 만지고 지나갔다. 성곽의 부실함을 주지시켜 기세를 꺾으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민(城民)의 사기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으니, 그 꼴을 지켜보던 수문장 장응기(張應祺)가 화살을 빼어 활에 걸었고, 화살은 곧장 왜장의 가슴을 꿰뚫었다.
왜장이 말에서 고꾸라지자 성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이에 성루의 이정암이 좌우를 둘러보며 "보라. 이것은 적들이 패할 조짐이로다....." 하는데, 그 순간 요란한 총성과 불꽃이 작렬했다. 왜장이 쓰러지는 것을 본 흑전장정이 공격을 앞당긴 것이었으니 수천 개 조총의 일제 사격으로 사방에 연기가 자욱하고 탄환이 비 오듯 쏟아졌다.
흑전장정은 1582년 14세의 나이로 나선 풍신수길 휘하의 전투에서 전공을 기록한 이래 시즈가다케 전투, 네고로·사이카의 난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멀리 규슈까지 원정한 경력을 가진 젊고 패기만만한 장수였다. 반면 이정암은 본래 문신이었을뿐더러 키와 몸집이 작고 가냘파 제 옷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 듯 보이는 사람이었다.(<선조수정실록>) 하지만 성정은 외모와 같지 않았으니* 전투에 임해서는 여느 무장 못지않은 지휘력을 보였다.
*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며 정교하고 민첩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성색(聲色)에 동요되지 않았으며 시세를 따라 저앙(低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시배(時輩)들에게 배척받았다.(<선조수정실록>)
이정암은 많은 적들이 몰려듦에도 태연자약하였다. 화살이 부족함을 알고 있던 그는 적들이 다가와도 경솔히 활을 쏘지 못하게 하고 돌과 나무를 던지고 끓는 물을 부어 방어했으며, 활을 쏠 때는 반드시 쏘아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짝·다락 등을 뜯어 방패로 삼고 가마솥을 벌여 두고 물을 끓이면서 늙은이 어린이 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 그 일에 달려들도록 하였다.
그는 또 적들이 공성기와 지형 등을 이용해 높은 곳에서 유리한 공격을 해오면 이에 맞서 성 위에 흙담을 쌓아 막았고, 적이 야습을 해오면 횃불을 던져 먼저 태워 죽였다. 하지만 석시(石矢, 돌과 화살)와 방패로 쓰던 문짝 등도 다하고 강화에 청했던 원병도 나타나지 않자 결국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암은 띠[茅]를 이어 집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말했다.
"내가 사녀(士女)를 불러 모아 나라를 위하여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힘이 다한 듯하구나. 장사(將士)들이 모두 죽는 마당에 내가 무슨 낯으로 혼자 살려 들겠는가. 성이 함락되는 날, 그대들은 이 막사(幕舍)를 태우라. 나는 여기서 죽겠다."
그러나 4일 밤낮으로 공격한 적들도 총탄이 소비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어느 순간 소리만 지를 뿐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자 총탄이 떨어졌음을 감지한 성민들이 환호하며 쇠북을 쳐댔고,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그러자 그것이 마치 퇴각 신호라도 되는 양 적들은 시체를 모아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그때가 9월 2일 저녁으로, 성 안의 희생자는 30명이 넘었고 대다수의 사람이 기진했지만 이정암은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18명의 목을 베고 소와 말 90여 필과 군량 1백30여 석을 빼앗았다.
이 기적 같은 승리를 보고받은 광해군은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경(卿)은 흩어져 도망하는 군사를 불러 모아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켰고, 섶을 쌓아 스스로 타 죽을 결심을 하였기에 백성들도 기꺼이 함께 죽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높은 사다리와 조총이 끝내 무용지물이 되게 만들었던 바, 이는 안시성주(安市城主) 외에는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이다. 이로써 소문이 사방에 퍼지니 이제는 모두가 성을 굳게 지킬 것을 생각하게 됐고,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의 뱃길도 거리낌 없이 왕래하게 되었다. 이것을 어찌 경의 힘이라 아니하겠는가. 지금부터 더욱 지키는 기구를 손질하여 적들이 날마다 공격해오더라도 영영 침범치 못하게 하라."
연성대첩은 정말로 조선 군민의 사기를 진작시켰는지 이후 많은 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고, 이정암은 연암성 이하 황해 13주(州)를 수복하여 굳건히 방어하였다. 그리하여 아산(牙山) 강화(江華) 용강(龍岡)으로 이어지는 서해의 물길이 열 수 있었던 바, 전라·충청도와 의주 행재소(임금의 임시 처소) 연결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연암성 승리 후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적이 28일에 성을 포위했으나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라는 모든 공치사가 생략된 12자 만의 매우 쿨한 장계를 올렸는데, 전후(戰後) 선조의 칭찬에 대한 답변도 한결같았다.
