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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V)-최후의 진실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6. 28. 06:35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기록이 꽤 많이 남아 있음에도 우리가 그날의 일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까닭은 그 기록들의 내용이 전부 상이하기 때문이다. 그중 내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여 사건의 재구성에 인용한 글은 영국 영사 힐리어와 일본 영사 우치다의 보고서이고, 여기에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보고서를 보완했다. 물론 이들 가운데 현장에서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는 없다. 하지만 각국의 외교관이 본국에 올린 사건 보고서인 만큼 허투루 작성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니 이것은 각자의 공명심과 영웅심리에 의해 작성된 현장 낭인들의 과장된 구술보다 훨씬 정확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곤녕합에 난입했던 다카하시 겐지(高橋源次, 앞서 말한 데라자키 다이키치와 동일 인물임)라는 낭인*은 자신의 회고담에서 본인이 왕비를 직접 벴다고 말하고 있지만,(1931년 다카하시 회고담) 사건 직후 친구인 스즈키 시게모토(領木重元)에게 보낸 편지에는 '불참수적참미인(不斬讐敵斬美人: 원수를 죽이지 못하고 미인을 베는 데 그침)'이라는 시구로써 자신이 죽인 사람이 왕비가 아니라 궁녀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 사실 낭인은 일본에서 쓰는 표현일 뿐 그는 중의원 의장을 지냈던 조선 법부고문 호시 도오루에게 배속된, 100엔의 충분한 월급을 받는 '법무고문 배속 서기'였다. 그가 을미사변에 참가하게 된 동기는 한성순보사 소속 기자 토 가츠아키 등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이 자 토 가츠아키 역시 자신이 명성황후를 찔렀다고 떠벌린 놈 중의 하나다.(☞ II, III 편에 소개된 구시다 신사의 칼 히젠도가 그자 것임)

     

    현장감은 넘치지만 아래 다카하시의 회고담을 보면 자작된 무용담의 흔적이 역력하다.

     

    .....우리들은 이것을 수상하다고 여기고 궁녀 하나씩을 끌어내 던지면서 이불 밑을 보니, 복장은 보통 궁녀 같았지만 침착하면서도 의연한 귀인의 풍모를 갖추고 있어 이 자가 왕비라고 생각했다.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으나 그 태도는 과연 조금도 흔들리는 바가 없었다. 내가 곧바로 베려고 하니까 토 가츠아키가 "성급하게 죽이는 것은 안 된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해치웠다가 만일 왕비가 아니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기에 "아니, 그렇지 않다. 정말로 왕비인 걸 알 게 되면 오히려 베지 못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나는 한칼에 내리쳤다. 나카무라가 머리채를 잡고 있었는데, 그의 손끝을 베었다. 머리 부분을 쳤기 때문에 일격에 쓰러졌다.....

     

    보다시피 다카하시는 여기저기의 것을 빌려와 제 무용담을 완성시켰다.(우치다 보고서와 토 가츠아키의 이야기가 중첩돼 있음) 그의 무용담은 무엇보다 힐리어 및 베베르의 보고서 내용과 상이한 까닭에 문제가 된다. 영국 영사 힐리어는 필시 미국인 장교 다이에게 들은 내용을 적었을 것이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건축가 사바틴에게 들은 내용을 적었을 것이다. 까닭에 아주 정확치는 않더라도 그들의 기록은 믿을 만하나 낭인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말들은 신빙성이 실리지 않는다.

     

    ~ 다이 장군은 조선군 시위대 훈련교관으로 당일 새벽 경복궁에 밀어닥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의 조선군 시위대가 도망치는 바람에 혼자 남아 을미사변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후 그는 영국총영사 힐리어에게 자신이 본 사실을 가감 없이 전했을 것이고, 힐리어는 그것을 토대로 만든 보고서를 본국에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 사바틴은 덕수궁 정관헌, 중명전, 러시아 공사관, 인천 해관, 독립문 등을 설계하거나 건립한 러시아 출신 건축가였으나 1894년, 일본의 발호에 불안을 느낀 고종에 의해 우연찮게 궁궐 호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그는 그날 건청궁에서 일어난 일들을 목격하게 되었고 본분에 충실하게 이를 저지했지만 단신(單身)이었던 관계로 오히려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사바틴은 일본인의 난입에서부터 왕비 시해, 그리고 녹산에서 불태워지는 광경까지를 모두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으로 자신이 본 광경을 베베르에게 낱낱이 보고했을 것이다.

