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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도방해죄로 처형된 조선인 스페셜리스트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10. 13. 05:24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사진 1장이 있다.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는 3명의 조선인 사진으로, 지금까지 찾은 이 처형 장면이 담긴 일련의 사진이 총 9장이나 된다. 그리고 그중에는 일제가 엽서로 만들어서 배포한 것도 있는데, (아래) 그것으로써 처형당한 사람들의 죄목과 연도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지은 죄는 '철도선로 방해죄'이고 연도는 1904년이다. 그래서 더욱 의아한 그 사진들을 우선 살펴보자.

     

     

    처형된 3명의 조선인 사진 
    처형된 3명의 조선인 사진 (위와 장소와 시간이 동일한 사진으로 과거 교과서에도 실렸다) 
    위의 처형 장면을 실은 일제의 엽서. '철도선로 방해자의 사형집행'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총살 전·후의 사진

     

    1904년이면 조선이 나라를 빼앗기기 6년 전의 일이니 대한제국의 주권이 엄연할 때이다. 아울러 대한제국의 실질적 자치권이 상실된 1905년의 을사늑약에도 1년 앞선다. 그런데도 총살형이라니....? 그들의 죄목인 '철도선로 방해죄'는 뭔가? 그것이 과연 사형에 이를만한 죄인가? 그들은 재판의 과정이라도 거쳤는가? 그리고 그들이 이렇듯 일본인의 손에 의해 죽는데도 왜 조선의 국법은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그 사건을 추적해보고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나보았다. 일단 다시 과거로 가보자. 

     

     

    호마 헐버트의 <대한제국 쇠망사(Passing of Korea)>에 실린 한국인 처형 사진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조선인의 서양식 교육을 위해 설립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처음 우리나라에 건너와 오랜 세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위해 일했다. 그가 1906년 출간한 <대한제국 쇠망사(Passing of Korea)>에는 이른바 '철도파괴범'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그는 이 사진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사람일 것이다. 이 사진에는 "군율(martial law); 일본이 무상으로 토지를 징발한 데에 항거하여 군용철로를 중지시킨 일로 총살된 세 명의 한국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에 즈음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엄중한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이건 하나마나한 소리였던 바, 일제는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한 경의선 철도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 499km는 만주를 무대로 펼쳐진 러일전쟁에서의 필수불가결한 병참이었다. 이에 철도부지의 확보를 위해 농토와 묘지 등을 강제로 수용하고 역사 부근 토지는 이주한 일본인에게 값싸게 제공하는 등 횡포가 빈발했다.

     

    이 같은 불법적인 토지 침탈에 피해를 입은 한국인의 저항이 없을 수 없었다. 피해자들은 일제가 측량한 토지에 세운 말뚝을 뽑거나, 전신주를 파손하거나 통신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적극적 저항을 보이기도 하였으니, 위의 잔인한 처형 장면은 그에 대한 보복일 것이었다.(위 사진을 포함한 일련의 9장은 일제가 공인사진사를 인력거로 모셔 촬영했고, 외국 언론사 등에 돈을 받고 팔기도 하는 등 홍보에 진력했고, 외부적 파장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위 장면에 대한 설명은 매체마다 조금씩 다르니 프랑스의 시사화보지 <르 쁘띠 빠리지엥(Le Petit Parisien)>은 1904년 12월 18일자 기사에서 "술에 취한 세 명의 한국인 농부가 서울에서 의주로 향하는 철도의 선로를 건너다 선로변경장치를 발견하고, 별다른 악의 없이 이를 조작하다 순찰 중이던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었다. 그들 세 농부는 러시아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의심을 받아 결국 '범죄’현장에서의 처형'이 결정되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프랑스 언론의 삽화. '조선인의 잔혹한 피의 처형'

     

    반면 독일 공사 콘라트 폰 잘데른(Konrad von Saldern)은 1904년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에서 "한국 농민 3명이 철도물자를 훔친 죄로 총살되었다"고 보고하며, "이들이 정치적 동기가 전혀 없는데도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처형했다" 지적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국제법상의 전시권에 따라 적국의 첩자로 행동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중립국(조선) 국민이라도 처벌할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웠으나, 처형된 사람들은 정치적 이유(러시아에의 협력)가 아니라 생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저지른 행위"라고 밝혔다. 

     

     

     조선인의 부당한 처형을 알린 독일 공사 콘라트의 보고서

     

    조선의 <황성신문> 역시 1904년 9월 22일자 '해철처형(害鐵處刑, 철도에 해를 입혀 처형됨)' 제하의 기사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다. 그리고 <황성신문> 이때 처형된 이들의 정체가 김성삼(金聖三) 이춘근(李春根) 안순서(安順瑞)의 3인이며, 총살형을 당한 장소가 마포 공덕리 부근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황성신문> 기사

     

    <조선일보>는 위 프랑스 신문 <라 일뤼스트레>에 실린 수채화 화보를 1986년 3월 9일자에 소개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나왔다. 이 기사를 본 재일교포 강창일 씨(동경대 대학원생)가 당시 학살현장을 담은 사진첩을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에게 보냈는데, 러일전쟁 직후 일제가 발간한 <일노전쟁 사진화보>라는 제목의 그 사진첩에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사뭇 다른 설명이 달려 있었다. 조선 일보는 3월 26일, 그 사실을 다시 보도했다.

     

     <라 일뤼스트레>에 실린 그림을 옮긴 <조선일보> 

     

    다시 게재된 관련기사

     

    위의 사진이 포함된 4장의 의병 학살 사진에는 "1904년 8월 27일 한국 용산 부근에서 일본군 군용철도에 방해를 가해 체포된 비적(匪賊)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의 3인이 9월 21일 오전 10시 마포가도의 철도건널목 산기슭에서 총살되었다"는 등의 설명이 달려 있었다.

     

    즉 이들이 단순한 철도시설 파괴범이나 절도범이 아닌 일제의 철도시설을 파괴하려는 의병임과, 이들이 당시 용산과 마포 사이에 가설된 일제의 군용철도에 폭약을 매설, 군용열차를 폭파한 후 체포되어 도로변 철도건널목 부근(지금의 마포구 도화동 야산기슭)에서 강제동원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마쳤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게 된 것이었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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