"신(臣)은 별로 한 것이 없고 사민(士民)들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낮은 자세가 군민(軍民)들의 아낌없는 희생을 이끌어냈을 것이고, 열악한 싸움을 뒤집어 대첩을 이룩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 延安 延城大捷碑(篆題)
昔在萬曆辛卯上謂羣臣曰日本酋秀吉塹海負隅噓喝隣邦虐始於我終圖射天夸慢自雄出不遜語其嚴諭禍福逞折姦猖毋俾再肆明年壬辰戌人 走呼有寇大來踣釜拉萊踰嶺涉湖袒裼而蹈腹內指顧之頃遂大鞣我四境時則有若李統制舜臣以舟師拒閑山挫銳海上有若金節度時敏以孤軍嬰 晋陽抗難南州有若李招討廷馣以義旅守延安奮忠於前有若權元帥慄以南軍鎭幸州嘬鋒於後會天朝大將軍李提督如松提兵五萬擊破平壤聲 生勢張互爲掎角以能復我三京再全八路天子嘉之褒詔賜金有差於是天下游談者咸一口言曰武夫職耳儒者迺亦爾耶後十三年乙巳上策 勳頒賞又後四年戊申延安人謀所以載烈埀 永者來問銘余辭不可謹按故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崇政大夫議政府右賛 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月川君李公諱廷馣字仲薰故爲吏曹叅議時主上西巡以公弟廷馨前守開城寄惠未兦 命留鎭之廷馨乞與兄同守及臨津師潰公擇形便爲分守計以是年八月二十二日至延安府中豪傑有宋德潤趙光庭等聚徒百餘迎曰公有舊恩在本 土乞留活我公笑曰吾今日得死所矣卽入城募得五百餘人提衡以勒之曰疇能爲我管四門鑰疇能坐甲登陴使賊不敢近壕疇管我糧餉疇繕我器械 隨才部分訖聚礮於墩列釜於傍老幼趨事羣能着職二十八日賊酋長政刧掠載信諸郡攻陷海州以兵三千餘人與江陰之賊悉銳而來城中色駭有欲 出陣計者公曰我旣與兵民約同死生陷民自濟所不忍也良怖甚者任自出城不汝拘也一軍咸願死守日旣吳賊進圍三匝俄有一賊帥周觀城外摩壘 而過勢益張甚門將張應祺一箭洞胸而死賊氣死不敢輕出別於西城以飛衝下瞰城中以砲碎之則亂發火箭圍中多草屋人皆心內懼汹汹忽廻風大 起烟㷔外靡賊計無奈何撤廬舍塡壕塹遂皷士陵城羣而蟻附之公知不可爲乃坐積芻戒其子濬曰城陷可自焚聞者感泣一力而齊致死如是者凡四 日賊亦死傷過半是夜師熠 賊己聚死屍盡焚之翌朝乃觧圍去我軍僅斬一十八級奪牛馬九十餘匹軍糧一百三十餘石朝廷聞公被圍上下憂危及 捷至只言賊以某日圍城以某日觧去一無張皇語議者咸言却賊易不伐功尤難上特加嘉善爲本道都巡察使文武將官皆聽公節制仍賞諸將以下有差公之在兵車駕西狩龍灣隆景持重兵據松京列營黃鳳連綴江陰危動浿南直搖關西長政猖海濱放兵四刧南路阻絶公一戰而剪其觜距賊 喘汗自戢蒭牧不敢近公城下海西十三州皆復爲我有二南勤王之士由牙山江華渡龍岡達行在奔問有路漕輓無碍公之力也公慶州人與余同 自出相善年十八陞上庠二十一明經及第少試郡邑民呼召杜及叅銓衡世期姚宋餘事文章亦多鳴世不幸遭亂功光䟽勒辨冕中興精神汗竹秩登勳
尊享有元祀恩堆祖先事載無止旣全忠孝兩有文武作人如公寔維大夫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筞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世子傅鰲城府院君李恒福撰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鄭賜湖書折衝將軍行龍驤衛上護軍知製敎金尙容篆
萬曆三十六年五月 日
■ 연성대첩비 번역문
옛날 만력(萬曆) 신묘년(선조 24, 1591년)에 왕께서 여러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일본의 추장 수길(秀吉)은 바다가 막혀있고 멀리 한 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믿고, 거짓으로 이웃 나라를 공갈(恐喝)하며 우리를 업수이 보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천자의 나라마저 공격하려 하는구나. 스스로 으뜸이라고 뽐내며 불손한 말을 함부로 지껄이니, 화복(禍福)의 이치로써 엄히 훈계하고 간사하고 미쳐 날뛰는 행동을 꺾어서 두 번 다시 방자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다음 해 임진(壬辰)년에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이 달려와 왜구들이 크게 쳐들어온다고 소리지르더니, 부산(釜山)과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는 재를 넘고 호수를 건너 웃통을 벗어젖히고 서울에 다다르니, 손가락질하고 돌아보는 사이에 이미 우리나라의 사방을 모두 짓밟아 버렸다.
