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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요새 III - 알카사르·두오몽·에든버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5. 4. 01:26

    16. 두오몽 요새(Fort de Douaumant)

    프랑스 동북부 뫼즈 고원 위에 평원을 바라보며 구축된 군사 요새로, 1885년 건설을 시작해 1913년에 완성되었다. 요새는 면적 3만㎡, 길이 400m에 달하고, 6m 두께의 단단한 2층 콘크리트 벙커 구조로 건설되었으며 지하통로를 통해 벙커가 연결되었다. 각 벙커에는 360도 회전이 가능한 최신식 갈로팡(Galopin) 대포가 걸렸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곳에서 베르됭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프랑스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며 말려 죽이겠다는 작전을 구사하였던 바, 프랑스가 마지막 병사까지 투입하지 않을 수 없는 지구전을 위한 공격지점으로 요새 도시 베르됭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1916년 2월 21일, 독일 제5군 14만 명의 병력에 1400문 이상의 대포로써 베르됭의 보루인 두오몽 요새에 폭우와 같은 포탄을 퍼부었고, 2월 25일 마침내 함락시켰다. 이 4일 동안 프랑스는 10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프랑스군 제2방어선이 무너졌다.

     

    이에 대항하는 프랑스군 필리프 페탱 장군의 작전은 말라 죽을 때까지 공격하기였다. 전열을 정비한 프랑스군은 2월 26일 필사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던 바, 29일 두오몽 요새를 탈환하였다. 독일은 3월에 다시 공격을 개시했고 3월과 4월 뫼즈 강 동서쪽 언덕과 능선에서는 포격과 공격, 반격, 점령, 탈환이 반복되는 전투가 지속되었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계속된 이 강대강(强對强)의 전투에서 무려 70만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던 바, 두오몽 요새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은 물론이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으로 꼽히게 되었다. 

     

    10개월 뒤 독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베르됭에서 물러났고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독일군의 공격지점이 베르됭이 될 것을 예상치 못해 방비가 소홀했던 데 대한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두오몽 요새
    요새의 지하통로
    두오몽 요새의 구조
    베르됭의 위치

     

    17. 톨레도 알카사르(Alcázar of Toledo) 요새

     

    스페인 톨레도는 처음에는 톨레툼(Toletum)이라 불린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이후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그 분파였던 서고트족이 451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으며, 507년 이 도시를 수도로 삼았다. 서고트 족이 스페인을 다스릴 때는 비교적 평온하였으나 6세기 들어 이슬람의 무어인이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너오며 사정이 급변했던 바, 714년 톨레도가 함락되며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

     

    톨레도는 1085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탈환해 레콩귀스타(스페인 기독교도의 고토 회복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후 스페인 통일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1561년 필리페 2세가 마드리드로 천도하며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톨레도가 수도였을 당시 지어진 알카사르 요새는 톨레도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석조 요새로서 서고트 왕국 시대부터의 역사적 장소를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샤르페 5세와 그의 아들 필리페 2세가 중수했다. 

     

     

    톨레도 알카사르 요새

     

    톨레도 알카사르 요새는 근대 들어 발생한 스페인 내전으로 유명해졌다. 스페인 내전은 수십 년 동안 스페인 역사와 정치가 양극화한 결과로 발생했다. 내란은 군부, 카톨릭 교회, 신흥기업가 등이 주축이 된 우파 국가주의자와 중산층, 노동자가 주축이 된 사회주의 공화파가 대립했는데, 1936년 7월 17일,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장군이 모로코에서 자신의 직속 군대를 이끌고 군사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시작되었다. 

     

    내전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가주의자를 지원하고 소련과 프랑스가 공화파를 지원하며 국제전의 양상까지 띤 혼란이 가속되다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며 우파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났다. 내전 기간 동안 5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특히 톨레도 알카사르 요새에서 호세 마르카르도 대령이 이끄는 우파 국가주의자가 공화파에 포위되며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나 72일간의 공성전에서 승리하며 내전의 향배가 기울었다. 파괴된 요새는 전후 복구되었고 지금은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이용된다. 

     

     

    호세 마르카르도(왼쪽)와 프랑코
    공화파 여군에 지원한 여성들
    프랑코와 히틀러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 찍은 ‘어느 공화파 병사의 죽음’. 스페인 내전의 상징과 같은 사진이 됐다.
    1936년 내전 상황(회색이 우파 국가주의자, 적색이 좌파 공화파)과 톨레도의 위치(○)

     

    18.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

    잘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나 에든버러 성은 133 미터 높이의 사화산 꼭대기에 건설되었으며 그 시기는 청동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에든버러 성은 현재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의 스카이라인을 이끌며 스코틀랜드의 관광산업을 선도하고 있지만 7세기경 잉글랜드가 이곳 에이든-버르(Eiden-burh)에 요새를 구축한 이래 스코트랜드 켈트족과 뺐고 빼앗기는 전투가 지속된 격전의 현장이었다.  

     

    지금의 성은 10세기경 스코틀랜드가 도시를 탈환한 후 11세기에 축조한 것으로, 이후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홀리루드 궁을 건설해 스코틀랜드의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플랜태지넛 왕가의 에드워드 1세(1239-1307년)에 의해 1296년 점령되었는데,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heart)'에 나오는 냉혈한 롱생크 왕이 바로 그자다. 에든버러 성의 입구인 게이트 하우스에는 에드워드 1세와 맞서싸운 로버트 더 블루스(1274-1329년)와 윌리엄 월레스(1270-1305년)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이후 스코트랜드 민족은 1314년 성을 수복하여 1513년부터 도시 남쪽에 잉글랜드의 공격에 대비한 성벽을 축조하였으나 1547년 헨리 8세의 침공을 받아 성을 빼앗겼고 1571년 대(大) 공성전을 치렀다. 1715년 에든버러 성에서는 다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1745년 재차 이 성을 빼앗았으나 오래 지키지는 못하였다. 이후 이 성은 감옥으로 바뀌며 더 이상의 전투가 없었고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귀속되어 유나이티드 킹덤(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의 일원이 되었다. 

     

     

    안개 속의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
    게이트 하우스 좌·우의 로버트 더 불루스와 윌리엄 월레스 상
    영화 '브레이브 하트' 속의 로버트 더 불루스
    영화 '브레이브 하트' 속의 윌리엄 월레스(코로나 버전 ^^)
    마스크 착용이 철저한 멜 깁슨
    마스크를 달라고 외치는 멜 깁슨
    스코틀랜드와 에든버러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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