     

    ~ '국부검사' 등의 내용이 있는, 그래서 시간(屍姦)의 문제까지 제기된 이른바 '에조 보고서'의 내용을 믿을 수 없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니 일본 법무장관 스에마쓰 가내즈미(末松謙澄)에게 그 보고서를 올린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역시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현장에서 떠도는 (근거 없는) 얘기들을 취합해 장문(長文)의 리포트를 완성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내가 판단하기에 '국부검사'는 일본인 특유의 변태적 사고에 기인한 어떤 개인의 희망사항이었거나 혹은 죽은 궁녀에 대한 호기심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도 말했지만 명성황후는 낭인들의 칼에 죽은 것이 아니라 특명을 받은 미야모토 소위에 의해 시해됐고 낭인들은 그저 거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고(아침 6시가 훨씬 지났을 것이다) 다이 장군이나 사바틴 등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실내로 여겨지는 그 장소는 우치다 보고서, 힐리어 보고서, 베베르 보고서에서 모두 배제된다.

     

    가뜩이나 일이 늦어져 계획에 차질을 빚을 가망성이 높아졌고(역시 앞서 말했지만, 명성황후 시해를 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조선군 훈련대의 소행으로 만들려는 것이 미우라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보는 눈들도 많아진 아침 무렵에 시간에 쫓기던 그들이 노상(路上)에서 엉덩이를 까고(게다가 열댓 명씩이나) 강간이나 시간을 자행함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이것이 정말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품을 수 있는 생각인가?(그들에게 무슨 환각제가 집단 투입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간 말이 많던 국부검사나 시간에 대해서는 이젠 그간의 생각을 고쳐먹을 필요가 있다.   

     

     

    을미사변의 현장 건청궁 곤녕합
    명성황후의 시신이 나갔을 청휘문
    시신이 불태워진 녹산

     

    더 가관인 것은, 이 날 일본인과 함께 경복궁에 난입해 건청궁까지의 길 안내와 제 상관인 훈련대 연대장을 처치하는 데까지만 역할을 했을 조선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마저 마치 자신이 명성황후 시해 현장을 누볐던 것처럼(나아가 자신이 부하들을 시켜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것처럼)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만나 친교를 맺은 윤효정이라는 자가 쓴 <우범선 최후사(禹範善 最後史)>에 수록돼 있는 바,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십수 명의 궁녀를 다 보았으나 왕비가 어디 있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때 곤녕합의 누문 밖에 관복을 입은 어떤 자가 문을 등지고 앉아서 누문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히 의심스러워 강제로 열려했으나 그는 죽음으로 저항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로 죽였다. 그리고 누문의 자물쇠를 두드려 뽑고 문을 여니 한 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황급하게 "아이고!"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엎어졌다. 그때 (자신의 부하인) 구연수가 입과 눈으로 그녀를 가리키자 검광(劍光)이 한 번 번뜩였다. 그리고 나를 불러 시체를 뒤집으며 물었다. "이 사람인가?" 내가 "그렇다"고 했다. 나는 칼을 들고 시체에 다가갔다. 선혈 가운데서 시체가 길게 한 번 호흡하고 숨이 끊어졌다. 나는 여우사냥의 자취를 생각했다. 2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룬 것이다.....

     

    이 역시 구라의 냄새가 풀풀 난다. 아무튼 우범선은 이렇듯 설치고 다녔던 바, 자연히 신변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우범선은 미우라 고로에게 300엔을 받았고 이후로도 일본 정부로부터 매달 20엔을 받아 중산층 정도의 생활이 가능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부인 사카이 나카에게 생활비가 지급됐고 두 아들들에게도 정부 장학금이 꼬박꼬박 지급됐다)

     

    이에 우범선은 결국 고종이 보낸 자객 고영근과 일본 현지에서 고영근에게 포섭된 노윤명에게 처참히 살해되고 마는데, 전명운 · 장인환 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거사에 앞선 민족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우범선의 사망 시 나이 47살이었고, 때는 1903년 11월 24일, 장소는 구레시 고영근의 집이었다.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고영근과  노윤명의 사진 대신 전명운 · 장인환 의사의 사진을 게재한다.(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다시 조명할 기회가 없을 듯하기에)

     

     