이 때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장군은 해군을 거느리고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을 막아 해상에서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었으며, 절도사(節度使) 김시민(金時敏)장군은 얼마 안되는 군사로서 진양(晋陽; 지금의 진주)을 보호하여 남쪽 지방을 어려움으로부터 막아내었다. 또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공은 의롭게 500 명의 군대로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의 일부)을 지켜내어 앞에서 충성심을 떨쳤으며, 원수(元帥) 권율(權慄)장군은 남쪽의 군대를 이끌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쳐서 후방에서 적의 예봉을 꺾어 버렸다.
마침 중국에서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이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평양을 격파하고 서로 소리 높여 호응하니, 앞뒤로 뿔을 잡고 꼬리를 붙드는 형세를 이루어 적을 협격(挾擊)하여 우리의삼경(三京) 을 수복하고 다시 팔로(八路; 전국 八道로 가는 길)를 온전하게 복구할 수 있었다. 중국의 천자께서 이를 가상하게 여겨 널리 포상(褒賞)하고 상금을 차등있게 하사하셨다. 이 때에 세상에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맞추어 “무부(武夫; 장수)가 할 만한 일이니, 유자(儒者; 선비)는 네가 하거라”고 할 정도였다.
그 후 13년이 지난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 왕이 지난 전쟁에서의 공훈에 따라 작위를 책봉하고 상을 내렸는데, 또 4년 뒤인 무신년(선조 31, 1608년)년에 연안(延安) 사람들이 그 공적을 영원히 전하고자 하여 나에게 그 비문을 지어줄 것을 청하니 사양하였으나 피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돌아가신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効忠仗義協力宣武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賛成)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추증받은 월천군(月川君) 이공(李公)의 이름은 정암(廷馣)이고 자는 중훈(仲薰)이다.
이전에 공이 이조참의(吏曹叅議)의 벼슬에 있을 때에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셨는데, 공의 동생인 정형(廷馨)이 이전에 개성(開城)의 수령을 지내면서 백성들에게 끼친 은혜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개성에 남아 지키도록 하니, 정형(廷馨)이 형과 함께 지킬 것을 청하였다.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 군대가 패하여 무너지자 공은 형편에 맞추어 나누어 지켜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이해 8월 22일에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러니 이 곳의 호걸(豪傑)인 송덕윤(宋德潤)· 조광정(趙光庭) 등이 무리 백 여명을 이끌고 맞이하며 말하기를 “공이 이전에 남긴 은택(恩澤)이 아직 이곳에 남아있으니 청컨대 여기에 남아 우리들을 살려 주소서.”라 하였다.
이에 공(公)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오늘 죽을 곳을 얻었도다.”하고는 곧 성으로 들어가 군사 오백 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저울대를 잡고 자세히 말하기를 “누구누구는 우리를 위하여 사방의 문을 굳게 지키고, 누구누구는 갑옷을 입고 여장(女牆) 에 올라 적들이 성의 해자(垓字) 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누구누구는 우리 군량미를 책임지고, 누구누구는 병장기들을 손질하라.”고 각자의 능력과 재주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기를 마치자, 돈대(墩臺)에 돌을 쏘는 쇠뇌들을 모아 놓고 그 옆에는 솥을 늘어 두었다. 어린이와 노인들 까지도 모두 참여하여 모든 사람들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였다.
28일에 적의 두목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재령(載寧)과 신천(信川)의 여러 군을 겁탈하고 노략질한 다음 해주(海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거느린 군사 3,000여 명과 강음현(江陰縣; 황해도 金川郡의 일부)의 도적들을 합하여 예봉(銳鋒)을 날카로이 하여 공격해왔다.
