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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II) - 살해범들은 어찌됐나?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20. 6. 21. 00:00

     

    명성황후가 살해된 후에도 고종은 일본에 아무런 항의도 못하고 그저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야 했으니 만고(萬古)의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을 듯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일본공사 미우라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백성의 고혈을 짜냈다는 누명을 쓰고 폐서인돼야 했던 바, 고종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표출할 길 없는 분노는 친일 내각의 김홍집 총리대신을 향하였으니,(김홍집, 유길준, 서광범 등은 폐서인에 찬성함) 고종은 아관파천에 성공하자 김홍집 체포령을 내려 결국 광화문 육조거리에서 친러 군인과 보부상들에게 맞아 죽게 만든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 총리대신 / 김홍집은 들끓는 내외 여론에 1895년 11월 명성황후 폐위조칙을 철회하였으나 끝내 죽음에서 비켜서지 못했다.

     

    못난 가장(家長)은 밖에서 당한 일에 대한 분풀이를 제 가정에 한다. 고종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자 3번이나 위기의 내각을 이끌었던 총리대신 김홍집을 분풀이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때 김홍집은 유길준과 일본 군인의 피신 권유를 마다하고 담담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구출됨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오』

     

    당시 나이 54세였다. 광화문 해태 상 앞에서 숨진 그의 시신은 그 언저리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고, 사지는 도륙되어 각 도로 보내졌다. 지금이나 과거나 우매한 자는 있기 마련이니 부화뇌동한 다수는 시신을 향해 돌을 던졌으며 어떤 놈은 시신을 씹어먹기까지 했다.(<매천야록>) 어제까지 정경부인이었던 김홍집의 부인은 하루아침에 관노비가 되어야 했던 바,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택했다. 급전직하 김홍집의 가족사 또한 만고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 명성황후의 장례는 우여곡절 끝에 죽은 지 2년만에 국장이 치러져 양주 동구릉에 묻힌다.(명성황후는 사후도 순탄치 않았으니, 동구릉 수릉 옆에 능묘가 조성되었으나 고종의 명령으로 청량리 홍릉으로 이장됐다가 1919년 고종황제 사후 남양주 홍릉에 합장된다)

     

       

    명성황후 운구 행렬 / 명성황후 국장 관련 사진 4장이 2014년 미국 럿거스 대학 소장 그리피스 컬렉션에서 발견됐다.
    위 두 장은 종로를 지나는 운구 행렬이고 아래 사진은 동구릉 내의 묘소이다. / 명성황후의 장례는 서거 2년 후인 1897년 11월에 치러져 동구릉 내 익종(효명세자) · 신정왕후의 능묘 옆에 묘소가 마련됐다.

     

    '왕비를 화장한 곳'이라고 잘못 알려진 명성황후 묘 / 위는 비숍 여사(Isabella Bird Bishop)의 <Korea Her Neighbours>에 실린 그림이다. 다른 책에 실린 같은 배경의 사진들 역시 '왕비를 불태운 곳'이라고 돼 있어 일본 무뢰배들이 경복궁 녹산에 있는 이곳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오류임을 밝힌다.
    동구릉 내 장지로 추정되는 곳
    능묘 부재로 추정되는 돌
    청량리 홍릉 / 고종은 아관파천 등으로 정신이 없다가 동구릉 내 왕비의 무덤을 보고는 그 허술함에 노발대발한다. 이에 청량리에 홍릉이 마련되었으나 1919년 고종 사후 이장되어 남양주 홍릉에 합장된다.
    홍릉이 있던 곳 그 시기는 22년에 불과했지만 일대의 지명은 여전히 홍릉이다. 현 국립산림과학원 안에 표석이 남아 있다.
    홍릉 내 어정 / 홍릉에 들렀던 고종이 잠시 쉬며 목을 축이던 곳이라고.

     

    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사실은 차츰 민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애증이 반반이던 민심은 급격히 동정으로 기울어 왕비의 복위를 요구하는 상소가 쏟아졌고, 복수를 외치는 의병들의 거병이 있었다.(☞ '의병전쟁') 외교가에서도 이에 대한 항의가 이어져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소집한 외교 대표단의 집단 인준 거부 사태가 일어났다. 베베르는 각국 외교관들에게 일본의 왕비 살해와 강제 폐위를 알렸고 고종이 폐위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원천무효임을 선언했는데 불참한 일본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이에 동조했다.

     

     

    명성왕후 서거 무렵(1895년)의 광화문과 육조거리
    장소의 데자뷰(2020년 벽두)
    시간의 데자뷰(2019년 7월 광화문 광장)

     

    나아가 베베르는 일본 공사 미우라를 조선 국모 살해 주범으로 지적하고 응징을 위한 국제 사회의 협력을 요구했던 바,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수가 만천하에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입장이 곤란해진 일본정부는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와 관련자 47명을 모두 퇴한(退韓) 조치시켰다. 일단 그들을 한국 땅에서 내몬 후 분위기를 볼 심산이었다.