    더러운 화이트 스티븐스( Durham White Steven, 1851-1908) / 대한제국의 친일파 외교고문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가서도 을사조약을 지지하는 등 친일 행각을 일삼다 전명운 장인환 의사에게 피살당한다. 사망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이 추서됐다.
    전명운(좌)과 장인환 /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역전에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했다. 두 사람은 서로 몰랐던 사이로 장인환 의사 출감 후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만나 정식으로 인사했다.
    구레시(吳市) 우범선의 묘 / 히로시마현 구레시에 있다. 우범선의 피살은 지사(志士)의 죽음으로 애도됐고 이에 성금을 모아져 동네 사찰인 진노잉(神應院)에 장지가 마련됐다.
    우범선의 묘지명
    사노시(佐野市)의 또 다른 우범선 묘 / 도치기현 사노시에 있다. 우범선의 뼈가루는 나뉘어져 아래 도쿄 아오야마 김옥균 묘소 근방에도 묘가 건립됐으나 관리 소홀로 황폐해지자 일본 부호이자 우익 정치가인 스나가 하지메가 이장해 자신의 집안 묘지인 사노시 묘켄지(妙顯寺 ) 스나가(須永) 가문 묘역에 장지를 마련했다.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김옥균의 묘 / 김옥균 의발의 일부가 묻혀있다는 곳이다. 관리비가 적체된 무연고 묘지로서 조치가 고지됐었는데 2018년 6월까지는 무고했다고 독자 분께서 알려주셨다.( ☞ ' 김옥균과 홍종우 II')

     

    우범선은 이렇게 운이 다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훈련원 중대장 구연수(具然壽)는 잘 풀렸다. 같이 일본으로 망명했던 구연수는 히로시마에서 우범선의 아내 사카이 나카의 동생이었던 사카이 와키(酒井若菜)와 결혼하였던 바, 두 사람은 동서지간이 된 셈이다. 구연수는 우범선의 비보를 접한 후 몇 년간 몸을 바짝 낮추고 숨어 다녔으나 1907년 통감부가 설치되며 고종이 내린 체포령을 무효화시키자 당당히 귀국한다.

     

    이후 친일파 송병준의 비호 아래 1907년 7월 울릉군수를 시작으로 경무사 경시부감(警視副監), 총독부 경무관, 경무관 칙임(勅任) 사무관으로 승승장구했는데, 요직인 총독부 경무관이나 사무관에 오른 건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케이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말년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했다. 

     

    그와 사카이 와키 사이에서 난 아들 구용서(具鎔書)도 잘 풀렸으니 도쿄상과대학(현재 히도츠바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조선은행(한국은행)에 입사해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지점장까지 올랐다. 해방 후에는 1950년 한국은행총재, 1953년 대한석탄공사 사장, 1954년 한국산업은행 총재, 1958~1960까지는 상공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관운 좋은 사람으로 정평이 났었다.

     

    구용서의 창씨명은 구하라 이치로(具原一郞)로, 일진회를 이끌며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던 친일파 송병준의 손녀 송지혜(창씨명 노다 미에코)와 결혼했다. 그가 해방 후 경제관료로 입신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비 구연수의 덕이니, 도쿄상과대학 졸업 후 아비의 배경으로 1925년 조선은행에 특채되었고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도쿄에서 근무하는 특혜까지 누렸는데, 이후 조선은행은 구조조정을 당하여 10년간 조선인 신입행원이 없었다. 이에 해방 이후에는 몇 안되는 금융계의 재원으로 초대 한국은행총재를 역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이었다.

     

     

    구용서(1899-1986)

     

    그와 이종사촌지간인 우범선의 자식들은 더욱 빛났다. 우범선의 첫째 아들이 그 유명한 우장춘(禹長春) 박사로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실과(實科)에 들어가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동경제국대학 법대에 들어가 관료가 되었는데, 중도에 일본인의 호적으로 입적돼 사실상 일본인의 삶을 살았다.

     

    우장춘은 나가하루(長春)라는 일본어 이름을 쓰긴 했으되 성은 우(ウ)를 고집하는 민족의식을 보였고,(6.25전쟁 때는 해군 소령으로 복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거의 강제로 데려다 앉힌 한국농업과학연구소의 소장으로서 평생을 한국농업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과거 우범선의 묘를 마련해주고 그 가족의 후원자가 됐던 스나가(須永) 가문의 우산 밑에 들었으니 모두 모계 쪽으로 입적돼 스나가의 성을 따랐다.

     

     

    우장춘(1898-1959)

     

    우장춘은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는데 이중 막내딸 아사코가 결혼한 사람이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로, 교세라(Kyocera Corporation), 다이니덴덴(현 KADDI)을 창업하고 일본항공의 회장을 역임한 바로 그 자이다. 즉 그는 우장춘의 사위이자 우범선의 손주 사위가 되는 것인데 그와 같은 한국과의 인연 때문인지 과거 박지성이 J리그 교토 퍼플산가에서 뛸 때 클럽 구단주로서 그를 특별히 아꼈다는 후문이다. 한일 월드컵 후 그가 네덜란드 아이트호벤으로 이적할 때 아쉬움 속에서 성대한 환송회를 열어준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이나모리 가즈오 ( 1932~   )
    내가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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