성안에서는 놀라 실색(失色)하여 군진(軍陣)을 벗어나 도망가자는 계책을 내어놓는 이도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병사와 백성들에게 생사(生死)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백성을 사지(死地)에 빠뜨리고 스스로 빠져 나간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정말로 두려운 자들은 붙잡지 않을 터이니 마음대로 성을 나가도 좋다.”고 하니 모든 군사들이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날이 기울자 적이 몰려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의 장수 하나가 성 바깥을 둘러보고 성채를 만져보고 지나가니 기세가 더욱 커졌다. 문장(門將) 장응기(張應祺)가 화살 하나로 가슴을 관통시켜 사살하니 적의 기세가 죽어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하였다. 따로 성의 서쪽에서 높은 충차(衝車)로 성을 내려다보며 포를 쏘아 부수고 불화살을 어지럽게 쏘니, 성안에는 초가집이 많은지라 사람들이 모두 속으로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 불꽃과 연기를 바깥으로 몰아내니 적의 계책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적이 오두막 집 들을 철거하여 해자와 웅덩이를 메우고 드디어 북을 치며 성을 기어오르는데 그 무리가 개미가 달라붙은 듯하였다. 공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에 섶을 쌓아놓고는 그 위에 앉아 아들 준(濬)에게 이르기를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을 질러 죽겠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이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여 힘을 합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이와같이 하기를 4일 간이나 계속하니 적 또한 죽고 상한 자가 태반이 넘었다. 이날 밤에 적의 군대가 훤하더니, 적들이 죽은 시체를 모아 불태우고는 다음날 아침에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우리 군대가 참한 적의 수급(首級)이 열여덟이고, 빼앗은 우마(牛馬)가 90여 필이며 군량미가 130여 석이었다. 조정에서는 공이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는데,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그 내용에 단지 몇일날 포위를 당했다가 몇일날 포위를 풀고 떠났다고만 되어 있을 뿐 장황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의논하는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을 물리치기는 쉬워도 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下)의 품계를 하사하고 본도(本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문무(文武)의 장관(將官)들이 모두 공의 명을 받도록 하였다. 이어 여러 장수들에게도 상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 공이 병조(兵曹)에 있을 때에는 서쪽으로 수레를 몰아 용강(龍岡)의 바다 지역까지 살펴보았으며, 중무장한 병사들을 개성(開城)에 배치하고 황주(黃州)에서 봉산(鳳山)까지 군영(軍營)을 줄지어 설치하고 강음(江陰)에까지 이르도록 하니, 패수(浿水) 남쪽에서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관서(關西)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가 바닷가에서 미친 듯 날뛰며 군사를 놓아 사방을 노략질하니 남쪽으로 연결하는 길이 막혀버렸으나, 공이 한 번 싸워 그 예봉을 꺾어 적을 멀리 쫏아버리니, 적들이 땀 흘리고 숨차 허덕거리며 스스로 무기를 거두고 말을 먹일 뿐 감히 공이 있는 성 아래로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해서(海西; 황해도)의 13개 주(州)가 모두 다시 우리의 차지가 되었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왕을 모시고자 하는 군사들이 아산(牙山)과 강화(江華)를 거쳐 용강(龍岡)을 건너 왕이 계신 행재소(行在所)까지 올 수 있었다. 말 달리고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길에 가득하고, 물자를 실어나르는 배와 수레가 막힘이 없게 된 것도 모두 공의 힘이라 할 것이다.
공은 경주 사람으로 나와 본관이 같으니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21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고을의 벼슬을 살았는데, 고을 사람들이 소두(召杜) 라고 칭송하였다. 이조(吏曹)에 나아가 관리의 인선(人選)을 맡으면서부터는 세상에서 요송(姚宋) 과 같은 명재상이 되리라 기대하였으며, 문장 또한 세상에 널리 떨쳤다.
불행하게도 난리를 만나 그 공적들이 빛을 잃게 되었으나, 뚜렷이 왕실을 중흥하니 그 정신(精神)은한죽(汗竹)에 기록되고, 품계는 높아지고 으뜸가는 제사를 받으니, 은택은 조상에게까지 미쳤고 그 사적은 영원히 남을 비석에 새겨졌다. 충효(忠孝)를 모두 온전히 하였으며 문무의 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공만큼만 한다면 진실로 대장부(大丈夫)라고 할 것이다.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筞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 영경연(兼 領經筵)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정사호(鄭賜湖) 가 글씨를 쓰고,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 지제교(知製敎)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씀.
만력(萬曆) 36년(선조 41, 1608년) 5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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