     

    미우라는 1차 퇴한자에 이어 그해 10월 23일, 몇 명의 가담자와 함께 2차로 퇴한되어 일본 군용선 오와리마루에 승선했는데 뜻밖에도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미우라 역시 이 돌발적 상황에 놀랐는지 몹시 당황했다는 후문이다.(배 안에서의 마우라 일행의 행동을 감시한 헌병대의 <항해 중 견문과 관련한 신고서>)

     

     

    칼 베베르(Вебер К И ) 부부 / 베베르는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대리 공사로 일본 공사 미우라가 조선의 국모 시해사건의 주모자임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뜻밖의 일은 또 있었다.  그해  미우라를 비롯한 관련자 전원이 소환되어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됐던 것이었다. 그만큼 을미사변에 대한 국제적 여론이 나빴던 탓이니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의 보도는 베베르의 홍보전이 주효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복잡한 국제적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의 이슈가 될 수는 없었을 터, 히로시마 재판소 예심 판사 요시오카(吉岡美秀)는 증거 불충분의 이유로 다음해(1896년) 1월 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한다. 

     

     

    미우라는 이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총 지휘자)와 이노우에(井上馨, 미우라와 교체된 전 공사)는 야마가다(山縣有朋, 미우라를 조선으로 파견한 육군대신)가 나를 조선에 가게 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아마도 나를 가여운 놈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씨부렸다고 한다. 이는 도쿄카구게이대학(동경학예대학) 이수경 교수가 미우라의 고향 야마구치현 하기시립도서관에 대여금지도서로 지정돼 보관 중인 <관수장군(미우라) 회고록>(1925년 발행)에서 발견한 대목으로, 이 교수는 이것을 '미우리가 일본대본영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한 사실에 대해 불쾌감을 토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우라는 또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석방 직후 위문 사절로 보낸 다나카(田中) 궁내대신에게 "총리가 그렇게 사려 깊다면 관련 장관 한 두명을 보내 내가 한 짓(시해사건)을 듣는 게 어때?”라며 자신의 불편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총리를 비롯한 관료 중 그 누구도 자신을 면회 오지 않은 사실에 크게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다시 언급하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범은 이토 히로부미와 대본영인 바, 말인즉 자신은 그들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자백이기도 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 -그날의 진실')

     

    하지만 석방 이후 이들 모두는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니 일본 국왕 메이지마저 시종대신을 보내 석방된 이들을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해마지 않았다. 이에 히로시마로부터 상경할 때 각 역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는 등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미우라는 도쿄에서 천황이 보낸 시종 요네다(米田)의 격려를 받았는데, 이때 '우리가 흥선대원군에게 해줄 것은 없느냐'(민비 시해 사건에 그가 역할을 한 게 없느냐)는 메이지 일왕의 질문에 '그런 건 없었으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답한 대목이 눈에 띈다.(<관수장군 회고록>)

     

    이들은 이후 거의가 출세가도를 달려 크게 성공한 자도 적지 않으나 미우라는 의외로 빛을 보지 못했으니 1910년 추밀원 고문직에 오른 일에 만족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름대로의 대의로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함구하였으니 사건의 자초지종이 지금껏 명확치 않다. 덕분에 자신이 명성황후를 죽였다는 '자칭 진범'들이 양산됐는데, 2005년 한국을 찾아 홍릉 앞에서 속죄한 일본인들도 그들 '진범'의 후손들이다.

     

     

    명성황후 시해 가담자를 지사(志士)로 표현한 기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 육군 중장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대본영의 명을 받아 을미사변을 주도했다. 추밀원 고문관과 궁내관을 지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명성황후를 '영민한 여걸이며 조선의 사실상의 국왕'이라고 표현했다.
    시바 시로( 柴四郞) / 펜실베니아 대학 및 하바드 대학에서 수학한 인물로 미우라의 비서로 을미사변을 기획했다. 1892년 중의원 이후 10선 의원이 되었고 외무성 참정관을 지내기도 했다.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瀬幸彦) / 시해사건 당시 현역 군인이었으므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타이완 총독부를 시작으로 육군대신까지 승승장구했다.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 시해사건 당시 한성신보사 사장으로 무뢰배들을 동원했다. 1902년 중의원에 당선된 후 내리 14선을 했으며 체신대신과 내무대신을 지냈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놈들 / 한성신문사 소속의 무뢰배로 가운데 중절모 쓴 놈이 한성신문사 사장 아다치 겐죠, 그 왼쪽 양복을 입은 놈이 하바드대 출신의 작가 시바 시로다.
    사죄하는 후손
    지난 2005년 을미사변 가담자의 후손들이 남양주시 홍릉을 찾아 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조상의 잘못을 사죄했다.
    반면 히젠도(肥前刀)는 숨었다. / 히젠도는 원래 16세기 에도시대 후쿠오카 히젠 지방의 다다요시(忠吉)라는 장인이 만든 명검이었다. 그것이 불명예스럽게도 을미사변 때 쓰였던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칼의 환수나 폐기를 요구하자 곤란해진 신사박물관 측이 공개를 원천봉쇄하였다.
    후쿠오카 구시다 신사에 보관 중인 히젠도 /명성황후를 찌른 토 카츠아키는 메이지 41년(1908) 그 칼을 구시다 신사에 기증했다. 칼집에 써 넣은 '단칼에 번개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一瞬光刺老狐)는 문구가 보이나 사실 히젠도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다만 을미사변 때 사용된 것은 확실하다.(☞ '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 IV-미야모토와 우범선의 종말 ' )
    구시다 신사 /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일본의 잡신을 모신 소규모 신사다. 접근성이 좋기 때문인지 인터넷상에 많은 방문기가 오르지만 히젠도를 보지 못하는 마당이니 굳이 찾아갈 필요는 없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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