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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동주의 '참회록'과 영휘원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1. 2. 17. 02:07

     

    참회록(懺悔錄)

     

     

    ​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의 시는 굳이 해석이 필요 없다. 어렵던 쉽든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것은 사실 시 감상의 본질이기도 할 텐데, 윤동주의 시는 어떤 것이든 나름대로의 느낌이 팍팍 주어진다. 그래서 그가 훌륭한 시인인지도 모르겠다. 위의 '참회록'에서는 망국의 국민으로서 24년 1개월 동안 오로지 치욕스럽기만 했던 한 젊은이의 무력한 삶에 대한 회한과 반성, 그리고 옅으막한 극복의지가 투영돼 있는데, 나는 왠지 윤동주가 이 시를 청량리 영휘원(永徽園)에서 썼을 것만 같다. 한 왕조의 영락(零落)을 체감할 수 있는 장소로는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기에..... 작년 늦가을, 숨겨진 서울의 단풍명소 영휘원을 다녀와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사진을 올려본다. 

     

     

    영휘원의 가을

     

    영휘원은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황제인 고종의 후궁이며 의민태자(懿愍太子) 이은(李垠, 1897-1970)의 어머니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1854-1911)의 무덤이다. 8세(1861년 1월)에 입궐하여 을미사변 후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고종을 모시다 사랑을 받아 1897년 영왕(영친왕) 이은을 낳고 1903년 황귀비로 책봉되었다. 일설에는 계비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 계비란 정식으로 책봉된 두 번째 정궁(正宮)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황후가 아닌 황귀비에 책봉된 순헌황귀비에게는 맞지 않는 칭호다.(희빈 장씨에 질린 숙종이 장희빈 사후 후궁은 왕비가 되지 못한다고 국법으로 정했다)    

     

    그의 아버지는 평민인 엄진삼으로 종로 육의전에서 장사를 했으나 빈한했고, 집안의 가난에 쫓긴 엄씨는 궁녀로 입궐해 경복궁의 나인이 되었다. 이후 명성황후의 몸종 격인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가 1884년 서른한살 늦은 나이에 고종의 승은을 입는다. 그는 미인도 아닌데다(까놓고 말하면 못 생긴 축이다) 뚱뚱하고 과년했던 까닭에 엄상궁이 승은을 입었다는 소식은 궐내를 경악시켰는데, 명성황후의 경우는 아예 믿으려 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로 밝혀지자 명성황후는 자존심 스크래치 더하기 배신감 폭발로 분노의 매를 들어 다스린 후 궐 밖으로 내쳤다.

     

     

    순헌황귀비 엄씨

     

    나아가 명성황후는 그를 폐서인시켜려까지 했으나 탁지부대신 윤용선이 말려 서인만은 면하였고,(그가 아니었다면 생계가 막연할 뻔했던 엄씨는 훗날 이 은혜를 크게 갚는다) 이듬해 1885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죽자 고종의 부름에 다시 입궐하여 임금을 모셨다. 그는 대한제국 교육에 큰 관심이 있어 1905년 양정의숙(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명신여학교(숙명여고)를 설립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신데렐라의 꿈을 이루었지만 시대의 세파(世波)는 비껴갈 수 없었을 터, 구한말의 풍상을 온몸으로 겪던 순헌황귀비는 나라가 병탄된 이듬해인 1911년 서거해 이곳 영휘원에 묻혔다. 

     

     

    영휘원

     

    영휘원 비각 안내문

     

    영휘원 어정(御井)

     

    휘원 경내에 있는 숭인원(崇仁園)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의민태자의 아들인 이진(李晉, 1921-1922)의 무덤으로 생후 겨우 9개월을 살다 갔다. 하지만 친할머니 곁에 묻혔으니 사후라도 많은 사랑을 받았을 듯하다. 아버지는 의민태자, 곧 영왕 이은이고 어머니는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의 딸 이방자 여사다. 이은과 이방자는 1920년 결혼했고, 첫 자식인 이진은 일본에서 태어나 1922년 4월 말 어머니와 함께 조선으로 건너왔으나, 그다음 달인 5월 11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사하였다.

     

    영왕 이은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에게 어릴 적부터 휘둘려 이토의 이름자를 들으면 선잠에 들었다가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였는데, 이토가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당하며 조금 숨통이 트이는 듯싶었으나 이어 조선 총독 사이토 미코토(齋藤實)에게 휘둘렸다. 사이토 총독은 이은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으로 만들 계획으로서 일본 왕족의 딸과 정략결혼을 시켰고, 이에 중국 상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은 이은을 원수의 딸과 결혼한 금수(禽獸), 내지는 적자(賊子)라고 비난했지만 그로서도 도리가 없는 지경이었다.(그럼에도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고 함) 

     

    두 사람 사이의 아기인 이진은 죽기 직전 초콜릿 빛깔의 핏덩이를 연속으로 토해냈다고 하는데 어린 아기에게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증상이었고 한다. 이에 어머니 이방자는 아들의 죽음을 고종의 독살에 대한 보복이거나 일본인의 핏줄을 끊으려는 조선인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자식을 죽였느냐며 아들을 주검을 부둥켜안고 오열했다고 하는데 이진의 죽음은 지금껏 미스터리로 묻여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다시 비운의 황손 이구(李玖)가 태어났던 바, 그에게는 형이 되는 셈이다.

     

     

    영왕 이은과 이방자

     

    숭인원

     

    세종대왕릉 상설(象設)

     

    근방에서는 이와 같은 상설도 볼 수 있다. 본래 이곳에 있던 세종대왕릉의 것들인데 영릉이 여주로 옮겨가며 상설만 남게 되었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초기철기시대 구리 거울(국보 141호 다뉴세문경)

     

    거울의 앞면. 청동거울은 대개 무늬면인 뒷면만 소개되므로 앞면을 볼 기회가 없다. 앞면이 얼굴을 보는 면으로 이렇게 생겼으며 늘 닦지 않으면 산화되어 파란 녹이 낀다. 위 '참회록'의 시구와 고린도전서 13장의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는 문구가 나오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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